1. 개요
제국주의 혹은 식민지 위생의료체제는 제국주의 각국이 식민지에서 실천했던 위생·의료 방면의 지식 및 제도를 가리킨다. 보통 제국주의 의료(Imperial Medicine), 식민지 의료(Colonial Medicine) 등으로 지칭된다. 전자는 선진 의료를 식민지에 이식하는 제국주의 각국의 주체적 입장을 강조한 것이고 후자는 식민지에서 토착화된 특성이 강조될 때 사용한다.2. 상세
식민지 인도와 조선에서는 영국식 혹은 일본식 위생의료체제의 영향을 받았고 반식민지(半殖民地) 중국에서는 일본·영국·프랑스·미국·독일·러시아 등 서구 열강의 위생의료체제가 이식되었다. 쑨원은 이들 열강에 의한 중국의 분할 상황을 차식민지(次殖民地)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1]제국주의 위생의료체제는 직접적으로는 식민당국이 운영하는 위생의료체제를 의미하지만, 넓게는 선교의료와 록펠러재단 등의 의료활동도 포함한다. 식민당국의 위생의료체제가 일차적으로 식민지배의 편의를 도모하는 것이었다면, 선교의료와 록펠러재단 등의 의료활동은 선교와 박애주의적 활동이 우선적 목표였다. 따라서 식민당국의 위생의료체제와 달리 후자의 활동이 제국주의 팽창에 직간접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일제는 제국주의 위생의료체제를 건립하는 데 있어 서양의학 일원화를 통해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제국주의 위생의료체제는 우선적으로 식민지배의 편의성을 제공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 일본인 의사들이 식민정부의 의료기관을 장악하고, 지방 위생행정 사무는 위생경찰이 담당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경무고문부(警務顧問部)가 설립되었는데, 전국 13개도에 경무고문지부를, 26개 분견소와 120개 분파소 등을 설치하였다.
1906년 지방 위생사무를 위해 경무고문의를 파견하였으며, 동인회(同仁會)라는 민간 의료단체가 이에 호응하였다. 경무고문의는 위생경찰의 전신으로서 점차 위생경찰제도가 정비되었다. 경무고문의의 주요업무는 일본인 치료 및 위생업무였다. 1907년 '경무고문의'에서 '경찰의'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조선인에 대한 치료도 시작되었다. 조선인의 반일감정과 강제적인 위생조치로 인한 조선인들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통감부는 조선인을 친절히 대하고, 경찰직원과 같이 대우하라는 훈령을 공포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일제는 한의사들이 운영하던 광제원에 일본인 의사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들 일본인 의사들은 광제원 소속 한의사들을 면직시키고자 하였으나 내부에서 한의사 면직처분을 거부했다. 결국 일본인 의사들은 광제원 한의사들에게 시험을 실시하고, 시험성적을 빌미로 그들을 면직시켰다. 이러한 조치들은 동서병존을 지향한 대한제국의 구상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1907년에는 광제원이 개편되고, 내부 소속 대한의원(大韓醫院)이 건립되었다. 대한의원은 일본인 관리와 거류민을 위한 의료시설로서 외면적으로는 조선의 후진성을 인식시키고 조선인을 회유하기 위한 시설이기도 했다. 대한의원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지시,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의 찬동, 육군 군의총감 사토 스스무(佐藤進, 1845~1921)의 책임하에 만들어진 것이며, 대한의원이라는 명칭 역시 이토 자신이 명명한 것이었다.
서울대병원은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사업을 하면서 대한의원이 '중앙집중적 국가의료체계의 정점'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 바 있다.[2] 서울대병원이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대한의원을 기념하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거니와 국가의료 운운은 대한의원의 본질을 호도하는 황당한 주장이다. 대한의원은 제국주의 위생의료체제의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다.
통감부 시기인 1907년과 1909년의 콜레라 발생은 경찰과 군대가 중심이 된 군사적 방역 활동이 정착되어가는 시기에 일어났다면 총독부가 들어선 이후로는 페스트 방역을 계기로 무단적인 군사적 방역 활동이 강화된 시기였다. 특히 1915년 6월 '전염병예방령'을 반포하였는데, 대한제국시기와는 달리 지방장관의 역할은 보조적인 위치로 전락하고, 경무부장이 결정권을 장악하고 위생경찰이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밖에 일제는 조선 및 중국 등지에서 방역을 빌미로 식민 지배를 강화하거나 점령행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 점에서는 구미 제국주의도 일제와 다를 바 없었다. 제국주의 사이에서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위생의료분야에서 일제는 강온의 두 가지 정책을 폈다. 온건책은 국가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민간의료 단체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었고, 강경책은 비밀리에 세균전의 실행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동인회의 활동으로 나타났고, 후자는 731부대의 창설로 이어졌다.
동인회는 "청한(淸韓) 기타 아시아 제국에 의학 및 그에 수반하는 기술을 보급하고, 피아인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병고(病苦)를 구제함에 있다"라는 건립목표를 표방했다. 동인회는 1902년 6월 도쿄에서 건립되었고, 1946년 2월 연합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동인회에는 정계·학계·군부의 실세들이 참여하였는데, 두 차례 내각 수상을 지내고 동인회 회장을 역임한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1838~1922)는 동인회의 목표가 "인도주의를 발양함과 동시에 중국에 대한 정치상 외교상 경제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조선에서는 동인회 부회장이었던 사토 스스무(佐藤進)가 육군 군의통감으로 활동하였고, 대구·평양·용산 등지에 동인의원(同仁醫院)을 건립하였다. 1910년 조선병탄 이후 동인의원이 총독부에 이양되면서 동인회의 조선활동은 종결되었다.
1914년에는 천황이 동인회 총재로 추대되었고, 1919년부터 공식적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았다. 1902~1918년까지 동인회 기부금은 매년 36,000엔에 불과했는데, 국가가 재정을 지원한 1919~1941년까지 매년 예산규모는 최저 40만 엔, 최고 1,146만 엔에 이르렀다. 이러한 국가지원을 받기 위해 동인회는 군부 및 외무성에 협력했는데, 병원 건설 역시 군부가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설정했던 중국 동북부의 안둥(安東, 현 단동), 잉커우(營口) 지역 등에서 우선적으로 시작되었다.
중국 각지의 동인의원의 주요 진료실적과 평가를 살펴보면, 한커우(漢口)동인의원은 1904년 병원설립 이래 일본인만 진료했다. 1923년 이후로는 중국인에 대해서도 진료를 실시했는데, 동인의원이 중국인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1914년 베이징일화동인의원(北京日華同仁醫院)이 정식 개원하였는데, 중일전쟁(1937~1945)으로 일시 폐쇄될 때까지 946,000명에 이르는 환자를 진료하였고, 콜레라 접종 등 방역 활동에도 힘써 중국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일제의 산둥(山東) 침공 결과, 1925년 4월 동인회는 독일이 운영하던 칭다오(靑島)와 지난(濟南)의 병원을 인수하였다. 지난동인의원의 진료실적은 1925년에서 1937년까지 일본인 진료가 중국인에 비해 두 배 이상을 차지하였다. 중일전쟁 이후로는 베이징, 한커우, 칭다오, 지난 등을 포함한 33개의 진료반과 방역반을 재편·신설하여 전시이동병원으로서 일제의 군사행동에 본격적으로 보조를 맞추었다.
1940년대 동인회는 자신들이 시작한 활동범위가 조선·만주·중국뿐만 아니라 방콕·싱가포르·목요도(호주 북부의 섬) 등 당시의 대동아공영권의 범위와 일치한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밝힌 바 있다. 즉, 그들이 주장하던 '일시동인'(一視同仁, 만물을 하나로 보아 똑같이 사랑한다)의 실체가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패권주의였음을 확인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동인회의 활동은 설립초기부터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지배전략의 일환으로 점철된 것이었으며, 지도부의 구성이나 재정구조로 볼 때 민간의 순수의료라기 보다는 국가 주도의 통치전략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동인회가 표면적으로는 순수의료를 표방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세균전이라는 비인도적 목표를 가진 군부대가 비밀리에 창설되었다. 이른바 731부대 혹은 이시이부대로 알려진 이 부대는 1933년 관동군 산하 방역급수부(防疫給水部)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 731부대라는 명칭은 1941년 8월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731부대는 하얼빈시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20㎞ 떨어진 부근에 6㎢의 특별 군사지역에 위치했다.
731부대의 부대장은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1892~1959)로, 그는 교토대학 의학부 졸업 후 육군 군의를 거쳐 1940년 8월부터 관동군 방역급수부장에 올랐다. 공금횡령으로 육군군의 소장에서 제1군 군의부장으로 좌천되기도 했으나 육군군의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다시 731부대로 복직되었다.
731부대 본부는 총무부(마루타 관리 및 해부), 제1부(세균연구), 제2부(실전 연구), 제3부(세균배양기 및 도기폭탄 제조), 제4부(세균제조), 교육부, 자재부, 진료부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밖에 4개의 지부, 1개 실험장, 직속 항공부대를 운영했으며, 총 3,000여 명 규모(1개 여단 규모)였다.
이시이 시로는 패전 이후인 1945년 11월 연합군과 거래를 시작했는데, 연합군사령부에 생체실험 자료를 넘기는 것을 조건으로 731부대원 전원에 대한 전범기소를 면하였다. 이시이는 전후 도쿄대학 교수 및 학장 등을 역임했고, 대다수 의료진 역시 대학교수로 활동한 바 있다. 731부대의 잔혹상은 미국의 묵인으로 역사 속에 묻힐 위기였으나, 1949년 12월 소련 하바로프스크 군사재판 과정에서 731부대의 활동이 일부 밝혀짐에 따라 그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자료는 공개되지 않은 채 몇몇 증언에 의해서 일부 사실만이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731부대가 실행한 주요 실험으로는 페스트·이질·콜레라를 이용한 자기폭탄 실험, 동상실험, 여성 및 영아를 대상으로 한 매독실험, 각종 세균 및 독극물 주사실험, 독가스 실험, 장기적출실험, 건조실험, 아사실험 등이 있었다. 이들 생체실험 대상은 마루타로 불리었는데, 마루타는 통나무, 즉 실험재료라는 뜻이었다. 생체실험을 위해 중국인·조선인·러시아인·몽골인 등 평시 200~300명 규모로 유지되었으며, 매해 600여 명 이상 사망하였고, 총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마루타에게는 이름이 없고 단지 남녀구분과 번호로 칭해졌기 때문에 희생자가 누군지, 정확한 수치 등을 파악하기 어렵다. 단지 독립운동을 하다가 관동군 헌병대나 특무기관에 감금된 후 고문을 받던 중 731부대로 이송된 경우에는 일부 이름이 남아있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심득룡(沈得龍), 이청천(李淸泉) 등이 바로 그들이다.
731부대의 세균전은 실전에서 실행된 바 있는데, 역사상 노몬한(Nomonhan)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1939년 5월 만몽의 접경지대에서 할하강 유역의 노몬한에서 몽골과 일본의 국지전이 발생하였는데, 몽골과 상호방위협정에 있던 소련이 진군하게 되었다. 양국 모두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기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전투는 일본의 패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731부대는 세균전 수행 성공으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식민통치의 확장과 전승을 위해 제국주의 위생의료는 식민지인에 대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여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연성통치와 비인도적인 경성통치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