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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09 23:32:02

정소수

성명 정소수(鄭小秀)
이명 정소수(鄭召守)·정효영(鄭孝永)
생몰 1911년 3월 5일 ~ 1945년 1월 28일
출생지 경상남도 초계군 덕곡면 장리
(현 경상남도 합천군 덕곡면 장리)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소수는 1911년 3월 5일 경상남도 초계군(현 합천군) 덕곡면 장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덕곡면 율지리로 이주했다가, 대구부로 이주하여 봉산정(현 봉산동)에서 살았다.

그는 일찍부터 조선의 식민지화에 격분하여 독립을 열망하고 있었는데,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7년 2월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강좌회에 참여하며 사회주의 이론을 접하면서 점차 민족주의 사상을 근저로 하는 사회주의적 혁명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11월 김성칠(金聖七), 황보선 등의 학우들과 함께 구화회(丘火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강령을 지(知), 각(覺), 약(躍)으로 정하고 서무, 문화, 재무의 3개 부서를 설치하였다. 이들은 이후 사회과학을 연구하며 동지 규합에 힘썼으나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8년 5월 조직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끓어오르는 항일의식으로 인해 교내에서 재차 항일투쟁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들은 이전부터 민족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일제 식민지 교육제도의 모순을 직시하고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의 실현을 열망하고 있었으므로 이의 관철을 위해 활동하기로 하였으며,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비밀결사인 적우동맹에 가입하였다.

마침 대구고등보통학교에서 신망있는 교사를 전임시키고 저열한 교사로 대체하자 신망없는 여러 교사를 배척하고 식민지 교육제도를 철폐하기 위하여 동맹휴학을 단행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1928년 6월부터 여러 차례에 걸친 모임을 갖고 마침내 9월 26일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실현' '교장 및 신망없는 교사의 배척' 등의 동맹휴학 조건을 기재한 진정서와 성명서를 교장에게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정소수는 이 일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9년 10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5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4년을 언도받았으나 # 검사의 공소로 재차 구금되었고 2차례의 구류갱신 끝에 # 1930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원심 미결구류일수 중 5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4년을 언도받고 검사의 공소 이유 없음을 판결받아 # 출옥하였다. # 그러나 미결기간으로 1년 4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2년 부산적색노동조합 건설협의회(釜山赤色勞動組合建設協議會)에 참여하여 메이데이 항쟁에 필요한 항일 격문을 제작 및 배포하다가 다시 체포되었으나 그해 7월 28일 부산지검의 예심에서 소위 치안규칙 위반·출판규칙 위반·출판법 위반·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면소로 방면되었다. #

정소수는 이후에도 항일독립운동의 뜻을 굽히지 않고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937년 12월 2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받다가 1945년 1월 28일 별세하였다.

200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