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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9 21:16:17

정광석(농구)

정광석의 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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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350><tablebordercolor=#0f236a> 파일:부산 KCC 이지스 엠블럼.svg 부산 KCC 이지스
감독

(현대-전주 시절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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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초대 2대
3
4대
이경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78~1980)
방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0~1986)
정광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6~1993)
감독 대행
박수교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3)
박수교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3~1994)
5대 파일:Taejeon Hyundai Gullivers Logo.png
신선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4~1996)
프로화 이후
<rowcolor=#fff>
2대
3대
신선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7~2005)
허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5~2015)
감독 대행
추승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5)
추승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5~2018)
감독 대행
오그먼 파일:미국 국기.svg
(2018)
<rowcolor=#fff> 4대 5대 파일:부산 KCC 이지스 엠블럼.svg ]]
오그먼 파일:미국 국기.svg
(2018~2019)
전창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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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광석 농구 감독.jpg
이름 정광석
출생 1945년 2월 10일
별세 2012년 7월 26일 (향년 68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수송전기공고-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포지션 가드
소속 구단 해병대농구단 (1969~1971)
산업은행 (1971~1979)
지도자 산업은행 코치 (1979~1980)
현대전자 코치 (1980~1986)
현대전자 감독 (1986~1993)
현대전자 총감독 (1993~1997) 대한민국농구대표팀 감독 (1997)
다신 타이거스 감독 (1998~2000)
고려대학교 농구부 감독 (2000.11~2003.2)
대만 국가대표팀 감독 (2007)

1. 개요2. 선수 시절3. 지도자 시절4. 사망5. 지도 스타일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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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농구인.

2. 선수 시절

1945년에 태어나 수송전기공고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69년 해병대 농구단에 입단한 이후 산업은행에서 슈터로 선수생활을 했다.

3. 지도자 시절

은퇴했던 산업은행 코치를 거쳐 현대전자 코치로 이적한 이후 현대전자의 감독을 역임했다. 당대 최고의 선수들인 신선우, 박수교, 이충희, 이문규를 지도하면서 정상을 이끌었다. 1993년에는 총감독으로 물러나면서 후배 지도자가 된 박수교 신선우를 도왔다.
이후 1997년 ABC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모교 후배인 김동광 코치와 함께 한국농구를 28년만에 아시아 정상에 올려놓게 된다.[1]
이후 다신 타이거즈 감독과 고려대학교 농구부 감독을 역임한 이후 대만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이후 2009년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4. 사망

2009년 신장암으로 투병했으나 2012년에 병세가 악화되면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5. 지도 스타일

온와한 성품 뒤에는 강한 카리스마로 선수단을 이끌었다. 이로인해 따르는 지도자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김유택이었다. 이외 고려대 농구부 출신 선후배들도 따랐다.

박한 감독의 후임으로 임명된 임정명과 정광석, 진효준, 이충희 감독 등은 강압적인 훈련, 선수진 융화 실패, 포워드 중복투자, 선수들의 이탈, 스카우트 비리 등으로 고려대 내부에서도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2] 고려대학교 농구가 개판 일보 직전, 아니 개판까지 가면서 박한 감독의 지도력은 다시 평가받았다.[3] ( 네이버 농구전문 블로거 뚱이의 견해)

6. 관련 문서



[1] 이 당시 중국 선수들이 외국에서 단체로 병에 걸려와 컨디션이 극악이었다. [2] 위와 같은 상황이 터진 건 감독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며, 비리 등으로 가득 찬 혼탁한 대학스포츠 문화와 학교 측의 무능한 대응 및 책임 전가, 회전문 인사, 학부모들의 과도한 간섭 등 시스템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3] 다만 90년대 그 당시에는 농구 경기장을 찾은 고려대생들에게 박한 감독에 대한 평가가 박했다가 현 시점에서야 재평가를 받은 사실이라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박한 감독 후임부터 헬게이트가 열릴 줄 누가 알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