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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4 03:34:12

전범선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전범선
Jun Bum-sun
파일:Junbumsun.jpg
출생 1991년 7월 24일 ([age(1991-07-24)]세)
강원도 춘천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 68kg
학력 호반초등학교 (졸업)
강원중학교 (졸업)
민족사관고등학교 (졸업)
다트머스 대학교 ( 역사학 / 학사)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 ( 역사학 / 석사)
직업 가수
데뷔 2014년 1집 앨범 ' 사랑가'
종교 무종교[1]
병역 육군 병장 만기전역 ( 카투사)
(2016년 12월 19일 ~ 2018년 9월 18일)
소속 풍류회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텀블러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민족사관고등학교 시절2.3. 홍대 인디씬 생활(1기)2.4. 다트머스 대학교 시절2.5. 전범선과 양반들 결성2.6. 홍대 인디씬 생활(2기) 및 [사랑가] 발매2.7. 옥스퍼드 대학교 시절2.8. [혁명가] 발매 및 활동2.9. 군입대2.10. [방랑가] 발매
3. 음악적 능력
3.1. 작곡 능력3.2. 작사 능력3.3. 보컬 능력
4. 디스코그라피5. 방송 활동6. 수상 경력7. 여담
7.1. 자유주의자7.2. 탈민족주의자7.3. 채식주의자7.4. 강원도의 아들7.5. 미8군7.6. 서점 풀무질 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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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록 음악 가수, 작곡가.

록밴드 ‘ 양반들’의 보컬과 리더를 맡고 있다.

2016년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한국 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싱글 부문을 수상하였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991년 7월 24일 강원도 춘천시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유년시절에는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주로 운동을 했다고 한다. 호반초등학교 축구부 출신으로, 손흥민 선수와 경기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유년시절 운동을 한 경험이 경쟁심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리코더를 잘해서 전국 대회에서 입상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미국에 있는 이모 집에 잠깐 머무른 적이 있는데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서의 경험이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고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강원중학교 진학 후 본격적으로 공부에 흥미가 생겨서 전교 1등을 독차지하고 학생회장을 지냈다고 한다. 민사고 합격 이후 놀아서 딱 한 번 전교 30등을 했고 이전까지는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다고.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운동보다 훨씬 적은 노력과 요령으로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강원중학교 3학년쯤 Green Day를 통해 밴드 음악에 눈을 떴고 민사고를 합격한 후 당당하게 학교에 밴드부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학교와 선생님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학생회장이자 민사고 합격생이라는 자신감으로 밀어붙여 밴드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SG워너비, 버즈 등의 뮤지션이 사랑을 받았는데 모든 학생들이 같은 노래를 듣는 것에 반감이 있었다고 한다.

2.2. 민족사관고등학교 시절

국제반에 재학하여 미국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였다. 강원중학교의 총아였던 시절과는 달리 민사고 내에선 중상위권 정도의 성적이어서 공부에 회의를 많이 느끼게 되었다고 하며 ‘남중이었던 강원중학교와는 달리 여자가 많아서 좋았다’고 한다.[2]

공부를 열심히 해도 1등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공부는 적당히 하고 밴드 활동에 매진했다고 한다. 당시 활동했던 밴드의 이름은 PLZ였다. 미국 대학 입시는 이러한 ‘교외활동’이 중요하기 때문에 오히려 대학 진학에 도움이 많이 됐다고 한다.

민사고에서 ‘민족 라디오’라는 민사고 내부 팟캐스트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학교 내에서 음악하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씨디를 만들어 팔기도 했고 특목고끼리 연합하여 ‘민족 락 페스티벌’이라는 것을 개최했다고 한다.

대학 원서 쓸 시기가 되자 아이비 리그 중 산골짜기에 있는 다트머스 대학교를 발견했는데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촌놈인 그는 ‘시골 같은 느낌이 좋아서’ 다트머스에 지원하여 합격했다고 한다. 당시의 꿈이 국제변호사였고 역사를 좋아했기 때문에 영어 실력을 가장 늘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리버럴 칼리지에 지원했다고 한다.[3]

2.3. 홍대 인디씬 생활(1기)

2009년 10월, 다트머스 대학교를 합격한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밴드 ‘놈’을 결성하고 꿈에 그리던 홍대 인디밴드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사고 갓 졸업한 놈들의 밴드라 실력이 너무나 어설펐다.’고 한다.

그러나 소년적인 감수성이 충만하던 시기라 곡 자체는 좋았다고 한다. 실제로 소년적인 색깔이 짙고 멜로우한 사운드가 강점인 1집 [사랑가]는 대부분 당시 썼던 곡들로 채워졌다. 클럽 빵, 프리버드, 에프에프 등에서 공연을 하며 차근차근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홍대 클럽 “살롱 바다비"에 ‘놈'으로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이스턴 사이드 킥(이하 ‘이사킥’)을 만났는데 영입을 제의받아 이사킥 9개월간 이사킥의 초창기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그에 따르면 ‘스트록스의 정취가 느껴지고 개러지락을 표방하는 점이 좋았다’고 한다.

이사킥 리더인 고한결이 대학에 진학하지 말고 밴드에 남아 달라고 얘기했으나 그가 ‘대학은 졸업해야 하지 않겠나요 형님’이라고 하자 별 말 없이 수긍했다고. 결국 10개월간의 짧은 인디씬 생활을 마친 그는 2010년 8월 대학 입학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2.4. 다트머스 대학교 시절

그의 표현에 따르면 다트머스 대학교 프래터니티 문화[4]가 발달해서 보통 술만 마시는 학교였다고 하지만 그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고 역사와 운동과 밴드를 사랑하는 바른생활 대학생이었다고 한다.

다트머스에서 ‘샤스(Shas)’라는 밴드를 만들어서 로컬 밴드 컴피티션에서 여러 차례 우승했다고 한다. 밴드 이름이 Shas인 이유는 한국에서 하던 밴드의 이름인 ‘놈’을 영어 키보드로 치니 ‘Sha’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다트머스 시절을 거치면서 ‘공부의 재미’에 눈을 떴다고 한다. 문제지나 푸는 한국에서의 공부와는 달리 원서로 된 고전들을 읽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다트머스의 공부는 그로 하여금 공부의 즐거움을 느끼고 학구열이라는 것을 처음 가져 보게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의 경험이 나중에 옥스퍼드 대학교로 석사 학위를 따러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민사고 시절에 따 놓은 AP 덕분에 3년 만에 조기졸업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인 슈스케 출신의 가수 케빈오도 다트머스 경제학과(전범선보다 2년 선배)를 나왔는데 잘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한다.

2.5. 전범선과 양반들 결성

다트머스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미국 로스쿨 입학 준비를 했다고 하며 그 과정에서 또 밴드병이 도져서 주변 친구들을 꼬셔 로스쿨 입학 전까지 할 취미 겸 프로젝트 밴드를 결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전범선과 양반들’이었다 한다.

마침 그는 다트머스에서 공부하면서 양반이라는 개념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전범선과 양반들’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공부 할 땐 공부하고 풍류를 즐길 때는 풍류를 즐기는 양반들의 모습이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장기하와 얼굴들에 대한 오마주의 뉘앙스도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 국카스텐은 ‘정말 노래를 잘하는 밴드’라면, 장기하와 얼굴들은 ‘왠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위대한 음악’으로 느껴졌다"고 하며 “‘한국적이다’라는 표현을 싫어하지만, 가사가 너무나 한국적이어서 좋았다”고 한다.

2.6. 홍대 인디씬 생활(2기) 및 [사랑가] 발매

전범선과 양반들을 결성한 그는 2013년부터 2014년까지 홍대 인디씬 생활 2기를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행복했지만 동시에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는 원래 개러지 록을 좋아하는데 이사킥 같은 밴드들이 선전하는 상황에서 ‘전범선과 양반들’의 음악적 색깔을 잡기가 굉장히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집 [사랑가]는 2집 [혁명가]에 비해 ‘양반들'의 색채가 훨씬 약하다. 전범선 본인도 ‘실질적으로 전범선 솔로에 더 가까운 앨범'이라고 평한 적이 있다.

이 시기에 그는 미국 로스쿨 순위 4위인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 합격했으나 역사학에 대한 미련 때문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에도 역사학 전공으로 석사 과정 지원을 했고 두 군데 모두 합격했으나 비용적인 문제 때문에 옥스퍼드 진학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로스쿨을 포기한 가장 큰 이유는 법무부에서 인턴을 하면서 자신이 생각했던 법조인의 모습과 현실의 법조인 사이에 간극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옥스퍼드 대학교 석사과정 진학을 결정한 그는 지금까지의 밴드생활을 마무리하는 느낌으로 곡들을 모아 [사랑가]를 만들어 발매하고 영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참고로 [사랑가]는 활동은 물론이고 유통조차 제대로 안 된 앨범이라고 한다. 당시만 해도 그는 학자의 길을 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는 취미생활을 마무리하는 느낌으로 낸 앨범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1년 후 앨범을 또 만들었다.

2.7. 옥스퍼드 대학교 시절

영국 대학 석사 과정의 특성상 그는 1년짜리 석사를 한 것으로 보이며 과정 내내 ‘매우 행복했다’고 한다. 진리의 상아탑 안에서 지적인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고로 석사논문의 주제는 토머스 페인[5]이었다고 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시기에 토머스 페인과 미국 혁명사를 공부하다가 혁명적인 악상이 떠오르면 그때그때 방에서 간단히 녹음을 했는데 그걸 모아 놓으니 [혁명가]가 되었다고 한다. 1년간 음악활동도 미루어놓고 공부만 매진한 덕분에 지적인 갈증이 많이 해소되었고 결정적으로 토머스 페인의 유서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방구석에서 공부만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어 봐야 겠다.’라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2.8. [혁명가] 발매 및 활동

“다시 한번, 엎어보자!”
500년 전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마르틴 루터는 “음악은 예언자의 기술이고, 영혼의 동요를 가라앉히는 유일한 기술이며, 신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 중 가장 웅장하고 가장 유쾌한 것의 하나”라고 말했다. 그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강렬한 록 사운드와 조화를 이루는 변화무쌍한 한국적인 리듬. 심각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날카롭고 해학적인 가사. 전범선과 양반들이 지난해 초 세상을 겨냥해 쏘아올린 이 곡은, 같은 해 말 한국 정치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통렬하고도 유쾌하게 관통하며 음악의 힘을 증명했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정진영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2015년 여름에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밴드 멤버들을 다시 모아 ‘전범선과 양반들’을 재정비하고 2집 [혁명가] 제작에 착수했다. 2016년 3월 21일 발매된 [혁명가]는 초기에는 큰 반응이 없었으나 점차 평론가와 마니아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게 되었다.

2016년 2분기까지만 해도 평론가와 마니아들 중심으로 좋은 평가를 받다가 2016년 3분기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함께 촛불시위가 일어나자 떡상해 버렸다. 가사들을 보면 그에게 예지능력이 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노래와 시기가 잘 어울렸다. 정작 전범선 스스로는 녹두장군 전봉준을 레퍼런스로 만든 앨범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6]
어마어마 무시무시하게 대단한
음모가 있는 건가
엄청난 것이 왔구나
우주의 모든 기운이
그대와 나만을 둘러싼다
<아래로부터의 혁명> 中

그 결과 신인 수준이었던 전범선과 양반들은 이례적으로 민중총궐기 무대에 등장하여 혁명가를 부르게 되었고 이후에도 [혁명가]는 계속 좋은 평가를 받아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노래’과 ‘최우수 록 - 음반’ '최우수 록 - 노래' 부문에 노미니되었으며 수록곡인 <아래로부터의 혁명> 이 ‘최우수 록 노래’ 부문을 수상하였다. 그는 전범선은 [혁명가]를 가지고 “목표했던 것을 모두 이룰 수 있었던 앨범”이라고 평한 적이 있다.

2.9. 군입대

[혁명가]의 기운이 한창 끓어오르던 2016년 12월 19일 그는 돌연 카투사로 입대했다. 카투사 복무제도의 특성상 예정된 입대였으나 한창 주목을 받던 시기에 입대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큰 분위기였다. 2018년 9월 18일 전역했다. 선임은 같은 성씨인 전성욱이었다.

2.10. [방랑가] 발매

“X이나 뱅뱅이다 시X아”
2017년 11월, 전범선과 양반들 3집 [방랑가]가 기습발매되었다. [방랑가]는 군 입대 전에 만들어 놓은 앨범이라고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군생활 중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활동을 못 했다.

구성이나 사운드적인 측면에서 [혁명가]의 연장선상에 있는 느낌이 있다는 평이 지배적이고 한국 고유의 레퍼런스 사용을 통한 작법도 여전하다. 그러나 주제의식이나 컨셉트 자체는 많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방랑가] 제작 시기를 ‘방랑하던 시기’라고 회상한 적이 있다.

[혁명가]의 레퍼런스가 녹두장군 전봉준이었다면 [방랑가]의 레퍼런스는 만해 한용운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앨범 커버가 원래 한용운이었는데 발매 직후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트랙별로 뜯어 보면 천안삼거리, 김성동, 정호승, 이쾌대 같은 레퍼런스들이 등장하는데, 91년생인 그가 어떻게 찾아냈나 싶을 정도로 올드하고 매니악한 것이 특징이다.

3. 음악적 능력

3.1. 작곡 능력

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하드록이지만 1970년대 서구 스타일을 추구하는 건 아니다. 이제는 구닥다리가 된 표현을 먼지를 털어가며 굳이 사용하자면 이런 음악을 ‘한국적’이라 불러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90년대 후반부터 시도되고 사용됐으며 이뤄내야 할 대상이던, 하지만 이를 내세운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하고 결국 용도 폐기되다시피 한 이 ‘한국적’이라는 추상을 전범선과 양반들은 잘 벼린 칼처럼 드러낸다.
김작가
‘조선록’이라는 콘셉트는 이 앨범을 듣는 데 큰 영향을 끼치진 못한다. [혁명가]가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건 선명한 리프와 확실한 훅 덕분이다. 록에서 가장 강력한 이 두 무기를, 이 양반들은 모두 쥐고 있었다.
이종민
그는 서구 록 음악의 본질인 기타 리프와 보컬 훅에 매우 충실한 탄탄한 작법과 동시에 강한 한국적인 색깔을 가졌다고 평가받고 있다. 브릿팝, 하드록, 싸이키델릭, 블루스, 펑크록, 개라지록, 국악 등 다양한 장르들을 소화해 낸 전력이 있으며 평론가와 매니아들의 기준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는 모양이다.

3.2. 작사 능력

‘구운몽’에서 “다 끝이야”라고, "나는 철학자도 선비도 아니야 / 나는 혁명가도 영웅도 아니야 / 그저 나란 사람은 말이야 / 기타 하나 뽑아 들고 그대 맘을 훔치러 나선 사내일 뿐이야"라고, “그저 내게 남은 것이 있다면 작은 돛단배와 같은 추억 한 척 / 이제 낮은 곳에 다시 내려와 허연 하늘만 멍하니 바라본다”라고 이 모든 것이 일장춘몽이었다 말하는 허무의 마무리는 특히 탁월했다 … 전범선은 이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옛 소재를 가지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더해 감각적인 노랫말을 써냈다.
김학선
역사, 문학, 철학, 종교 등 무거울 수 있는 인문학적 소재들을 자유자재로, 무엇보다 세련되게 표현해낸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나 ‘뱅뱅사거리’ 등의 국악스러운 직설은 로큰롤 특유의 반골 기질과 어우러진다. 비슷하게 한국적이지만 장기하의 자조적인 어투와는 정반대인 ‘양반’의 기개가 돋보이는 스타일. 사실 순우리말로 이루어진 가사는 촌스럽기 쉬운데 그의 작사 능력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고 평가받는다.

3.3. 보컬 능력

사실 작곡과 작사에 비하면 보컬이 떨어지는 편이다. 락 보컬치고 음역이 높지는 않지만 성량이 꽤 큰 편이고 지를 때 칼칼한 목소리가 특징이다. 그리고 발음 때문인지 외모 때문인지 상당히 구수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공연 때 느껴지는 에너지만큼은 폭발적이어서 팬들 사이에서 공연에 대한 기대가 높은 편이다.

4. 디스코그라피

  1. 이스턴 사이드킥 [흑백만화도시 EP](2010. 08. 18 발매)
  2. 전범선과 양반들 1집 [사랑가](2014. 08. 05 발매)
  3. 전범선과 양반들 2집 [혁명가](2016. 03. 21 발매)
  4. 전범선과 양반들 3집 [방랑가](2017. 11. 30 발매)

5. 방송 활동

tvN 대학토론배틀 4에 나온 적이 있는데 당시 팀명은 ‘풍문으로 들었소’였고 24강까지 진출했다.

아리랑 라디오 리사의 소닉시티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다.

2019년 4월 15일 tvN 문제적 남자에 출연하여 자신의 스펙과 음악, 철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예사롭지 않은 비범한 뇌섹 실력으로 한 문제를 멋있게 풀어내는 데 성공하고 라이브로 '혼자가 되는 시간'을 부르고 따로 리코더 솔로 연주도 선보여 화제가 되었다.

2021년 1월 30일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 출연하여 본인의 전공을 살렸다.

6. 수상 경력

2016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싱글 부문에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선정되었다.

2017 통일부 주최 유니뮤직레이스에서 <전선을 간다>가 통일부 장관상(대상)을 받았다.

7. 여담

7.1. 자유주의자

스스로를 영미식 자유주의자, 속칭 ‘ 리버럴’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하는 행동이나 추구하는 이념 등도 그렇게 보인다. 원래는 사회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의 중간 쯤이었는데 이사야 벌린, 토머스 페인, 리처드 도킨스 등에게 강한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자로 바뀌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스스로 존 롤스 정도의 포지션이라고 주장한다.

7.2. 탈민족주의자

전봉준스러운 비주얼과 달리 스스로를 탈민족주의자라고 주장한다. 한복을 자주 입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민사고 시절 한복을 접해서 한복이 남들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편한 의복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사에서 한국어를 고집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인데 그냥 한국어가 더 자연스럽고 편해서라고 한다. 유학 생활 중 밴드 활동을 하면서 ‘모국의 언어로 노래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발언들로 보았을 때 보통의 민족주의자들이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고민하는 것과 달리 그는 ‘자연스러운 민족 정체성’을 고민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민사고-아이비 리그-옥스퍼드의 테크트리를 타면서 생긴 고민과 스스로 찾은 해답으로 보인다.

7.3. 채식주의자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자유주의자가 되면서 ‘나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겠다’는 신념이 생겼고 ‘다른 사람’이 ‘다른 생명체’로 확장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고통을 느끼는’ 기준은 통각신경의 유무라고 한다. 이론대로라면 완전채식( 비건)을 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쉽지는 않다고 한다. 그래도 스스로 최대한 지키고자 노력한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에서 비건은 ‘타인에게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그는 개인적 신념일 뿐이기 때문에 채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다만 칼럼 등으로 채식 이념을 홍보하기는 하며 동물권 관련 운동들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2018년 10월부터 2020년 2월까지 이태원 해방촌에서 '소식'이라는 비건 사찰음식점을 운영했다.

7.4. 강원도의 아들

강원도에서 유년시절과 10대를 보내서 그런지 강원도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 군 입대 전에 강원도민일보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연재[7]했는데 해당 칼럼들을 읽어 보면 강원도와 춘천에 대한 애정과 그에 기반한 진지한 고민들이 느껴진다.

7.5. 미8군

카투사로 동두천 미2사단에서 복무하면서 ‘조선 락의 뿌리’를 찾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큐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자세한 것은 전역 후 활동에서 보여질 것으로 예상된다.

7.6. 서점 풀무질 인수


성균관대학교 인사캠 앞에 있는 그 날이 오면과 함께 한국의 몇안되는 인문과학전문 서점인 '풀무질'을 2019년에 인수하였다. 1993년부터 본 서점을 경영해온 은종복 씨[8]가 경영난으로 폐점을 한다고 하자 고한준, 장경수와 함께 새로 서점을 지키기로 하였다. 1억 5천의 책방 부채를 갚기 위해 일단 1천만원을 목표로 텀블벅 펀딩을 하였는데 목표 초과치인 2천 7백만 원을 달성하였다고 한다.


[1] 기본적으론 무종교이나 가톨릭 집안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타 종교에도 학문적 관심이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2] 참고로 강원중학교는 전범선의 졸업 후 남녀 공학으로 전환했다. [3] 다트머스는 아이비 리그 대학 중에서도 학부 중심 교육이 강한 학교이고 학부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에 가깝게 구성되어 있다. [4] 형제회. 대한민국으로 치면 동아리와 학회의 중간쯤이다. [5] 토머스 페인은 미국 혁명사의 주역이었지만 고독하고 불행한 죽음을 맞았다. 전범선에 따르면 1년 내내 토머스 페인이 쓴 글만 읽다가 마지막으로 유서를 읽으니 ‘친구가 죽은 기분’이었다고 한다. [6] 인터뷰에서도 역시 전범선은 2016년 당시 이러한 가사가 완벽한 우연이라고 이야기했다. 노래 자체도 2015년에 만들었으며 심지어 혁명을 통한 "사랑"을 쓰려고 했던 곡이라고 한다. [7] 실제로 글을 상당히 잘 쓰는 편이고 스스로도 글쓰기를 좋아하여 기고도 여러군데 하고 책도 만들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8] 문재인 대통령의 호프집 대담에서 동네 서점 대표로 나온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