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센 공국 Hartogdom Sass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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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 | |||
위치 | |||
804년 ~ 1296년 | |||
역사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작센족 | 작센비텐베르크 공국 | ||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 | |||
베스트팔렌 공국 | |||
올덴부르크 백국 | |||
안할트 공국 | |||
블랑켄부르크 공국 | |||
브레멘 공국 | |||
뮌스터 주교후국 | |||
호야 백국 | |||
마그데부르크 주교후국 | |||
베르덴 주교후령 | |||
뤼베크 주교후령 | |||
민덴 주교후령 | |||
리페 후국 |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 |||
라체부르크 주교후령 | |||
<colbgcolor=#000><colcolor=#fee46e> 지리 | |||
수도 | 없음 | ||
인문환경 | |||
인구 | 약 1,100,000명 (1800년) | ||
언어 | 라틴어, 중세 저지 독일어, 고대 작센어 |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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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작센 공국은 현재 독일의 작센 주와는 다른 지역이었으며, 현재 독일의 니더작센 주와 홀슈타인, 그리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북부에 해당했다. 즉 1180년 이전의 작센은 독일 왕국에서 가장 북쪽에 있던 지역이었다. 독일의 5대 부족 중 유일하게 바다와 접하고 있었고, 때문에 발트해나 북해로의 진출과 무역이 활발했다.참고로 영국 앵글로-색슨족의 그 색슨족이 바로 이 작센족이다. 5세기경 작센족(색슨족)이 브리타니아[1]를 침공한 것도 바로 북해 연안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작센족은 작센 왕국을 세웠고, 다른 게르만족과 마찬가지로 아리우스파를 받아들였다. 서쪽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메로베우스 왕조의 프랑크 왕국과는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772년 카롤루스 왕조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이단을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작센 왕국을 침공하여 근 40년간 지속된 작센과 프랑크의 처절하고 잔혹했던 전쟁이 시작되었다. 카롤루스는 이단을 처단한다면서 점령한 작센 지역에서 학살을 일삼았고, 작센인들은 카롤루스의 군대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전쟁으로 작센의 인구가 크게 감소할 정도였는데, 결국 810년 마지막 항쟁이 실패하면서 작센은 프랑크 왕국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프랑크 왕국에 합병된 후, 슬라브족과 노르드족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작센 백작 리우돌프가 850년 작센 공작이 되어 훗날 오토 왕조로 이어지는 리우돌핑 가문의 시조가 된다.
900년 동프랑크 왕국이 사실상 5개의 부족 공국들의 연합 왕국 체제로 전환된 시점에서 작센 공국의 리우돌핑 가문이 가장 강성한 세력을 가지지고 있었다. 911년 루트비히 4세 유아왕이 사망하여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되자 5대 부족 대표들이 모여 차기 왕을 선출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는데, 리우돌핑 가문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가 가장 강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으나 하인리히 1세는 연장자인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이후 하인리히 1세는 마침 아들이 없었던 콘라트 1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919년에 독일 국왕에 올라 오토 왕조(작센 왕조)를 개창했다.
하인리히 1세의 아들 오토 1세는 962년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이후 작센 공국을 빌룽 가문에 하사했으나, 오토 왕조는 여전히 작센 공국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작센 공작은 주플린부르크 가문, 벨프 가문, 아스카니아 가문[2] 등을 거쳤다.
작센 공국의 전성기는 12세기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Heinrich der Löwe) 시절이었다. 하인리히 사자공은 엘베강 동쪽으로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벌여 동방의 슬라브 영토로 진출, 메클렌부르크과 포메른 공국을 정벌하고, 속국화시켜 그곳에 여러 도시를 건설했으며 독일 식민 정책을 추진했다. 사자공 하인리히는 1154년 남부의 바이에른 공국까지 지배하며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보다도 훨씬 넓은 영지를 보유하는 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황제와 사자공은 거의 일평생에 걸친 권력 싸움을 이어갔다. 바르바로사 황제는 사자공의 반대 세력을 결집한 끝에 1180년 사자공에게 제국추방령을 내리고 그의 영지를 모두 몰수하여 자신의 측근들에게 재분배하였다. 이로써 부족 공국으로서의 작센 공국은 해체되었다(1180년).
이 조치로 인하여 벨프 가문은 아무런 작위도 없이 브라운슈바이크 일대의 사유지만을 간신히 보전했으나, 1235년 제국의회에서 바르바로사 황제의 가혹한 조치를 다소 완화해주면서 돌려받은 일부 영지를 벨프 가문의 사유지와 합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으로 재편하는 방식으로 복귀했다. 이 지역은 하노버 공국, 하노버 선제후국을 거쳐 하노버 왕국으로 승격되었고, 오늘날의 니더작센 주가 되었다.
한편 작센이라는 명칭이 워낙 유서 깊은 이름인지라 한때 작센 공국을 지배해봤던 안할트의 아스카니아 가문이 13세기에 작센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작센계 아스카니아 가문이 단절된 작센비텐베르크 공국을 독일왕 지기스문트가 후스 전쟁에서 자신을 도운 마이센 변경백 프리드리히 4세에게 수여하여 베틴 가문이 작센 선제후가 되었고 마이센 변경백국이 작센 선제후국이 되어 작센 왕국을 거쳐 오늘날 독일 작센 주로 이어지고 있으나, 이 당시 아스카니아 가문의 영지는 1180년 이전 구(舊) 작센 공국(~1180년)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비텐베르크 일대였고, 현재 작센 주 홈페이지도 비텐베르크 시절을 작센주 1,000년 역사의 시작으로 표기하여 부족 공국 시절까지 역사가 이어진다고는 말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