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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0:02:54

모하마드 자히르 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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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눌라 칸 이나야툴라 칸 하비불라 칼라카니
제3대 제4대
모하마드 나디르 샤 모하마드 자히르 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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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7a33> 아프가니스탄 왕국 제4대 국왕
모하마드 자히르 샤
محمد ظاهر شاه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ng_Zahir_Shah_of_Afghanistan_in_1963.jpg
출생 1914년 10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카불
사망 2007년 7월 23일 (향년 92세)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카불
재위기간 아프가니스탄 국왕
1933년 11월 8일 ~ 1973년 7월 17일
서명
파일:모하마드 자히르 샤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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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7a33><colcolor=#fff> 가문 바라크자이 가문
아버지 모하마드 나디르 샤
어머니 마파르와르 베굼
배우자 후마이라 베굼
자녀 6남 2녀
학력 하비비아 고등학교 (특별반 / 졸업)
인판테리 군사학교 (졸업)
몽펠리에 대학교
종교 이슬람 ( 수니파)
신체 185cm }}}}}}}}}

1. 개요2. 생애
2.1. 퇴위2.2. 귀환과 죽음
3. 가계4. 여담5.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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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6대 국왕이자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시기부터 존속해 온 바라크자이 왕조의 마지막 군주.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희망이었다고 평가받는다.

2. 생애

1914년 10월 15일 모하마드 나디르 샤(1883~1933)의 아들로 카불에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중고등 교육을 마친 다음 이스티클랄 대학을 졸업했다.

1933년에 부왕 모하마드 나디르 샤가 암살되자 19살 나이에 즉위하였다. 그의 집권 초기에는 삼촌인 모하마드 하심 칸과 샤 마흐무드 칸이 총리직을 맡았고, 1953년부터 63년까지는 사촌 모하마드 다우드 칸이 총리를 맡아 국정을 맡았다. 다우드 칸은 파슈툰 민족주의적 태도를 견지해 파키스탄과 적대하고[1] 친소 정책을 폈으며 내부적으론 급진적 개혁을 시도했는데[2] 자히르 샤도 근대화에는 동의했으나 파키스탄과의 분쟁이 경제 위기로 이어지게 되자 다우드 칸을 해임했다. 이듬해인 1964년에는 입헌군주제 헌법을 채택하고 왕족이 고위직을 맡는 것을 금지했다.

그의 치세에 아프가니스탄은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안정기를 맞았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소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며 외국 고문들을 고용하여 국가를 근대화하려고 하였고 분파주의와 정치 투쟁에도 불구하고 1964년에 새 헌법을 채택하여 자유선거와 의회제도를 도입하였으며 군사분야도 상당히 발전했는데 T-55 전차랑 MiG-17 전투기 같은 소련제 무기를 도입해 국방력을 키워 나갔다.

2.1. 퇴위

그의 호시절은 1973년 사촌이었던 모하마드 다우드 칸의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끝났다. 1973년 7월 17일 안질과 요통 치료를 위해 이탈리아 로마에 체류하던 틈을 타 쿠데타가 성공하자 그는 졸지에 폐위당하여 떠돌이 신세가 되어 수십년간 이탈리아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한편, 쿠데타에 성공한 다우드 칸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성립했지만 정작 다우드 칸의 시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독재자마냥 강력한 권력을 쥐기 위해 반이슬람/반공을 내세우면서 양쪽에 어그로를 끌던 다우드 칸은 1978년 인민민주당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로 피살당하고 만다. 자히르 샤는 인민민주당 공산 정권이 수립되자 귀국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공산주의 노선을 표방하던 인민민주당 정권이 거부하는 바람에 귀국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자 당시 공산 정권이 내건 무신론 정책에 반발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총을 들며 내전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이 여파로 다음해부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무자헤딘 간의 아프가니스탄 내전 등 십수년간 나라가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이 혼란은 지금도 안 끝나서 21세기 들어서도 탈레반 북부동맹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망명 중이던 1991년에는 포르투갈 언론지의 기자를 사칭한 의문의 괴한이 휘두른 칼에 찔려 부상을 입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77세 고령의 노인이라 치료 과정에서 많은 양의 수혈이 필요했다.

2.2. 귀환과 죽음

파일:zahir shah.jpg
2002년, 축출된 지 29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에 귀환한 샤
그의 아프가니스탄 귀환은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게도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고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끝판왕 미국이 개입하여 탈레반 정부가 괴멸되고 나서야 이뤄졌다. 2002년 겨우 조국의 땅을 밟았고 2004년에는 국부 칭호도 받았다.[3]

한편, 훗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대통령이 되는 하미드 카르자이가 대통령이 되기 전이던 2002년에 그를 추대하기 위한 입헌군주제 왕정복고 운동을 펼치기도 했지만 나이도 너무 많았고(당시 만 87세) 미국도 비협조적이었던 데다 찬성 여론이 과반을 넘지 못했던지라 실행되지 못했다. 본인도 개인적으론 입헌군주제 복고를 원하기는 해도 국민 과반수가 반대하는 마당에 무리하게 원하진 않는다고 했다.[4]

2007년 7월 23일 카불에 있는 대통령궁에서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죽기 직전 유언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난 저세상에 가면 알라께 벌을 받을 것이오! 아름답던 내 나라를 이 꼴로 만들었으니...[5]

그의 장례식에는 여러 정치인들과 대통령이 참석했다고 한다. 그를 기억하는 많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그의 쓸쓸한 몰락과 죽음을 슬퍼했으며 당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정권과 대립하던 탈레반 측도 그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아프가니스탄 정부군과 그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장례식장을 겨냥한 게릴라전 및 테러 공격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파일:tomb of shah.jpg
자히르 샤의 무덤은 카불 동쪽 언덕 위에 세워졌다.

그가 사망하고 나서 약 14년이 지난 2021년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에 의해 다시 정권이 넘어갔지만, 탈레반도 자히르 샤가 생전 수많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음을 의식하고 자신들과 아프가니스탄 구 왕가들과는 별 이해관계가 없어서인지 자히르 샤의 무덤은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3. 가계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빌키스 베굼
(Bilqis Begum)
1932년 4월 17일 ([age(1932-04-17)]세) 3녀
1남 모하마드 악바르 칸
(Muhammed Akbar Khan)
1933년 8월 4일 1942년 11월 26일
2남 아흐마드 샤 칸
(Ahmad Shah Khan)
1934년 9월 23일 2024년 6월 5일 2남 1녀
2녀 마르얌 베굼
(Maryam Begum)
1936년 11월 2일 2021년 12월 25일 1남
3남 모하마드 나디르 칸
(Muhammed Nadir Khan)
1941년 5월 21일 2022년 4월 3일 2남
4남 샤 마흐무드 칸
(Shah Mahmoud Khan)
1946년 11월 15일 2002년 12월 7일 2녀
5남 모하마드 다우드 파슈툰야르 칸
(Muhammed Daoud Pashtunyar Khan)
1949년 4월 14일 ([age(1949-04-14)]세) 1남 1녀
6남 미르와이스 칸
(Mirwais Khan)
1957년 1월 7일 2023년 9월 29일 1녀

4. 여담

5. 매체에서



[1] 듀랜드 라인 문서 참조. [2] 빠르게 근대화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나름의 절박감이 있었다고 한다. [3] 여담으로 평화유지군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1년 동안 재직한 채수문 중령은 당시 1973년 왕정폐지 이후 전쟁과 내전, 탈레반의 학살로 파괴된 조국의 모습을 거의 30년만에 귀국해서 처음 직접 본 자히르 샤가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다는 말을 현지에서 들었다고 한다. [4] 사족으로 자히르 샤가 사망한 후 자히르 샤의 아들(왕세자 아흐마드 샤 칸, 1934 ~ 2024)이나 손자를 앞세운 왕정복고 여론도 있긴 했지만 주류 여론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다 2021년에 다시 탈레반이 수도권 일대를 차지하면서 국가가 혼란에 빠지자 자히르 샤의 치세가 재조명되면서 탈레반보단 차라리 왕정복고를 하자는 여론도 조금씩 커지고 있다. 탈레반이 막장이다 보니 캄보디아처럼 다시 왕정이 들어설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고, 왕정이 국민의 손에 무너진 것도 아니다 보니 주류까지는 아니어도 왕정복고 여론이 꾸준히 존재하긴 했다. [5] 그래도 이 때는 그나마 탈레반의 세가 줄어 있었을 때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6] 단, 티토는 파슈툰, 타지크, 우즈베크 등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다민족들을 막론하고 아프가니스탄 국민들 사이에서 긍정적인 평가와 노스텔지어 여론도 많고 현재의 탈레반 정권과 탈레반에게 대항하고 있는 국민저항전선 등 아프간 내 반 탈레반 저항 단체들 사이에서도 나쁜 평가를 받지 않는 자히르 샤와 달리 구 유고 연방에 속해 있었던 동유럽권 국가들 내부에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특히 최근에는 구 유고 연방이 참혹한 민족, 종교간의 유혈참극을 겪으면서 분열, 해체되는데 직접적인 원인으로 밀로셰비치나 투지만, 카라지치 등 유고 연방 말기에 민족주의 노선을 내걸면서 민족 및 연방 분열을 선동하며 전쟁과 학살을 저지른 당시 구 유고권 국가들의 정치 지도자들보다 살아 생전 티토의 억압적인 공산당 1인 독재에서 비롯됐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7]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은 1973년 자히르샤의 축출 이후에 국가 막장 테크를 완벽하게 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