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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14:31:06

인켈(1970년)

주식회사 인켈
Inkel[1] CORP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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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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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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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설립일 1970년 3월 7일
해산일 1996년 11월 1일
업종명 텔레비전 제조업
상장여부 상장폐지
상장시장 유가증권시장 (1981년 ~ 1996년)
종목코드 006510(보통주) / 006515(우선주)
법인형태 피합병법인
기업규모 대기업
주소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180길 31 (도봉동)
1. 개요2. 역사3. 기업정신4. 역대 임원5. 여담6. 계열사 목록7. 관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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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옛 가정용 음향 기기 메이커로, 현 인켈 AV사업본부의 전신이기도 하다.

자회사 인켈PA는 해태전자에 넘어갈 때 분리되어 설립자 집안이 경영하는 별도 회사가 되었으며, 이 회사는 인터엠으로 사명을 변경하여 지금에 이른다.[2]

구 해태전자를 주축으로 하는 현재의 인켈에 대한 것은 인켈 문서 참조.

2. 역사

1970년 3월 윤두영 창업주가 미국 일렉트로보이스가 합작해 한국일렉트로보이스를 세웠으나, 경영 부진으로 적자만 내자 1973년 포목상 조동식이 인수해 '인터내쇼날코리아전자'로 사명을 변경했다. 윤두영은 윤용구 일동제약 창업주의 장남으로, 1976년 맥슨전자를 세우기도 했다.

스코트(Scott), 듀얼(Dual), 텔레풍켄(Telefunken), 쌔(SAE) 등 해외 유명 기업들의 하청을 받아 OEM생산을 하면서 기술력과 품질 관리 기술을 획득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하청 생산으로 갈고 닦은 기술을 바탕으로 양질의 국산 오디오(당시 통칭 전축) 생산을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 국산 오디오 기업체들은 일본에서 부품을 그대로 들여와 조립하는 수준이거나 일본 기업의 생산기지 역할을 하면서 일부를 국내시장에 돌리는 수준이었다. 롯데그룹 파이오니아, 아남전자는 마쓰시타(테크닉스), 대한전선( 위니아전자의 전신)은 히타치, 도시바(오렉스), 화신쏘니는 소니, 정풍물산[3]은 산수이의 부품을 그대로 들여와서 제품을 생산했다.

삼성전자 금성사( LG전자의 전신)은 독자적 노선을 걷지만 산요나 파이오니아를 상당히 카피한 것으로 생각되는 제품을 생산했다. 천일사[4]는 어느정도 독자 설계력을 갖추었으나 태광그룹에 인수된다. 독자 설계로 상당한 성능의 하이파이를 생산한 곳은 동원전자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스피커만 놓고 보면 고려전자의 마샬 브랜드가 더 앞서 있었다.

한동안 필소닉이라는 브랜드명을 사용하다가 이후 1976년 사명을 '동원전자'로 바꾸고 전 사명(INternational Korea ELectronics)을 따와 '인켈'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미국의 오디오 브랜드 셔우드를 자체 브랜드로 인수하고, 독일의 오디오 잡지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자회사와 계열사를 모두 포함한 종업원 수가 4000명도 안 되는 중소기업이었지만, 오디오 분야에선 광고도 많이 하고 품질을 인정받아 1970~1980년대에는 대기업 급으로 인지도를 쌓아가기도 했다. 소니코리아가 정식으로 출범하기 전에는 소니 워크맨 트리니트론 TV를 수입해 판매했던 적도 있었다.90년 6월 컬러TV 제조를 위해 일본 소니의 기술 도입을 타진하기도 한다. 또한 1978년 하이파이 스테레오를 내놓은 뒤 미국 돌비 사로부터 돌비 NR시스템 사용권을 따냈으며, 야마하 디지털 피아노의 공식 수입처이기도 하였다. 1981년 음향업계 최초로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한 후 일본 도쿄, 벨기에 브뤼셀 등지에 지사를 차려 해외진출에도 힘썼다. 1983년에 자회사 동원특수음향을 세웠다.

하청 생산 제품 중 쌔(SAE)[5] 제품은 원청 본사의 허락을 받아 한동안 INKEL/SAE 브랜드로 국내에도 판매하였는데, 국내에서 볼수 없었던 직선의 묵직한 디자인과 뛰어난 앰프의 성능은 당시 국산품에 비해 한 수 위라 한동안 오디오 팬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해외 유명 제품을 국산 가격으로 살 수 있었으니.[6]

자체 개발작으로는 시카고 전자 박람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명작 CS9000 세트를 꼽을 수 있다. 당시 럭스만이나 아큐패이즈와 같은 일본의 최고급 앰프들이나 사용하던 MOSFET 출력단을 채용한 제품으로, 진공관의 음색을 재현하기 위해 프리앰프부터 공들인 설계로 유명하다. 특히 인켈이 럭스만의 회로를 파고 들면서 만든 앰프라 놀라운 음질과 음색을 자랑하는 1980년대 인켈의 기술력을 대표하는 최고의 제품이다. 럭스만의 음색을 보존하면서 더 업그레이드한 탄탄한 중저역대 음질을 가지고 있다. 파워앰프에 사용된 MOSFET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오디오 출력단 소자에 채용되기 시작했는데, 독특하고 부드러운 특유의 음색으로 상당히 각광받았다. 기술적 완성도 뿐만 아니라 오디오 역사적으로 상당히 의의가 있는 제품.[7]

또한 인티앰프 AX-7010도 독일 하이파이지 비전지에서 28-35만원대 제품 중 최고에 꼽히기도 했다. 그때가 1991년이니 상당히 고가 제품이었다. #


동원전자 시절이던 1979년 당시의 광고

1988년 브랜드명 인켈을 사명으로 바꾸었다. 1980년대 후반 오디오 시장이 정점을 찍고 내려오게 되는데, 인켈은 서울지역 민영 방송 경쟁에 참여해 당시 장비를 사들이며 방송국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화재가 나서 포기하게 된다. 엉뚱하게 허가는 건설업체 태영건설이 따내 회장 윤세영과 당시 공보처 장관 최병렬이 친밀한 사이라 특혜 시비가 일었다. 컬러 TV 및 노래방기기[8] 시장 진출, 중국으로의 생산시설 이전, 자회사 인켈오디오월드 설립과 에어로시스템 인수 등을 비롯해 새로운 활력을 도모했지만, 하이파이 오디오라는 물건 자체가 시대의 흐름 밀려 사라지며 사운이 기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종합가전회사가 되기위해 몸부림 치던 시기였는데, 정보통신사업에도 손을 대기 위해 1991년 9월 컬러모니터 개발에 성공하였다. 2년 뒤인 1993년에는 독자적 돌비 오디오 기술을 결합한 29인치 컬러 TV를 독자적으로 개발 시판한다. # 이로서 국내에서 5번째 컬러TV 개발사가 되기도 했다.

1992년 창업주 조동식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는 등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1994년에 해태그룹 계열인 해태전자[9]가 조동식 회장으로부터 인켈을 인수하였다. 1984년부터 경영 전면에 나선 장남 조석구 사장과 조동식 창업주와의 갈등도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들이 경영보다는 인켈아트홀 등 사회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것. 결국 회장이 인켈PA만 남기고 지분을 해태에 넘긴 것이다. 1996년 무선전화기 제조업체 나우정밀과 함께 해태전자에 역합병되어 '인켈사업본부'로 개편됐다.



1980~1990년대에 TV 광고로도 자주 나와서 성우 한상덕인~켈~이란 목소리로 접할 수 있었고 태광전자와 더불어 중소 오디오 업체에서 인지도가 높았던 시절이 있었기에 1990년대에 설치된 학교 스피커 등이 인켈제인 경우가 많다. 정확하게는 인켈PA(구 동원특수음향)라는 이름의 방송 장비 전문 자회사였다. 설계와 디자인은 대부분 도봉동 공장에 있던 인켈 연구소에서 하고, PA는 생산과 판매만 하였다. 1994년 모기업이 해태그룹에 넘어간 후 옛 오너 집안이 독자적으로 운영해 1995년 '인터엠'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원래 하던 대로 스피커, 앰프, 전원장치, 믹서 등 방송 장비, 어학실, 시청각 교육실 장비를 취급한다.

중고 오디오 시장 게시판에 가 보면 구 인켈 제품들이 그나마 대접을 받고 있고,[10] 과거 명기로 꼽히던 일부 물건은 수명이 다 된 부품(볼륨, 콘덴서, 트랜지스터...)을 바꾸는 등의 오버홀을 통해 여전히 유통되고 있다. SAE 세트가 4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30-60만원, 하이엔드 기함급이던 테마 시리즈는 300만원대라는 무지막지한 중고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SAE 세트는 그 인기로 인해 부분별로 거래가 되어 풀세트를 구하기 어렵고, 인티앰프와 리시버는 국내로 돌린 물량이 적어 구하기 쉽지 않은 편. 테마는 당시에 워낙 고가라 생산량이 적어 잘 관리된 세트를 구하기가 아주 어렵다. 인켈이 제품을 워낙 튼튼하게 만들고 신뢰성 있는 부품을 썼기에 1980년대 말-1990년대 중반까지 제품도 가동 부분이 있는 CDP, 카세트 테이프 Deck, Turntable, 스피커(콘지와 에지만) 을 제외하면 40년이 다 되어감에도 아직도 멀쩡히 움직이거나 간단한 벨트나 픽업 등 소모품 교체만 하면 아직 사용에 문제없는 경우가 많다. 고품질 콘덴서는 수명이 짧다는 단점이 있지만 가정용 기기들은 사용량이 많지 않아 아직 수명이 남은 편. 순정 부품이라고 해도 중고품이면 대략 30년 이상 된 물건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수가 없다. 따라서 중고품을 살 때는 일단 실력 좋은 황학동 오디오 수리상이나 인터넷 오디오 수리 카페들 중 오랫 동안 작업해서 신뢰성을 쌓은 수리자에게 맡겨서 점검 및 수리를 하고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는 게 속 편하다. 잘만 수리하면 사운드 왜율이 0.0X 단위로 나오는, 그야말로 하이파이 오디오의 소리가 어떤 것인지 체험할 수 있기도 하다. 개조기는 함부로 구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 대부분 회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개조하여 설계 의도에서 벗어나가나 파형이 찌그러지는 등 문제가 속출하기 때문. 콘덴서도 인켈은 과거 삼화컨덴서와 협업하여 특주한 최고급 콘덴서를 많이 사용하였으나 개조자들은 거의 멋대로 콘덴서의 용량이나 종류를 바꿔 엉망이다. 트랜지스터도 과거 오디오 시장이 활발할 때 생산되었고 지금은 단종된 소자들이 많아 오리지날보다 못한 트랜지스터를 쓰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가끔 회로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작업자들이 손을 댄 경우나 오리지날에 맞추어 오디오 그레이드 콘덴서를 사용해 설계 용량에 맞춰 노후된 콘덴서들을 교체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드물다.

인켈과 태광, 아남등 국내 오디오 브랜드들은 국내 평가는 낮았지만 당시 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 제품들이 설계 의도에 벗어나게 망가지고 있으니 당시 설계자들로서는 굉장히 억울할 일. 일본과 미국에서는 노후된 콘덴서로 교체하고, 납땜을 다시 하고, 출시 당시의 단가 또는 시대적 한계로 저가화된 부분을 개선하는 등의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반적인 개인작업자들의 개조와는 달리 회로를 철저히 연구하고, 계측을 철저히 해 제대로 된 파형과 잡음비를 얻는다고 한다. 1970~1980년대 출시된 오디오들은 오디오 전성기 시대의 제품들로 물량 투입이 엄청나고 특유의 매력적인 음색이 있어서 이런 작업을 한다고. 대표적인 곳이 일본의 AMP8. 유튜브에서는 미국의 복원 사례 비디오가 공유되고 있다. 당시 오디오를 설계 또는 품질관리 파트를 담당했던 직원들이 복원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주크박스란 곳이 상세한 작업내역을 공개하고 기술적인 설명을 하면서 복원 작업을 하고 있다. 1990년대까지 OEM이든 ODM이든 한국이 오디오 최대 생산기지였다. MADE IN JAPAN도 반조립 상태로 수출되어 일본에서 마무리 조립되는 경우도 많았고, 저명한 독일 오디오 업체인 Dual은 1990년대 이르면 인켈에서 디자인, 설계, 생산까지 모두 다 하고 로고만 두알로 바꿔 파는 수준이었다.[11] OEM, ODM 수출량이 많던 고급 카 오디오 부문도 Dual, Blaupunkt 등으로 상표만 갈아 붙이다시피한 것은 마찬가지.

3. 기업정신

이하 내용은 1994년 해태로 팔리기 전에 쓰인 것들이다.
지성, 덕성, 감성
DIGITAL & OPTICAL
밝고 명랑하고 즐겁게 일하며 종교와 같은 신앙으로 우리의 기업을 사랑한다.
인류에 보답하는 기업
창의, 예지, 사랑, 기술
인켈맨으로서 긍지를 가진다.
국제인의 면모를 갖춘다.
봉사하는 정신으로 행동한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지식인이 된다.
항상 개선과 변화를 추구한다.
(1절)창의에 빛나는 기술의 우리 인켈 / 세계에 가득히 찬란한 인켈문화
언제나 어디서나 드높은 긍지 / 지성 덕성 감성에 충만한 그 이름 우리 인켈
날마다 새롭다 아! 인켈 우리의 자랑 / 앞서가는 인켈 인켈

(1절)예지에 빛나는 사랑의 우리 인켈 / 세계에 품안에 축복된 인켈예술
온 세상 인류 위한 창조의 일터 / 지성 덕성 감성에 눈부신 그 이름 우리 인켈
영원히 새롭다 아! 인켈 우리의 자랑 / 새 시대의 인켈 인켈

4. 역대 임원

5. 여담

1980~1990년대 당시에 드물게 토요일 격주 휴무를 실시하던 회사다. 주 5일 근무 확대 이전에는 모든 회사가 토요일은 12시에 퇴근이었는데 그것을 2주치씩 몰아서 쉬고 일하고를 반복 했던 것. 오디오 생산 라인은 일부 자동화된 라인도 있지만 자동차 생산라인과 비슷하게 대부분 손으로 작업하며, 부품을 사들여서 조립만 하는 방식이다. 여러 부품을 납땜과 나사, 접착제로 조립하는 수작업 노동 집약적 다품종 소량 생산인데, 공정에 필수적인 자동 납땜기의 납이 녹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8시부터 12시까지 근무하고 식혔다 녹였다를 반복하느니 2주치를 몰아 5시까지 한 번에 일하고 다음 주에 쉬는 쪽을 택한 것. 그래서 라인을 끊는 5시에는 무조건 퇴근. 징검다리 연휴에는 휴일을 옮겨 쉬기도 했다.

중소기업이다 보니 급여 수준은 보잘 것 없었으나 회사에 대한 만족도는 상당히 높은 편으로, 임금투쟁이나 노사 분규가 일어난 적이 없다. 연구직의 경우에도 17시 이후에 일을 하거나 휴일 근무시에 칼같이 연장/휴일 근무 수당을 챙겨 주었었다. 직원들에게는 자사 제품을 일정 부분 할인해 주었는데, 사입해 판매하던 스피커/TV 장식장은 할인율이 매우 높았고 2년 정도에 한 번씩 하는 재고 제품 창고 털이에서는 시중 가격의 절반 이하까지 파격가로 직원에게 판매하기도 했다. 경쟁률 높은 제품은 추첨으로 판매하기는 했지만. 연구 개발 인력과 창고 물류 인원을 제외한 직원 대부분이 생산 라인의 조립직 여성이었는데, 남자 연구개발/본사 직원 급여는 짰지만 생산직 여직원 급여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었고, 남녀차발과 직급별 차별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목소리 크게 내는 사람이 적었기도 하고. 격주 휴무와 정시 퇴근 덕에 직원들 취미 활동도 다양하게 이루어졌고, 직장인의 주적인 야근이 없는[12] 평등한 분위기였다. 그런 2000년대식 사내 문화가 일찍 발전했던 회사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망했으니...

도봉동에 본 공장과 연구소, 방학동에 PA / 모니터 공장, 의정부에 카오디오 3공장, 명륜동 대학로 주변에 본사가 있었다. 명륜동 본사 아래층엔 인켈아트홀(현 한성아트홀)이 있었는데, 당시 양희경[13], 윤석화 등이 출연한 뮤지컬 넌센스 초연으로 크게 성공했었다. 사실 이 인켈 아트홀이 인켈이 망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설립자인 회장의 아들이 당시 인켈 사장을 맡고 있었는데, 본 사업엔 별 관심 없고 아트홀 등 문화 사업에만 치중하자 회장이 빡쳐서 자기 지분을 해태전자에 넘겨서 회사 경영권이 덜렁 해태그룹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덕분에 1997년 외환 위기와 겹치며 해태그룹이 망하자 함께 망하고 말았다. 그냥 있었으면 기술력이나 당시 준비하던 디지털 기기 사업으로 건실한 중소기업으로 존속할수 있는 역량은 되었는데... (인켈 PA[14]와 인켈 두 개 회사가 되었지만) 결국 각자 예전 인원들이 주축으로 부활하여 존속하고 있으니, 알고 보면 참 끈질긴 회사, 질긴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인켈의 디자인 책임자는 구 인켈 시절부터 있던 사람이다. 근속이 30년을 넘겼다...구 연구개발 인원 중에는 2020년대 현재 작고한 사람도 여럿 있을 정도. -_-

일부 대리점에선 오디오 마니아들을 위해 앰프 단품을 판매할 때 내부 부품을 해외 오디오 부품으로 개조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몰래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오디오 전문지 등에 대놓고 광고를 했었다.

당사에서 판매했던 모 탁상용 카세트는 중파방송 주파수가 1 kHz(!!!)간격으로 올라간다. 예를 들면 594 kHz→603 kHz로 9 kHz 간격으로 올라가지 않고 594 kHz→595 kHz로 올라간다는 것. 물론 해당 탁상용 카세트가 아날로그 다이얼&디지털 액정임을 감안해도 규정상 유럽/아시아는 9 kHz씩 올라가야 정상이다. 그야말로 정밀 튜닝!

해태전자 인수 후에도 종종 상식을 뛰어넘는 고성능 제품을 만드는 기행을 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인켈 문서 참조.

6. 계열사 목록

이하 회사들은 1994년 해태그룹 인수 이전에 지녔던 것들이다.

7. 관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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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ternational Korea ELectronics의 약자로 1976년부터 사용된 브랜드명이다. 어느 반도체 회사와 혼동하면 곤란하다. [2] 기아자동차의 뿌리였던 삼천리자전거와 비슷하다. 1979년 기아산업에서 자전거 부문이 따로 떨어져 나와 별도 회사가 된 덕에 IMF로 기아자동차는 현대에 인수되고 기아그룹이 공중분해될 때에도 삼천리자전거로 살아남았으며, 설립자 일가가 3대째 경영하고 있다는 점이 같다. [3] 아동용 전자완구 '제미니'를 만든 회사이기도 하며 전화기 및 전자수첩 등을 생산했다. 1980년 이후 법정관리를 오래 받아오다 1997년 기아자동차 및 기아인터트레이드에 팔려 회사정리절차를 졸업했으나, 기아그룹의 부도로 1998년 김병연, 2001년 삼애캐피탈 컨소시엄 등을 거치다 2002년 이용호 게이트로 타격을 받아 2004년 상장폐지. 현재 '청화파트너스'라는 이름의 유령기업으로 존속 중. [4] '별표전축' 이라는 상표로 판매하고 있었다. [5] 당시 신문광고에서는 한글 발음을 '쎄' 라고 표기하였다.(...) [6] 삼천리자전거가 OEM 생산하던 다혼의 중급 미니벨로를 본사 승낙 받고 자사 모델로 이름만 바꾸어 거의 절반 가격에 국내에 소량 판매한 것과 비슷한 사례이다. ODM 제품으로 설계는 인켈이 담당했고, 디자인은 SAE 특유의 디자인을 계승하고 있다. 당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이미지가 영 좋지 않던 시절이라 X02 모델이 한국산임이 알려지고 미국에서 인기가 식으면서 재고를 대한민국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는 카더라가 있다. [7] 불행히도 대한민국 애호가는 이 역사적 제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프리앰프의 톤컨트롤을 날리고, 파워앰프를 BJT로 개조하는 만행을 일삼았다. 1980년대 산수이에서 제작한 MOSFET 출력 앰프가 현재까지도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는지 생각하면 한국 오디오 애호가들의 한국산 천시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8] 브랜드명은 '노래왕'으로, 엘프시스템이 하청생산을 맡았으며 나중에 '엘프 소리꾼 SR-3000'으로 이어졌다. [9] 본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교육시설공제회관에 있었다. [10] 1990년대 아남은 기술적으로 인켈을 능가했다. 문제는 회로가 너무 복잡한데 서비스 매뉴얼도 없거나, 플라스틱을 과도하게 사용해서 경화되어 망가지거나, 그나마 AS망이 유지되는 인켈과 다르게 AS망마저 사라져버렸다. 태광도 사정이 비슷하다. 그래서 내구성이 가장 우수한 인켈이 중고시장에서 대접 받는 것이다. 브랜드 이미지가 워낙 좋아 많이 팔리기도 해서 AS망도 유지되고 있다. [11] 오디오를 포함한 가전제품 조작부에 ON/OFF등 영문자만를 쓰지 못하고 한글(켜기/끄기)로 표시해야 하도록 법이 바뀐 것이 1990년대 초이다. 그 전까지는 프린팅까지 같았다. 물론 글자지체는 다른 경우도 있다 [12] 재무 회계, 마케팅 등이 본사 쪽은 특성상 야근이 있었다. 대신 그쪽은 전철역( 혜화역)에서 가까운 서울특별시내라는 좋은 근무 조건이 있었다. [13] 뮤지컬 배우인 양희경의 아들이 운영하는 뮤지컬, 공연 입시 학원이 길 건너 대학로 쪽에 있었다. 잘 되었는데 경영상의 문제로 2021년 폐업. [14] 1995년 인터엠으로 사명을 바꾸고 현재 개인용 오디오 장비가 아닌 철도, 항만, 공항, 공장과 같은 시설에 방송용 장비를 공급하는 사업을 영유하고 있다. 대표이사는 인켈 창업자의 아들이다. 별개의 회사가 된 인켈도 인터엠과 같은 사업을 하고 있다. [15] 개인PC는 열람이 불가능하며, 국립중앙도서관과 협약을 맺은 공공/대학도서관에서만 열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