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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22:54:45

이준형(1875)

대한민국의 독립운동 명문가
석주 이상룡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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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종 건국훈장 애족장 (1990) 이상룡의 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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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참고 문헌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75년 9월 2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부내면 용상리 법흥골(현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에서 부친 이상룡과 모친 김우락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이명은 이재섭, 이동고, 이중조이며, 자는 문극, 호는 동구이다. 그가 속한 고성 이씨 참판공파 가문은 안동의 유력한 사족으로, 대대로 안동 권씨, 의성 김씨 등 유력 가문과 혼인을 통해 결속을 강하게 형성했다. 큰 외삼촌 김대락은 이상룡과 함께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성에 매진하다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고, 막내 이모 김락은 시아버지 이만도와 남편 이중업의 의병 활동 및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준형은 1880년 6세에 증조부 이종태에게 한학을 수학했고, 평소 군사학에 조예가 깊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병서를 탐독했다. 17세 때인 1892년 진성 이씨 이면유의 딸 이중숙을 아내로 맞이하여 외동아들 이병화를 낳았다. 1905년 부친이 경남 거창군의 가야산 자락에 의병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차은표를 만나고 돌아왔다. 이후 1908년 정월 차은표에게 의병기지 건설 자금으로 1만전을 지원했다. 이때 이준형도 가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차은표가 이끄는 의병은 일본군의 기습으로 무너졌고, 의병기지 건설은 무위로 돌아갔다.

의병 활동이 실패한 뒤, 이상룡은 교육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1909년 도동서원을 개설했다. 이때 이준형은 도동서원의 교사를 맡아 부친의 계몽운동을 지원했다. 1910년 협동학교 학생들이 상투를 잘랐다는 이유로 최성천이 이끄는 의병 19명이 협동학교를 습격하여 교감 김기수, 교사 안상덕, 서기 이종화를 살해했다. 이준형은 충격받은 학생들을 위해 <여협동학생>을 지어 위로했다. 그는 이 글에서 "하늘이 우리 대한을 보우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우리 대한을 보우하려 한다면 협동학교가 마땅히 효시일 것이며, 제군이 마땅히 맹주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준형은 이 시기에 <동서양강약원인>을 집필했다. 그는 서양 열강의 부국강병 원인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호레이쇼 넬슨과 같은 영웅의 이야기와 정신에서 찾고, 동양의 쇠락 원인을 화이론의 한계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서구를 배워야 하는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저들이 증기선을 가졌으니 나의 목선으로는 대적할 수 없고, 저들이 기차를 가졌으니 나의 마차로는 경쟁할 수 없다. 저들이 무기를 가졌으니 나의 맨손으로는 막을 수 없고, 저들이 전선을 가졌으니 나의 파발마로능 따라갈 수 없다. 그 밖에 정치와 법률, 경제에 대해서도 모두 내가 배우지 않을 수 없다.

한일병합 후, 이준형은 부친과 논의한 끝에 만주로 망명하기로 결정했다. 이상룡은 1911년 1월 5일 안동을 떠났고, 이준형은 가족을 데리고 1월 20일에 뒤따랐다. 그는 신의주에서 먼더 도착해 있던 부친과 1월 25일 합류한 뒤, 1월 27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이동했다. 이들이 덕인현 향도촌에 도착한 뒤, 안동 도곡마을에서 온 집안 사람들도 잇달아 합류했다. 2월 14일, 이준형은 다시 유하현을 향해 길을 나섰지만, 중국인들이 일본인과 한국인이 우물에 독약을 푼다는 헛소문을 믿고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도로 향도촌에 돌아갔다.

이후 이준형 일가는 중국인들의 푸대접으로 고생했다. 집을 빌려 손질하고 살만하게 꾸며놨더니 중국인 주인이 오히려 내쫒아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4월에서야 유하형 삼원포로 향하여 5월에 도착했다. 이후 가족의 정착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신흥강습소 운영에 몰두했다. 그가 신흥강습소에 참여한 사실은 1911년 겨울경 김대락의 일기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또한 1914년 12월 28일 일제 기밀 첩보에 따르면, 해룡부에 있던 이상룡의 집에서 이봉희, 박경종, 김동삼, 이준형, 이형국 등 유력자가 모여 자금 모집의 협의했다고 한다.

1914년 8월 29일, 이준형은 이상룡 등 가족과 더불어 중국 귀화를 허가받았다. 이는 일본 경찰의 집요한 추적으로부터 신변을 지키고 중국에서의 토지 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었다. 이후 그는 부친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2년 9월 19일자 일제 기밀첩보에서, 이준형은 부친 이상룡, 매제 강호석 등과 함께 길림지역의 불령선인으로 등록되었다.

1922년경, <가족단 취지문>이랑 제목의 편지를 국내에 있는 사촌동생 이형국에게 보냈다. 가족단은 이상룡이 대한협회 안동지부가 해산된 후 족친을 중심으로 조직을 시도한 것으로, 가족을 하나의 사회 단위로 조직해 독립운동단체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이상룡을 비롯한 핵심 인물들이 만주로 망명하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고향에 남은 친척들이 가족단 구성을 다시 시도하면서 글늘 요청하자 이준형이 취지문을 보내준 것이다. 그는 <가족국가단규례>에서 "국가, 사회의 근본은 가족에 있으며, 가족은 개인의 심신을 근본으로 하므로, 가족을 가지런히 이루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바르게 닦아야 한다."라고 기술했다.

1922년 12월, 이준형은 영안으로 가서 동지 허발의 딸 허은과 아들 이병화를 혼인시켰다. 이후 1923년 2월, 그는 허발, 허은, 이병화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허은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는 이준형의 자택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내가 처음 시집가서 보니, 백로지 뭉치가 방 안에 가득히 쌓여 있었다. 사랑에는 등사판을 차려 놓고 계속 인쇄해서 전 만주와 중국, 또 한국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 날만 새면 숨 쉬는 것부터가 돈이었다. 군자금, 독립운동자금 만드는 일이 가장 급선무일 수밖에 없었다.

허은은 또 이준형의 집에서 서로군정서 회의가 열렸다고 밝혔다.
삼월 초에 이 집으로 이사 오고부터 시작한 서로군정서 회의가 섣달까지 계속되었다. 집을 드나든 이들은 이진산, 김형식, 성준용, 이병삼, 김원식, 김동삼 등이었다.

이준형은 1923년 8월 한족노동당 발기인대회에 참가했고, 1924년 11월 하순 한족노동당 중앙의사의원 17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이어 한족노동당 제1회 중앙의사위원회에 참석하여 임시의장을 맡았다. 그는 노동야학을 실시하는 데 필요한 노동교과서를 편찬하는 데 동의했고, 김현락과 함께 편찬위원을 맡아 국문, 국한문, 산술 등 3과목을 발간하기로 했다. 일데 정보기록에 따르면, 이준형은 정의부 조직에도 간부로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의부에서의 자세한 활동 경력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1925년 9월 17일 부친 이상룡이 사촌동생 이광민과 함께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선임되었을 때, 그는 만주에 남아 가족을 돌봤다. 1927년 김동삼을 필두로 민족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적극 참여했으며, 1928년 5월에 열린 3부통합회의에 참석하여 통합운동을 이어갔다. 이후 서란현에서 소과전자로 이사했다가 1930년 초봄에 신경쇠약증에 걸려서 다시 돌아와 몇달간 병고를 치렀다.

1931년 3월 국내에서 자금을 보내주던 사촌동생 이형국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이상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그해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일본군이 만주를 장악해 버렸다. 급기야 1932년 5월 12일 부친 이상룡이 지린성 서란현 소과전자에서 병사했다. 이에 길림시 근처에 임시 매장하려 했으나 마적의 훼방으로 도로 소과전자로 돌아와 뒷산에 가매장한 뒤 가족을 이끌고 귀향하였다. 1933년 4월 모친 김우락이 병사하자, 이준형은 1934년과 1935년에 각각 부친과 모친의 대상을 치른 뒤 도곡의 재사로 들어가 은둔했다.

그는 부친의 영구를 모셔오지 못하고 유고를 수습하지 못한 것에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1935년 김승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아아, 형이여. 나의 가정사처럼 기구한 경우가 세상에 다시 있을까요? 주려서 죽지 않은 것이 무엇이 족히 다행스럽겠습니까. 아버지의 영구를 이역 땅에 모셔두고 반장할 길이 없는 데다, 유고 상자를 좀벌레의 잠식에 맡겨둔 채 간행할 기약이 없습니다.

그는 또다른 편지에서 "저는 사지가 반은 앉은뱅이고 반은 버러지이며, 정신은 반은 사람이고 반은 귀신인데, 만일 그 반을 버리고 나머지 반을 전체로 하면 저 피안에 당도하는 것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나, 아직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은 혹독한 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스로 탄식할 뿐입니다."라고 밝혔다. 또한 이 시기에 일제가 철도를 부설하면서 임청각을 훼손하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강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집은 장차 철도 때문에 부서질 터인데, 4백년 지켜온 유물이 빈 언덕이 된다면 어찌 마음이 절통하지 않겠습니까만, 운수가 기박하여 그런 것을 어찌할 수 없고, 다만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만 할 뿐입니다.

이준형은 도곡에서 하중환, 송기식 등과 함께 부친의 유고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국내는 물론이고 만주에서 부친이 남긴 문건을 정리하고, 여러 문중에 부탁하여 글을 모았다. 이 작업이 마무리된 시기인 1942년경, 이준형은 자결을 결심했다. 며느리 허은은 회고록에서 일제가 싱가포르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접한 시아버지가 자결을 작정했다고 기술했다.

이준형은 외아들 이병화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한 번 병든 지가 30년이 되는데, 늙을수록 더욱 심해지고 많아지니 하루를 살면 하루의 부끄러움만 더할 뿐이다. 게다가 나의 병세를 자연에 맡긴다 하더라도 1~2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근심스럽고 처리해야 할 많은 일을 너에게 맡기는 것은 내 마음이 아니다. 그러나 창문 아래서 신음하며 고통스럽게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더욱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또 나의 처사를 도리를 아는 군자들이 듣게 된다면 경망하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해야 할 의리가 있으니, 너는 모름지기 나의 마음을 헤아려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겼다.
솔잎파리 씹으면서 곡식 그만 멈추고져
지난날을 곱씹으니 개탄스럽기만 하네.
한심하다 못난 자질 큰 종가를 위배했고
부질없다 병든 채로 깊이 숨을 수나 있나.
하늘의 뜻 어디 있나 근역에는 봄 왔건만
시대 운수 결국에는 상전벽해 보게 됐네.
우습구나 귀머거리 벙어리의 구차한 삶
우리 아버님 따라가 하늘에서 뫼시련다.

이준형은 외아들 이병화를 만주로 보내어 부친의 묘소를 대신 살펴보게 한 뒤, 자신의 생일인 9월 2일에 동맥을 끊고 자결했다. 향년 67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이준형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고, 1991년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3.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