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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이복남(李福男) |
자 / 호 | 복남(福南) / 봉남(奉南) |
본관 | 원주 이씨[1] |
출생 | 1885년[2] 2월 13일 |
전라도
나주목 공수면 화산리 (現 전라남도 나주시 공산면 화성리 화산마을 535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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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2년 10월 30일 (향년 47세) |
묘소 | 전라남도 나주시 공산면 남창리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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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85년 2월 13일 전라도 나주목 공수면 화산리(現 전라남도 나주시 공산면 화성리 화산마을 535번지)에서 아버지 이인휘(李仁輝, 1850 ~ 1924. 9. 9)[3]와 어머니 함양 박씨(1848 ~ ?. 11. 18)[4] 사이에서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1907년 3월 호남의병장 김태원(金泰元)· 김율(金聿) 형제와 제휴해 전라남도 나주군을 본거지로 삼고 함평군· 장성군· 영암군· 화순군 등지에서 일본 제국 육군과 교전을 벌여 많은 적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듬해인 1908년에는 김태원 의병진과 제휴해 의병활동을 벌이던 중 창평군 외남면 무동리 무동촌(現 담양군 가사문학면 무동리 무동촌)에 주둔했는데, 이때 일본 제국 육군 요시다 카츠사부로(吉田勝三郞)가 이끄는 부대에 포위당했다. 이에 포위망을 뚫기 위해 결사항전하던 끝에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1909년 일본 제국 육군이 이재대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끝에 자택으로 찾아와 이재대의 어머니 함양 박씨를 구타하고 모진 고문을 가한 뒤 끝내 베어 죽이려고 했다. 이때 함양 박씨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자, 풀밭에 숨어 있던 이재대가 이를 참지 못하고 뛰어 나와 군인들을 크게 꾸짖고 스스로 체포되었다.
이후 옥고를 치르다가 탈출했고, "왜놈이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며 고향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다만 1932년 10월 30일 별세했다고 한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