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 동호·인제(仁濟) |
본관 | 광주 이씨 (廣州 李氏)[1] |
출생 | 1912년[2] 5월 19일 |
경상북도
칠곡군 파미면 상매동 (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상매마을)[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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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8년 3월 23일[4] (향년 25세) |
경상북도
대구부 본정1정목 대구경찰서 유치장 (현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1가 대구중부경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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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중동고등보통학교 (제적) 주오대학 ( 법과 / 졸업) |
묘소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봉계리 장자골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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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912년 5월 19일 경상북도 칠곡군 파미면 상매동(현 왜관읍 매원리 상매마을)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이수목(李壽穆)과 어머니 여강 이씨[5]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왜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중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중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여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연대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29일간 구금되었고, 풀려난 후 강제 퇴교 처분을 받았다.
이후 귀향하여 고향 왜관면에서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동맹휴학을 주동하다가 퇴학당한 정행돈· 이창기· 박몽득 등과 함께 1932년 4월 청년동지회(靑年同志會)를 조직하고 농촌계몽 및 한글강습, 소비조합 운동, 민족의식 고취 등의 활동을 전개하며 민족의식을 길렀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1937년 전후 귀국하여 왜관면에서 박형동 등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항일 단체 독서회 성진회(惺進會)를 조직하고 농촌계몽 및 민족의식 고취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중 # 활동내용이 발각되어 1938년 2월에 왜관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대구경찰서에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 일제경찰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그해 3월 23일 대구경찰서 유치장에서 순국하였다.
그가 숨지면서 항일운동으로 인해 뒤집어쓴 이른바 '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는 (형사사건부) 1939년 11월 4일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처분되었다.
사후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