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경순왕의 부마 | |
고려
삼한공신 이금서 (김서) 李金書 (金書) |
|
<colbgcolor=#fedc89><colcolor=#670000> 출생 | ? |
사망 | ? (향년 불명) |
본관 | 경주 이씨(慶州 李氏) |
휘 | 금서(金書) / 서(書)? |
조부 | 이거명(李居明) - 신라 소판 |
부친 | 이금현(李金現) - 신라 병부령 |
처 | 신란궁부인 김씨[1] |
아들 |
이윤홍(李潤弘) - 고려 병정(兵正)[2] 이윤원(李潤遠) 이윤장(李潤張)[3] |
인척 |
장인: 신라
경순왕(고려 낙랑군왕 김부) 장모: 고려 낙랑공주(신란궁부인 왕씨)[4] |
1. 개요
고려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중원태수(中原太守)[5], 호부낭중(戶部郞中). 본관은 경주. 조부는 신라 소판 이거명(李居明), 부친은 신라 병부령 이금현(李金現)이다. 신라 경순왕의 사위이자 고려 태조의 외손서이다.2. 상세
조부 이거명(李居明)의 관등이 진골만이 오를 수 있는 제3관등 소판(蘇判)이었고, 부친 이금현(李金現)의 관직인 병부령은 상대등, 시중에 비견되는 재상직으로 관등이 대아찬~ 태대각간인 진골만이 오를 수 있는 직이었다. 이금서(李金書)가 고려 삼한공신에 책록되고 신라 경순왕의 딸이자 고려 태조의 외손녀인 신란궁부인 김씨(神鸞宮夫人 金氏)와 혼인한 것을 보면 그의 집안이 신라 왕실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경주이씨석탄공파세보에 의하면 일설에 이금현(李金現)이 신라 조정에서 김(金)씨 성을 받았다가 고려조에서 이(李)씨 성을 회복한 것이라 하는데, 이에 따르면 이금현(李金現), 이금서(李金書) 부자의 성명은 김현(金現), 김서(金書)였던 것이 된다. 국성(國姓)인 김(金)이 부자의 이름에 모두 들어있는 것이 공교로운데 성(姓)이라고 본다면 이해가 가는 점이 있다. 신라 말기 혼란한 정국 속에서 김(金)씨 성을 받고 진골로 편입됐을 가능성이 있다.3. 이제현 묘지명
1375년(우왕 1) 목은 이색(李穡)이 찬한 이제현 묘지명에 이제현(李齊賢)[6]의 가계를 언급하면서 "...신라 시조인 혁거세의 좌명대신인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인 소판 거명(居明)이 병부령 금현(金現)을 낳고, 병부가 삼한공신인 태수 금서(金書)를 낳았다. 신라왕 김부가 국토를 바치고 고려 조정으로 귀순한 뒤 태조의 딸인 낙랑공주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다. 그 딸이 금서에게 출가하여 윤홍(潤弘)을 낳았다..."라고 기록하였다. 2007년, 황해북도 개성시에 위치한 이제현 무덤에서 위 묘지명을 새긴 길이 1.65m, 너비 63.2cm, 두께 20.5cm, 무게 600kg 규모의 거대한 묘지석이 발굴된 바 있다.( 고려시대 사료 DB, 관련 방송, 관련 기사)
[1]
경주 김씨. 신라
경순왕의 딸. 고려
태조의 외손녀.
[2]
경주이씨대종보에서는 '고려가 병부령(兵部令) 및 병정(兵正)을 그대로 두었는 바 그 직급은 재상(宰相)에 견준다'고 적고 있다. 족보에 따라서는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적고 있기도 하다.
신라에서는 병부(兵部)의 장관인
병부령(兵部令) 아래에 차관직으로 병부대감(병부시랑)을 두었고,
태봉이 신라의 관제를 계승하였으며, 이를 다시
고려가 계승하여 병부에 장관직인 병부령과 차관직인 병부경(兵部卿)을 두었다. 918년(태조 1) 6월 고려 태조가 즉위 직후 발표한 조서를 보면,
수상직인
광평시중(廣評侍中) 1명, 병부령을 비롯한 장관직인 영(令) 9명, 병부경을 비롯한 차관직인 경(卿) 14명을 임명하였다. 이후 983년(성종 2)에 병부경은 병정(兵正)으로 개칭되었다.
[3]
평창 이씨는 이윤장(李潤張)을 시조로 하는 평창이씨중앙종친회(정숙공계)와 이광(李匡)을 시조로 하는 평창이씨대종회(익평공계)로 분열되어 있다. 평창이씨중앙종친회는 이금서의 장남이 이윤홍이고 차남이 이윤장이라고 보고 있다.
[4]
고려
태조의 장녀.
[5]
중원(中原)의 태수(太守). 중원(中原)은 본래 고구려 국원성(國原城)이었으나, 신라가 차지하여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한 후, 757년(경덕왕 16)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고, 고려에 들어와서 940년(태조 23) 충주(忠州)로 고쳤다.
# 한편 이금서(李金書)의 관직명을 경주이씨대종보에서는 중원태수(中原太守), 호부낭중(戶部郞中)이라고 적고 있으나, 계림부원군 문충공
이제현 묘지명(목은문고 권16, 동문선 권126)
#
#, 가장(上)-증 좌참찬 이몽량(양와집 책10)
#, 좌의정 이경억 묘지명(서계집 12권)
# 및 행장기(명곡집 권28)
#, 증 이조참판 이서 묘지명(초려집 권22)
#, 세보(지퇴당집 권14)
#에서는 중원태수(中原太守) 또는 태수(太守)라고만 적고 있다.
[6]
고려
공민왕 때의
문하시중이자 대학자. 이색의 좌주이자 스승. 중시조 17세로 이금서의 14대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