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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00:47:23

을병대기근

1. 개요2. 전개3. 사망자의 수4. 기타

1. 개요

을해·병자 대기근(乙亥丙子大飢饉) 또는 을병대기근(乙丙大飢饉)은 숙종 21년( 1695년:을해년)부터 25년( 1699년:기묘년)까지 있었던 대기근.[1] 경신대기근만큼 피해가 컸던 대기근으로 평가된다.

2. 전개[2]

을병대기근/전개 문서 참고.

3. 사망자의 수

당시 조선에서 집계했던 을병대기근으로 인해 줄어든 인구수는 141만명이지만, 당시 행정력의 한계를 생각하면 피해자는 141만명보다 더 많거나 적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피해자가 더 많았을 것이라는 가설에서는, 조선의 사망자 집계가 허술함을 지적한다. 당장에 숙종 24년 12월에는 이 해에 전국에서 죽은 이가 거진 2만 2천명이고 이조차도 기록된게 열에 두셋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선은 당대 기준으로는 행정력이 강한 편인데도 전체 사망자 중 3할도 파악 못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사망자가 141만명 보다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반면에 피해자가 더 적었을 것이라는 가설에서는, 조선에서 집계한 수치가 "사망자" 집계가 아니라 "호적상 줄어든 인구수"임을 지적한다. 기근으로 인해 평민들이 평민 신분을 버리고 화전민이 되거나, 논밭을 버리고 두만강 너머로 도망치거나,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노비로 팔아치운 사람까지 있었을 텐데, 이런 경우까지 다 합쳐야 141만명이라는 수치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실제로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는 141만명보다 적었을 것으로 판단하는게 올바르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에서 집계한 수치에 오차가 꽤 있을 것으로 보이는 판이니, 정확한 사망자 수치에 대해 현대 사학자들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보통 100만명~150만명 정도로 추측하기는 하는데, 딱히 근거가 강한 수치는 아니다. 굳이 수치를 인용해야 할 때는 141만명이라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수치를 인용하기는 한다.

4. 기타

이 기간 동안 암행어사 파견과 도적에 대한 기록 등이 많이 존재한다. 무려 경복궁 앞에까지 도적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게다가 이 어려운 상황에 정치적 공방[3]까지도 오가는 것을 보면 여러모로 힘들었던 시기임이 확실하다.

을병대기근의 피해자가 141만명이라 경신대기근의 피해자인 100만명[4]보다 많아 희생자 숫자가 경신대기근보다 많을 것이라는 가설도 있다. 하지만 현대 연구 결과에 따르면, 경신대기근은 최대 희생자 수치가 200만까지도 추정되는데다 저 희생자가 단 1~2년만에 나왔다는 점에서 경신대기근이 더 처참했다는 의견도 있다[5]. 오죽하면 경신대기근에서 일어난 식인사건이 을병대기근에서도 일어났지만 경신대기근에서는 아예 강력처벌도 못한[6] 반면 을병대기근에서는 좀 봐주는 한이 있더라도 강력처벌은 했다.

을병대기근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요인으로는, 경신대기근을 통해 얻은 교훈이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위의 을병대기근/전개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을병대기근 전에 쌀을 비상시를 대비해 많이 비축해 놓았고, 이 비축된 쌀을 구휼을 위해 적극적으로 백성들에게 분배하였으며, 후술하겠지만 청나라의 도움을 받는 등 경신대기근 당시 조선의 대처보다 발전된 점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러더라도 기근 자체가 워낙 심각해서 피해가 적지는 않았지만.

이 을병대기근때 조선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자[7] 당시 청나라의 황제인 강희제는 조선에 쌀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조선이 기근으로 고생하자 쌀을 보내줬다는 점에서 만력제와 비슷하지만 차이점이라면 명나라 최악의 암군이라는 평가를 받는 만력제는 임진왜란 당시 원군과 곡식을 보내준 탓[8]에 조선에서만은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줬으나 강희제는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명군일 뿐만 아니라 대기근 당시 고통받던 조선에게 쌀을 보내줬음에도 조선은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강희제의 할아버지인 숭덕제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굴복시키고 더 나아가 엄청나게 수탈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악연이 손자 대에까지 영향을 미친 듯하다. 정작 강희제 본인은 조선에서 을병대기근이 발생하자 조선에 구휼미 5만 석을 제공하고, 이를 기념하는 '해운진제조선기(海運賑濟朝鮮記)'를 직접 지을 정도로 조선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다. 다만 강희제를 높이 평가한 조선인이 없던 것은 아니었는데 실학자 홍대용은 정조의 세손 시절,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연행 경험에 대해 묻는 세손에게 "강희제는 실로 영걸한 황제였다."고 극찬했다. 여담으로 해당 구휼미의 경우 청나라 기록에서는 옥처럼 흰 쌀로 구제하였다고 나오고 조선쪽 기록에서는 먹을 수도 없는 썩은 쌀이었다고 나오는데 강희제 성격상 먹을수도 없는 썩은 쌀을 구휼미로 줄리는 없고 조선 측이 실록에 거짓 기록을 적었는지에 대해서는 승정원일기를 확인해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9]

다만 조선측에서 강희제 개인을 좋지않게 볼만한 이유도 있는데 그 이유는 강희제가 조선을 바라본 관점 때문으로 강희제는 조선이 왕권이 약해 고생한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경신대기근 때는 직접적으로 백성이 굶주리는건 신하가 강하기 때문이라 말했고 현종이 사망했을 때는 생전에 신하들에게 시달린게 가엾다며 조문하러 간 사신들에게 두 번이나 치제하게 했을 정도였다. 문제는 송시열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강희제가 송시열을 저격하고 한 말로 받아들였다는 것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그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송시열 때문에 왕이 고생하다 죽고 백성이 힘들었다는 의미가 되니 당연히 그쪽에서는 불쾌해했는데 이게 어느정도냐면 숙종 6년에 청나라 사신이 조문했을 때 접대했던 오시수를 보복으로 죽여버린다.(청 사신들의 뜻을 전한 사람인데 송시열 계열에서는 오시수가 중간에서 멋대로 잘못 전달했다는 프레임을 씌우고 당시 역관들에게서 '단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 안타까워 그랬다'는 증언을 받아낸 뒤 죽였다) 이러니 당연히 강희제에 대한 시선도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비슷한 시기인 1695년 1697년 사이에 북유럽의 에스토니아,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도 대기근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고 한다. 특히 스코틀랜드는 당시 1690년대 내내 떠돌던 역병과 겹쳐 꽤나 수난이 컸다는 듯 하다.[10]


[1] 을해, 병자년(숙종 21년~22년)까지 아니냐 싶겠는데 사실 숙종 25년까지 대기근이 계속 이어졌다. 숙종 25년에도 계속 진휼을 지시하는 기록이 등장하며 이 해에는 역병이 크게 돌았다. 직접적으로 굶어죽은 건은 그렇게 나오지 않지만 숙종 23년에 식인사건이 4건이나 나오며 또한 굶주림에 이기지 못한 백성들이 벼슬아치를 협박한 사건이 벌어졌고 숙종 24년에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은 이가 서울 밖에선 2만 2천명 가까이 되는데 이는 실제의 2, 3할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고 숙종 25년에 각종 전염병 기록이 나오는데 24년까지는 확실히 기근이 이어졌고 25년에는 기근 때문에 허약해진 사람들이 역병으로 쉽게 죽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2] 음력 기준 [3] 이 시기가 하필 갑술환국과 신사옥사 사이의 시기다. 정치적으로 남인-서인 교체기라는 환장할 타이밍에 대기근이 도래한 것 [4] 100만명은 당시 조선에서 경신대기근의 피해자라고 "예상했던" 수치이다. 경신대기근 전후로 워낙 조선이 혼란하다 보니 피해자의 수도 제대로 집계하지 못한 것. 경신대기근 당시 관료들이 전염병을 피해 집단 사직하고, 파발과 역참이 마비되는 등의 원인 때문에 조선의 행정망이 붕괴 직전까지 갔던 후유증 때문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경신대기근 당시 피해가 100만명 보다는 많거나 적었을 것으로 본다. [5] 을병대기근의 경우 5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그렇기에 단순히 생각하면 경신대기근보다 을병대기근의 희생자가 훨씬 많아야 한다. 그러나 현대 연구 결과 을병대기근의 희생자가 비교적 적었고, 당시 조선 사람들이 평가하기로도 경신대기근이 을병대기근보다 더 심했다고 평가한 것으로 보아서는, 을병대기근이 그래도 덜 처참했던게 맞는 듯 [6] 경신대기근 당시의 왕이나 지도층이 비도덕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식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했으면서도 대기근이 워낙 처참해서 강력처벌할 엄두를 못냈다. 약식으로 잠시 가둔 것이 전부였을 뿐이다. [7] 경신대기근 때도 반청감정 때문에 청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했던 조선이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였다는 점에서 을병대기근의 참혹함이 드러난다. [8] 다만 그렇다고 조선의 사대부들이 만력제에게 고마워만 한 것은 아니다. 만력제가 조선에게 지원을 해준 것과는 별개로 파업을 벌이면서 명나라 내정이 개판이 되고 외부적으로는 누르하치가 거느리는 여진족의 성장을 조기에 막지 못하면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조선에 간접적 악영향을 끼쳤다. 이 때문에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 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만력(萬曆) 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이었는데도 사십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라는 기록처럼 조선의 사대부들도 만력제의 조선 지원에 고마워한 것과는 별개로 만력제의 파업과 잘못된 내정과 외정은 강하게 비판했다. [9] 2차 가공사료라서 사관의 성향에 따라 윤색이 들어가는 실록과 달리, 승정원일기는 1차사료라서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편이다. 인조 시기 조선의 명말청초 외교에 대해서 재평가가 나온 것도 이념적이었던 실록의 기록과 달리, 승정원일기에서는 조선 조정이 현실 인식을 어느 정도 하던 게 드러났다. [10] 이 시대에 스코틀랜드가 겪은 재난을 '불운한 7년'이라고 하며 이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인구가 10~15%나 감소하였다. 궁지에 몰린 스코틀랜드는 궁리를 거듭하다가 잉글랜드가 해외 식민지를 건설해 부를 쌓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식민지를 가지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다리엔 갭에 무리하게 돈을 들여가며 식민지 건설을 시도하였지만 스페인의 개입 등 여러가지 이유로 크게 망하고 말았다. 그 결과로 거지꼴이 되어버린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자신들을 통합해줄 것을 스스로 요청할 수밖에 없었고, 잉글랜드에서 이를 받아들이고 1707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 국명을 바꾸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