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기원후 46년, 신라 제3대 왕인 유리 이사금 23년에 만들어진 한국의 거대 금동불상. 현 강원도 금강산 내금강 지역에 위치한 유점사에 소장되어 있었으며, 약 2,000여년이 지난 6.25 전쟁 이전까지 현존하고 있었으나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에 폭격으로 소실되었다.2. 내용
신라 건국 초기에 유점사에서 만들어진 금동불상으로, 삼국유사 기이편에 따르면 기원후 4년(제2대왕 남해 차차웅 즉위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문수보살은 다른 큰 스님들과 함께 두루 돌아다니면서 법문을 설하였다.
여러 대중이 부처님을 뵈옵지 못한 것을 개탄하므로 문수보살은 금으로 불상(佛像)을 조성케 하여 그중 부처님의 모습을 많은 53존을 골랐다.
다시금 큰 철로 종을 만들어 사실을 기록한글과 함께 53존 불상을 종속에 모시고 쇠 덮개로 종을 덮고는 잘 뜨게 하여가지고 바다에 띄웠다.
문수보살은
「석가모니의 얼을 담은 화신인 53불이시여, 인연 있는 나라에 닿으셔서 널리 불법을 펴시옵소서.」
하고 빌었다.
천룡(天龍)이 이것을 호위하고 『월시국』(지금의 사말간트라지방)에 이르니 국왕은 부처님의 존상을 뵈옵고 기쁘게 생각하며 절을 지어 모시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 절에 불이 났는데, 왕은 꿈속에서,
「떠나야겠으니 만류를 하지 마라.」
는 말을 듣고 애석함이 비할 데 없었으나 다시금 백금으로 포장하여 바다에 도로 띄워 배송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원거리 항해를 하며 바다를 지나 마침내 신라의 안창현(安昌縣 · 지금의 강원도 간성)에 닿았다.
그 고장의 현재(縣宰), 노춘(慮春)이란 두 사람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가니 이미53불은 떠났는데, 이상하게도 초목이 금강산 쪽으로 향해 쏠려 있고 큰 물건이 밀려간 자국이 완연하였으므로 그 흔적을 따라 30리쯤 나아갔더니 문득 종소리가 들리는지라 그 곳을 찾아가니 경치 좋은 못이 있는데 종(鍾)은 누릅나무에 걸려 있었고 불상은 못가에 늘어않아 있었다.
밝은 날인데도 아름다운 구름이 펼쳐 있었고 향기가 그윽하였는지라 노춘 현재 두 사람은 그 부처님들께 무수히 합장배례하고 그 곳에다 절을 지어 53불을 모시었으니 유점사(楡岾寺)가 바로 그 절이다.
때는 신라 남해왕 원년이라 중국에서 처음 지었다는 백마사(白馬寺)보다 63년 앞지른 셈이 되는 것이다. 지금도 유점사에는53불이 월시국에 잠시 머물렀던 인연으로 하여 『월시왕자』라는 사당이 있고, 새 떼가땅을 쪼아서 팟다고 하여 『조탁정』이라는 물도 있다.
여러 대중이 부처님을 뵈옵지 못한 것을 개탄하므로 문수보살은 금으로 불상(佛像)을 조성케 하여 그중 부처님의 모습을 많은 53존을 골랐다.
다시금 큰 철로 종을 만들어 사실을 기록한글과 함께 53존 불상을 종속에 모시고 쇠 덮개로 종을 덮고는 잘 뜨게 하여가지고 바다에 띄웠다.
문수보살은
「석가모니의 얼을 담은 화신인 53불이시여, 인연 있는 나라에 닿으셔서 널리 불법을 펴시옵소서.」
하고 빌었다.
천룡(天龍)이 이것을 호위하고 『월시국』(지금의 사말간트라지방)에 이르니 국왕은 부처님의 존상을 뵈옵고 기쁘게 생각하며 절을 지어 모시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 절에 불이 났는데, 왕은 꿈속에서,
「떠나야겠으니 만류를 하지 마라.」
는 말을 듣고 애석함이 비할 데 없었으나 다시금 백금으로 포장하여 바다에 도로 띄워 배송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원거리 항해를 하며 바다를 지나 마침내 신라의 안창현(安昌縣 · 지금의 강원도 간성)에 닿았다.
그 고장의 현재(縣宰), 노춘(慮春)이란 두 사람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가니 이미53불은 떠났는데, 이상하게도 초목이 금강산 쪽으로 향해 쏠려 있고 큰 물건이 밀려간 자국이 완연하였으므로 그 흔적을 따라 30리쯤 나아갔더니 문득 종소리가 들리는지라 그 곳을 찾아가니 경치 좋은 못이 있는데 종(鍾)은 누릅나무에 걸려 있었고 불상은 못가에 늘어않아 있었다.
밝은 날인데도 아름다운 구름이 펼쳐 있었고 향기가 그윽하였는지라 노춘 현재 두 사람은 그 부처님들께 무수히 합장배례하고 그 곳에다 절을 지어 53불을 모시었으니 유점사(楡岾寺)가 바로 그 절이다.
때는 신라 남해왕 원년이라 중국에서 처음 지었다는 백마사(白馬寺)보다 63년 앞지른 셈이 되는 것이다. 지금도 유점사에는53불이 월시국에 잠시 머물렀던 인연으로 하여 『월시왕자』라는 사당이 있고, 새 떼가땅을 쪼아서 팟다고 하여 『조탁정』이라는 물도 있다.
하지만 현존하던 것은 그보다 시간이 지난 기원후 46년, 제3대 왕인 유리 이사금 23년에 다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시대에 크게 손상이 가 옛 모습 그대로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문화재 연대구분에 엄격한 사람들은 통일신라~ 고려 초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이후 천오백여년간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오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유림들이 유점사에 자주 레이드를 오기 시작하면서 큰 위기를 겪게 되었는데 이 때 이를 구원한 인물이 조선의 제7대 왕인 세조였다. 평소 금강산 지역을 자주 오가며 유람기까지 남기던 세조가 금강산 유점사를 방문한 후 그 문화재적 중요성을 이해하고 유점사를 왕실의 복을 비는 원당으로 지정한 후 조선왕실이 이를 엄격히 보호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직접 유점사에 앵무배와 호박잔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찍은 세조의 앵무배와 호박잔 외 다른 유물들. 신라 2대왕 남해 차차웅의 금동향로와 비취옥배도 있다.
이후 왕실의 보호를 받아 최근까지 현존하였으나 6.25 전쟁 때 미군의 폭격을 맞아 유점사 전체가 통째로 소실되었다. 2,000년된 불상과 유물 일체도 모두 사라졌다. 다만 그 전에 일본 도굴꾼들이 일부를 훔쳐갔으며, 아직도 일본이나 미국에 유물 일부분이 몰래 떠돈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점사 53불상 도난사건, 빼앗긴 문화재에도 봄이 오는가
현재 공식적으로 확인된 유일한 생존 불상. 미국 보스턴미술관 소장. 출처
2018년 5월 31일부터 순수 민간교류 차원에서 북한 정부와 금강산 유점사 복원 협의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연합뉴스 : 금강산 사찰 복원 활기 찾나…, 연합뉴스 : '유점사 복원' 천담스님 방북승인…민간교류로 文정부들어 처음(종합)
3. 바깥고리(참조사이트)
- 사라진 신라-고려추정 목조각걸작 (북한 유점사 능인보점 53불)
- 사진으로 보는 금강산 유점사와 능인보전 53불
-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 서울역사아카이브 : 일제강점기 금강산사진첩
- 조선고적도보 제5권 : 통일신라 유물 A
- 조선고적도보 제5권 : 통일신라 유물 C
- 조선고적도보 제5권 : 통일신라 유물 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