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 1921년 6월 15일 |
충청남도
보령군 주포면 주교리 (현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주교리) |
|
사망 | 1951년 8월 9일 |
경상북도 대구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유영중은 1921년 6월 15일 충청남도 보령군 주포면 주교리(현 보령시 주교면 주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9년 예산공립농업학교(현 국립공주대학교 예산캠퍼스)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 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대학을 졸업했다. 음악에 능하였다고 한다.메이지대학 졸업 후 금융조합 직원으로 근무하던 중 1944년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에 의해 일본제국 육군에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 해 7월, 이등병 계급의 보병으로 복무하던 그는 후난성 창사 주둔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하여 국민혁명군 유격대에 편입되어 대적 공작 활동을 수행했다. 1945년 2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하여 제1분대장을 맡았다.
8.15 광복 후 귀국한 그는 1947년 10월 23일 육군사관학교 5기에 입교하여 1948년 4월 6일 졸업과 동시에 임관하였다.[1] 임관 후 제1보병사단에 배속되어 복무하던 중 1949년 당시 경기도 옹진군[2] 국사봉(國師峰) 전투에 대위로 참전했다. #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하여 대령에까지 올랐으나 병을 얻어 예편하였고, 이후 1951년 8월 9일 경상북도 대구시(현 대구광역시)에서 병사했다.[3]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유영중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이때 유영중은 최우등으로 졸업하여 '10801'의 군번을 부여받았다.
#
[2]
6.25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경기도 관할이었다.
[3]
국사봉 전투 관련기사에서 고근홍 대위와 함께 전사했다고 나왔으나, 고근홍 대위는 1950년 6.25 전쟁 도중 8사단 10연대장으로 덕천군 부근에서 전사하였다. 당시 12연대장이던
강영훈 장군 증언에 따르면 유모 대위가 부상을 입어 목에 출혈된 상태로 후송되었다는데, 당시 1사단 휘하 대대장 중 유씨 성을 가진 사람이 그 밖에 없음을 봤을 시 당시 후유증으로 예편 후 병사한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