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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05 03:12:42

요아힘 키르슈너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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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6b94> ▲ 1~10위
순위 이름 국적 격추 수 주 기종 비고
11위 테오도어 바이센베르거 독일 208대
12위 한스 필리프 독일 206대
발터 슈크 독일
14위 안톤 하프너 독일 204대
15위 헬무트 리퍼트 독일 203대
16위 발터 크루핀스키 독일 197대
17위 안톤 하클 독일 192대
18위 요아힘 브렌델 독일 189대
막스 슈토츠 독일
20위 요아힘 키르슈너 독일 188대
▼ 21~3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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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oachim Kirschner.jpg

1. 개요2. 입대와 개전3. 손쉬운 상대4. 영광의 절정5. 부당한 죽음6. 서훈

1. 개요

요아힘 키르슈너(Joachim Kirschner : 1920년 6월 7일~1943년 12월 17일), 제2차 세계 대전에 활약했던 독일 공군의 슈퍼 에이스 조종사이다.

2. 입대와 개전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인 1920년 6월 7일에 작센주의 뢰스니츠(Lößnitz)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석 달 전에는 공화국의 전복을 시도한 카프 반란이 벌어지는 등 제1차 세계 대전 패배의 여파와 충격 때문에 그 시대상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많은 독일 에이스들이 유소년 시절부터 글라이더 조종을 통해 비행 감각을 연마했던 경력이 있지만, 요아힘 키르슈너는 비행과는 전혀 관계없는 평범한 청년으로 자라났다. 그렇지만 요아힘 소년이 13살 때인 1933년 1월 30일에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쥐면서 그의 장래는 군인으로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요아힘 키르슈너는 19세가 되던 1939년 8월 26일에 독일 공군에 입대했는데, 그가 공군 훈련소에 있을 때 폴란드 침공 작전이 개시되었다. 개전과 함께 조종사 훈련 과정은 대폭 짧아졌고, 드레스덴 비행학교에서 1년 간 전투 비행 훈련을 수료한 그는 하사 계급장을 달고 첫 자대인 JG 3 우데트 비행단에 배치되었다.

3. 손쉬운 상대

우데트 비행단이 러시아에서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가한 것은 1941년 6월 22일부터였다. 신참이었던 키르슈너 하사는 윙맨 역할 맡으면서 한동안은 단독 격추에 나설 수 없어 전공을 쌓을 수 없엇지만, 1942년 5월 21일에 집중사격을 가해 쌍발 폭격기 일류신 DB-3를 공중폭발시키면서 처음 피맛을 보았다.

독소전 초기 대부분의 독일 전투조종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수한 교관들에게 단련을 받은 요아힘 키르슈너 또한 순조롭게 격추댓수를 늘려나갈 수 있었고, 이듬해인 1942년 12월에는 51기 격추의 전공을 인정받아 독일 황금십자장과 이어서 공군 명예컵을 수여받을 수 있었다. 요아힘 키르슈너의 일일 최다 격추 기록은 8대로, 1943년 4월 27일의 교전에서 거둔 전과였다. 그가 독일 공군에서 37번째로 100대 격추를 달성한 것은 1943년 4월 27일이었는데 그는 전시 진급으로 중위가 되었다.

4. 영광의 절정

키르슈너 중위는 1943년 7월 5일에 150대 격추에 도달했다. 8월 2일에는 170대째 격추로 인하여 라슈텐부르크의 볼프산체로 소환받아 총통으로부터 직접 곡엽기사철십자장도 받게 되었고, 대위로 승진하게 된다. 그러나 12월 17일에 크로아티아 남부에서 5기 편대 구성으로 오후에 작전을 나간 그는 7대의 P-47D와 6대의 P-40으로 구성된 미군과 뉴질랜드 공군의 혼성 비행편대와 마주쳤고, 곧 치열한 공중전이 펼져쳤다. P-47들은 키르슈너 대위가 탄 Bf109G-6를 집중적으로 노렸고, 마침내 그는 미 육군항공대 제57전투비행단 소속의 썬더볼트에게 격추되었다.[1]

미군의 전투보고서를 종합해보면 이날 교전에서 독일 공군은 2대의 Bf 109와 2대의 슈토르히 관측기를 잃었다. 워런 쇼(Warren L. Shaw) 중위와 에드워드 리빙(Edward A. Liebing) 중위, 그리고 찰스 리프(Charles C. Leaf) 소위와 휴 발로(Hugh G. Barlow) 소위의 전과였는데 이중에 한 명이 요아힘 키르슈너를 격추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5. 부당한 죽음

메트코비치(Metković) 상공에서 무사히 낙하산 탈출에 성공한 키르슈너는 운수가 트였나 했지만 지상에 주둔하고 있던 제29 헤르체고비나 저격사단(Hercegovačka udarna divizjia)[2]에 의해 생포되었다. 마침 슈투카 급강하폭격기에게 폭격을 얻어 맞고 독일군과의 전투로 수십 명의 전우가 죽어 분노와 증오심이 극에 달해있던 이들은 사로잡힌 독일인 조종사를 정당한 재판이나 심문 절차도 밟지 않고 총살에 처해버렸다. 그의 시신은 사로 잡힌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흐라스노(Hrasno Donje)에 매장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3세였다.

6. 서훈


[1] 이 날 그를 격추한 것은 스핏파이어였다는 설도 있지만, 나중에 전투일지의 대조로 인해 그 설득력을 잃었다. [2] 정규군이 아닌 파르티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