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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07:53:03

요말금초

요금교체기에서 넘어옴


1. 개요2. 전개
2.1. 배경2.2. 여진의 통일과 금의 건국2.3. 해상의 맹과 요의 멸망2.4. 정강의 변2.5. 남송의 건국2.6. 번외: 북요 서요
3. 영향
3.1. 중국3.2. 한반도
4. 관련문서

1. 개요

遼末金初. 중국 송원시대에서 중국 북방을 차지했던 거란족의 요나라가 여진족의 금나라로 교체된 시기. 요금교체기(遼金交替期)로 부르기도 한다.

2. 전개

2.1. 배경

907년 거란족을 통일해 요나라를 건국한 야율아보기는 916년에 칭제한 뒤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의 지배권을 확보하고, 서쪽으로는 탕구트, 북쪽으로는 몽골고원을 정복해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다.

이어 즉위한 요태종은 파병을 대가로 후진의 석경당으로부터 베이징 인근의 연운 16주를 할양받아 본격적인 중원 진출에 나섰다.

이후 요나라는 중원을 정복하기 위해 송나라(북송)를 공격했지만 지지부진한 교착상태가 지속되었고, 1004년 요는 북송과 전연의 맹을 맺어 상호불가침을 대가로 북송의 세폐를 지급받아 국가를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요성종 이후 즉위한 군주들의 실정과 사치, 무리한 원정은 점점 요나라를 쇠퇴시키면서 만주에 암약해 있던 여진족은 이를 틈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2.2. 여진의 통일과 금의 건국

1113년 동부의 여진족 세력인 생여진 완안부의 추장 완안아골타가 여진을 통일하였고, 1115년 금나라 건국을 선언하면서 본격적으로 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2.3. 해상의 맹과 요의 멸망

금나라가 선전하는 것을 본 북송은 이 참에 요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연운 16주를 회복하기 위해 1120년 금과 해상의 맹을 맺고 요를 같이 공격하였다.

1120년 금군은 요나라의 수도인 상경임황부를, 1121년 말에는 중경대정부를 함락시켰다.

송군은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가 있는 연경을 공격했으나 연전연패하자 금군에 지원을 요청했고, 1125년 금군이 연경을 함락시키고 천조제를 사로잡으면서 요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2.4. 정강의 변

하지만 북송은 약속된 세폐를 금에 지급하지 않고 연운 16주에만 관심을 보이자 분노한 금이 북송을 공격해 1127년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면서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송황실 인물 대부분이 금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2.5. 남송의 건국

한편 휘종의 서자 강왕 조구는 강남으로 도피하여 임안에서 즉위해 송고종이 되었고 이어지는 금군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남송이 성립되었다.

2.6. 번외: 북요 서요

요나라의 멸망 직전 요의 황족들은 도피한 뒤 후신국 북요와 서요를 건국하였다.

하지만 북요는 건국 1년만에 금에게 멸망당했고, 1124년 야율대석이 서역으로 도피해 건국한 서요는 1218년까지 존속하다 몽골 제국에 멸망하였다.

3. 영향

3.1. 중국

1113년 여진의 통일부터 1125년 요의 멸망까지 겨우 12년만에 왕조교체기가 마무리되었다.

강남으로 도피한 남송은 화북을 점령한 금과 전쟁을 계속했으나 둘 다 한쪽을 완전히 점령할 역량이 부족했고 결국 요와 북송의 관계처럼 대치상태가 지속되면서 양국은 화친과 전쟁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후 몽골 세력이 발흥해 금을 공격하자 금은 남송과 동맹을 제의했으나 남송이 이를 거절하고 몽골과 동맹을 맺어 1234년 금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몽골-남송 전쟁이 시작되면서 남송도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3.2. 한반도

금나라가 건국되자 요나라는 고려에 군사를 요청했으나 고려는 이를 거부하고 상황을 지켜보다 요나라가 만주에서 패주하자 보주(의주)를 공격해 차지하는데 성공한다.[1]

이후 요를 멸망시킨 금은 여요전쟁과 여진정벌에서 선전한 고려를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사대관계만 요구하였고, 고려도 금의 사대요구를 수용하면서 양국 사이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2]

이후 금이 몽골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여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자 거란족 잔당이 고려를 침입하는데 이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몽골군과 접촉하면서 이후 여몽전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4. 관련문서


[1] 사실 금나라도 고려의 보주 점령에 반발했으나 요를 공격하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어쩔 수 없이 보주 점령을 방관해야 했다. [2] 다만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등 금의 사대요구 수용에 대해 반발이 없는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