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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둥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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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앙사무청 주임
정체 汪東興
간체 汪东兴
한국식 독음 왕동흥
영문 Wang Dongxìng
출생 1916년 1월 9일 중화민국 장시성 익양현
사망 2016년 8월 21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직업 군인, 정치가
종교 없음(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2.3. 문화대혁명 시기2.4. 화궈펑과 손을 잡다2.5. 실각
3. 가족관계4. 참고 문헌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군인. 1932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 공산당 제9기 중앙정치국 후보위원, 제11기 당 정치국 위원, 제 11기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위원회 부주석, 12기 중앙후보위원을 역임했다. 또한 1968년부터 중앙사무청 주임 겸 중앙경호국 제1비서를 맡아 마오쩌둥의 경호를 책임졌다. 마오쩌둥 사망 후 4인방 체포에 한몫했고 화궈펑과 손을 잡고 중국 정계의 권력을 쟁취하는 듯했으나 1978년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 실각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왕둥싱은 1916년 1월 9일 장시성 익양현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년 시절에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모든 농민들이 배 굶는 일 없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세상을 꿈꿨고 팡쯔민(方志敏)이 주동한 농민 폭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양현 허담향 어린이 단장 및 소선대(少先队) 대장을 역임했다. 1931년 1월, 왕둥싱은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했다. 그후 그는 공산주의 청년단 서기를 맡았고 뒤이어 청년단 지구위 부비서를 역임했다.

1932년 6월, 왕둥싱은 16살의 나이에 중국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고 같은 해에 중국 노농 홍군에 참가했으며, 1933년 1월 중앙 소구에 소속되었다. 1933년 2월 24일, 홍10군이 광택현(光澤縣)에 도착해 돌격대를 구성하자, 왕둥싱은 돌격대에 자원했고 먼저 광택형의 성 내부로 들어갔다. 이후 왕둥싱은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홍11군의 제 19사단에 소속되어 국민혁명군의 제4차 초공작전에 맞서 싸웠다. 같은 해 7월 홍 11군이 홍 19사단으로 개편되었을 때 왕둥싱은 홍 84연대에 편입되어 정치처 청년간사 책임자를 맡았다.

1933년 10월, 왕둥싱은 국민혁명군의 제5차 초공작전에 맞서 진시현(金溪县) 전투에 참가하던 중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중앙 야전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부상에서 회복한 후, 그는 중앙 소구의 7번째 군단 사무실에서 근무했고 물자 운송과 부상병 이송을 담당했다. 이후 팽양(彭楊) 보병학교로 보내져 군사 지식을 숙지하면서 1대대 3중대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1934년 10월 대장정에 참가한 그는 1935년 중앙군사위 총정치부 직속대 지도원에 임명되었고 1936년 이후 홍군 제2야전병원 정치위원으로 근무하며 산시성 감녕(甘寧) 지역에서 홍군의 동정, 서전 전투 의료 구호 업무에 참여했다.

왕둥싱은 중일전쟁 발발 후 팔로군 양연 하방사령부 조직과장, 팔로군 위생부 정치부 부주임 겸 조직과장, 백구(白求) 국제평화 총병원 정치위원을 역임했다. 그후 1945년부터 1947년까지 중국 공산당 중앙사회부 제3실 부주임, 제2실 주임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국공내전 시기엔 중앙직할대 사령부 부참모장을 맡아가 1947년에 국민혁명군이 중국 공산당이 장악한 섬북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히자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런비스 등을 따라 섬북 각지를 전전했고 마오쩌둥 및 공산당 주요 인사들의 경비 업무를 책임졌다.

1947년 6월 8일 새벽, 국민혁명군 섬북방면군 제1군이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위치한 왕가만(王家灣)에서 고작 산 하나 떨어진 지점까지 진이밯자, 마오쩌둥 등은 밤새 퇴각했다. 이때 왕둥싱은 경호처장으로서 마오쩌둥을 밀착 경호했다. 1948년 3월, 중국 공산당 중앙은 황하를 통과했고 왕둥싱은 후방 이전 작업을 담당했다.

2.2.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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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왕둥싱.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왕둥싱은 중앙인민정부 정무원 비서청 부주임,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사무처 부처장, 경비처장, 공안부 8국 부국장을 역임했고 1953년엔 공안부 중앙청사 경비국 국장을 역임했다. 또한 1955년 10월부터 중화인민공화군 공안부 차관에 임명되어 뤄루이칭의 대리를 맡았다. 왕둥싱은 1955년 중국 인민해방군 소장 계급을 수여받았고 중난하이 내부를 관장하는 베이징 위수구의 핵심 책임자가되었다.

왕둥싱은 1958년 6월부터 1960년 8월까지 장시 부성장 겸 장시성 농간청장을 지냈다. 그리고 1959년 2월부터 1960년 8월까지 중국 공산당 장시성 위원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했고 장시 공산주의 노동대학 부총장, 덩서기를 겸임했다. 또한 1959년 6월부터 1960년8월까지 중국 과학원 장시 분원 부원장을 겸임했다. 이렇듯 장시성에서 활동하던 왕둥싱은 1960년에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와 1970년 6월까지 공안부 부부장을 지냈다.

2.3. 문화대혁명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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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9월 천안문에서. 왼쪽이 왕둥싱, 오른쪽은 쉬스유이다.

문화대혁명 발발 후, 왕둥싱은 마오쩌둥의 경호국장으로서 마오쩌둥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는 동시에 혁명을 주도하는 인사들에게 마오쩌둥의 의중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일설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고 한다.
“그는 항상 나와 함께하려 했다. 나도 왕둥싱이 보이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된다. 옆에 있는 게 습관이 돼버렸다. 둥싱도 사람이다 보니 나처럼 장·단점이 있다. 세심하고 주도면밀함은 따라갈 사람이 없다. 이론이나 문화수준이 낮고 머리 쓰기를 싫어하지만,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뭐든지 아는 척해서 조롱 받는 것보다는 낫다. 한(漢)대의 주발(周勃)을 봐라. 머리에 든 건 없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공을 세웠다. 모시는 사람에게 명예를 안겨줬다. 왕둥싱과 손을 잡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1969년 4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9기 1중 전회에서, 왕둥싱은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던 1970년 8월 하순, 루산에서 열린 제9차 중앙위원회 제2기 본회의에서, 천보다는 "천재론"을 주장하며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을 비판하는 린뱌오의 주장에 적극 찬성했다. 마오쩌둥은 천보다와 린뱌오가 야합하고 있다며 혐오감을 표시했지만 저우언라이, 천이(陳毅), 왕둥싱은 천보다와 린뱌오를 지지했다. 회의가 끝난 후, 마오쩌둥은 누군가가 회의 중 음모를 꾸몄다는 발언을 하고 "나는 국가 주석직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히며 자신이 천재라는 견해를 부정하고 국가 주석직을 반혁명 강령으로 규정했다. 이 시점에서 마오쩌둥과 린뱌오 간의 모순이 드러났고, 왕둥싱은 자신이 린뱌오를 지지한 것을 해명하기 위해 마오쩌둥에게 2차례에 걸쳐 편지를 보내야 했다.

중국 공산당 9기 2중전회 후, 마오쩌둥은 천보다의 천재론에 대한 비판운동을 전개하고 뒤이어 중앙군사위원회 사무팀원들에 대한 비판을 전개해 총참모장 황융성 등 린뱌오의 츤근들을 비판했다. 이에 린뱌오와 아내 예췬, 아들 린리궈는 쿠데타를 단행하기로 결심하고 1971년 마오쩌둥이 남순했을 때 측근들을 모아 571 공정을 구상해 마오쩌둥의 암살을 시도했다. 이때 왕둥싱은 마오둥의 안전 업무를 담당하고 주요 지점에 보위 임무를 구체적으로 배정했다.

9월 11일, 마오쩌둥은 갑자기 북상하기로 결정하고[1] 9월 12일 천진에 도착했다. 린뱌오 일당은 암살 음모가 실패로돌아가자 9월 13일 새벽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피신하다가 몽골에서 추락했다.( 9.13 사건) 이후 중국 공산당은 군사위 상무위원회를 폐지하고 1975년 군사위 상무회의를 소집하여 셰푸즈, 장춘차오, 리셴녠, 지덩쿠이(紀登奎), 왕둥싱 등이 군사 관련 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왕둥싱은 1973년 8월 중국 공산당 10기 1중 전회에서 중앙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했다. 이후 왕둥싱은 정계와 군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마오쩌둥의 경호국장으로서 큰 신임을 받았고, 사람들은 그를 '그림자 실세'라고 불렀다.

2.4. 화궈펑과 손을 잡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마오쩌둥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된 화궈펑 공산당 중앙 제1 부주석은 4인방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9월 11일, 화궈펑은 리센녠, 예젠잉, 녜룽전 등과 함께 사인방 문제를 논의했다. 왕둥싱은 화궈펑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자 그를 따르기로 결심했고, 베이징 위수구 경호대장이자 정치국 위원인 그의 합류로 인해 화궈펑의 세력은 사인방을 압도할 수 있었다. 9월 21일, 화궈펑은 예젠잉과 밀담한 후 '격리심사' 방식으로 강경하게 해결하기로 잠정적으로 결론내렸다. 또다른 정계의 거물이었던 천윈은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대세가 기울었다는 판단을 내리고 이를 따르기로 했다.

10월 6일, 왕둥싱은 8341부대를 이끌고 중난하이 개인 숙소에 머물고 있던 장칭을 긴급 체포했다. 그후 화궈펑은 '마오쩌둥 선집 5권'을 검토한다는 명목으로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을 회인당에 부르고 그들이 회인당에 오자마자 체포했다. 이로서 마오쩌둥의 최측근으로서 횡포를 부리던 4인방은 몰락했고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렸다.

왕둥싱은 1977년 3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마오쩌둥의 저서 편집 출판위원회 사무실 주임 겸 당서기를 맡았다. 또한 1977년 3월부터 1982년 4월까지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제1부총장을 겸임했으며 1977년 8월 중국 공산당 제11차 전국대표대회를 앞당겨 소집하여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붕국 공산당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당시 그는 화궈펑, 예젠잉, 덩샤오핑, 리셴넨에 이어 당내 서열 5위였다.

1977년 2월, 왕둥싱은 화궈펑의 '양개범시론'을 적극 지지하는 사설을 개재했다. 그는 사설에서 "마오쩌둥의 모든 결정은 확고하게 옳으며, 우리는 항상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천시롄(陳錫聯), 지덩쿠이, 천융구이(陳永貴)와 함께 '범시파'를 형성하여 화궈펑의 주요 지지자로 활동했다. 그는 화궈펑이 마오쩌둥이 지명한 유일한 후계자이니 마땅히 그의 뜻에 따라야 하며, 덩샤오핑은 1975년에 마오쩌둥이 총리 직에 적합한 지 시험해봤지만 좀 빠진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으니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문화대혁명 시기 반당분자로 낙인찍혔던 보이보, 펑전을 정계에 복귀시키는 것에 대해 "지하에 계신 마오 주석께서 어찌 생각하시겠는가. 또 세계는 우릴 어떻게 보겠는가."라며 반대했다.

2.5. 실각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경력이 깊은 덩샤오핑이 공산당 최고 의사결정층으로 돌아가 안정 국면을 이끌었다. 이후 덩샤오핑과 천윈, 후야오방 등이 화궈펑의 '두 개의 범시'를 '극좌 노선의 오류'라고 비난했고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에 질린 중국 인민들이 이들을 지지하면서, 화궈펑 일당이 쥐고 있던 권력은 덩샤오핑으로 점차 넘어갔다.

1978년 12월, 왕둥싱은 중국 공산당 제11기 제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극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중국 공산당 중앙사무청 주임직에서 해임되었고 야오이린(姚依林)이 대신했다. 또한 친 덩샤오핑 세력에 속한 후야오방이 '마오쩌둥 선집' 편집위원회 주임을 맡고 양더중(楊德中)이 8341 경호부대 정치위원을 맡음으로서, 왕둥싱의 권세는 갈수록 약화되었다.

1980년 2월, 중국 공산당 제11기 5중전회는 왕둥싱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위원회 부주석직을 사임하는 안건을 비준했다. 이후 왕둥싱은 공산당 후보 위원 및 중앙고문위원회 위원을 역임했으나 실권은 없었다.

왕둥싱은 중난하이를 떠나 베이징 서단 동쪽의 한 골목에 살며 정치와 멀리 떨어져 살았다. 그는 말년에 저술활동에 전념해 <왕둥싱 일기>, <왕둥싱 회고-린뱌오 반혁명 집단과의 투쟁> 등 여러 서적을 출간했다.

2015년 8월 21일, 왕둥싱은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향년 99세. 그는 아내 요상아(姚湘娥)와 함께 바바오산 혁명공묘에 매장되었다.

3. 가족관계

왕둥싱의 아내 요상아는 전직 간호원으로서 홍군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그녀는 장시성 공안청 경호처 부처장 등을 거쳤고 남편을 따라 베이징에 들어가 중앙경호단 부정위, 경호처 부처장 겸 경위실을 지냈다.두 사람 모두 7명의 자녀가 있는데, 대부분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복역한 적이 있다.

4. 참고 문헌


[1] 그가 이 결정을 한 이유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