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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6-19 09:21:19

완안마근출

1. 개요2. 행적


完顏麻斤出
(? ~ 1232)

1. 개요

금나라의 인물.

2. 행적

1219년 7월 경동, 경서, 경남의 삼로사(三路司)가 설치됐다. 당시 호부시랑이었던 완안마근출은 경남로를 맡았고 치소는 허주(許州)에 있었다.

이후 지개봉부사(知開封府事)를 역임했다. 1228년 1월 경진일(음력)에 이부낭중 양거인과 함께 몽골 제국에 사신으로 가서 칭기즈 칸의 죽음을 위무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경자일(음력), 완안마근출 등은 사신으로서 직책에 어긋난 행동을 해 상서성의 판결을 받게 됐다. 애종은 선지를 내려 죄를 용서하고 다시 사신을 보내도록 했으나, 오고손중단(烏古孫仲端)은 완안마근출 등이 임금의 명령을 욕보이고 사신으로서 절개를 잃은 것은 큰 불경이므로 예페(禮幣)로 배상하게 하고 목을 벨 것을 상주했다. 완안마근출은 죽음을 면하고 제명 처분을 받았다.

몽골-금 전쟁이 발발하고 1232년 1월, 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변경(汴京, 카이펑시)을 침공해 그 대응을 두고 금나라 조정에서 의견 차이가 있었다. 상서령사 양거인은 먼 거리를 행군해 지친 몽골군을 바로 공격할 것을 제안한 한편, 평장사 완안백살은 제방을 터뜨려 변하(汴河)의 수위를 높이고 나루를 견제하는 방어적 전략을 제시했다. 결국 완안백살의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완안마근출은 장정 1만여명을 이끌고 제방을 터뜨리러 나가는 동안 협곡살합(夾谷撒合)이 보병과 기병 3만을 이끌고 나루를 순찰하게 됐다.

한편 오고타이 칸은 다른 경로로 황하를 건너 툴루이와 합류했고, 협곡살합이 봉구(封丘)를 찍고 돌아오는데 몽골군이 완안마근출 등을 공격했다. 이 공격에서 완안마근출은 전사했고 1만의 장정 중에서 겨우 2~300여명만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