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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07 20:45:11

올제이투 칸

파일:일 칸국 국기.svg
일 칸국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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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올제이투 일칸 (2).jpg
원나라 대칸의 사절을 맞이하는 올제이투 칸

1. 개요2. 생애
2.1. 즉위2.2. 반란 진압2.3. 대유럽 외교2.4. 외정
2.4.1. 히자즈 개입과 죽음
2.5. 사후

1. 개요

페르시아어, 아랍어 اولجایتو خان
몽골어 Өлзийт хаан / ᠦᠯᠵᠠᠢᠲᠦ ᠬᠠᠭᠠᠨ
영어 Öljaitü Khan

생몰 1282년 3월 24일 ~ 1316년 12월 16일
재위 1305년 5월 11일 ~ 1316년 12월 16일

일 칸국의 8대 칸. 형 가잔 칸에 이어 명재상 라시드 앗딘 함다니를 기용하여 일 칸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였고, 서방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맘루크 왕조에 대한 공동 침공을 꾀하였다. 군사 원정에 적극적으로 나서 맘루크령 시리아 외에도 카르트 왕조, 오스만 베이국, (맘루크의 속국인) 메카 토후국 등을 공격하였다. 또한 계획도시 솔터니예를 건설하여 제국의 새 수도로 삼았다. 사후 아들 아부 사이드 칸이 계승하여 전성기를 이어갔다. 다만 올제이투 칸의 치세 동안 호라산 등지에 유입된 몽골계 아미르들과 그의 부마에 오른 대장군 추판은 향후 일 칸국의 내분과 해체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2. 생애

파일:가잔 올제이투.jpg
형 가잔 칸과 합석한 올제이투

1282년 당시 호라산 총독이던 아르군 칸 케레이트 기독교도 우루크 하툰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노새꾼이란 뜻인 카르반다였고, 불교도로 길러졌으나 1291년 모친의 영향과 몽골-십자군 동맹의 일환으로 세례를 받은 후 교황 니콜라오 4세를 따서 니콜랴란 세례명을 받기도 하였다. 다만 1295년에는 형 가잔 칸을 따라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며, 무함마드를 이름으로 삼았다. 바이두 칸에 맞선 형 가잔의 계승 전쟁을 도운 그는 가잔의 등극 후 전통적으로 차기 칸의 임지인 호라산 총독으로 봉해졌고, 1299년에는 자녀가 없던 형의 후계자로 확정되었다.

2.1. 즉위

1304년 5월 가잔의 사후 우선 잠재적 경쟁자인 게이하투 칸의 아들 알라프랑에 사절을 보내어 살해하여 후환을 없앤 그는 같은해 7월 우잔 평원에 당도하여 대관식을 치렀다. 재상이자 역사가 라시드 앗딘에 의하면 그는 정식 이름을 올제이투로 정했는데, 이는 당시 원나라의 대칸이던 원성종 (올제이투 한)의 이름에서 딴 것이라 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탄생했을 시에 비가 내리자, 이를 길조로 여긴 몽골인들이 상서롭다는 뜻인 올제이투라 부른 것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한다. 한편 즉위 후 이란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페르시아어로 '하나님의 종'이란 의미인 모하마데 호다반데 (محمد خدابنده)라 불렸다.

정식 칭호로써 기야스 앗딘 무함마드 쿠다반다 올제이투 술탄을 취한 그는 내각을 구성하였다. 우선 매부인 쿠틀루그샤가 대장군으로 재임명되었고, 라시드 앗딘과 사드 앗딘 사바지가 재상으로 선임되었으며 나시르 앗딘 투시의 아들 아실 앗딘이 부친에 이어 마라게 천문대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1305년 4월에는 케르만을 다스리던 쿠틀루그칸 왕조의 쿠틉 앗딘 샤자한을 폐위하고 케르만을 직할지로 편입하였다. 이로써 거란족의 마지막 왕조가 멸망한다. 그해 6월에는 장인 이린진을 아나톨리아 총독에 봉하였다. 한편 몽골 칸국들간의 우호도 증진되어 9월에는 원나라와 차가타이 칸국, 12월에는 킵차크 칸국의 사절이 당도하여 올제이투 칸의 등극을 축하하였다.

2.2. 반란 진압

1306년 올제이투는 3만 ~ 5만에 달하는 중앙아시아발 이주민들을 호라산에 수용하였다. 그중에는 아리크 부가의 손자인 밍칸 케운[1], 카이두의 아들 사르반, 카사르의 후예인 테무르 등의 보르지긴 혈통의 왕공들이 있었다. 같은해 올제이투는 1만 원정군을 보내어 속국 카르트 왕조 헤라트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하지만 이는 공성계였고, 에미르 다니슈멘드 바하두르가 매복에 전사하며 원정은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같은해에 케르만의 쿠트브가 조공을 게을리하자 폐위시키고 다른 세력을 임명한다. 이로써 후서요가 멸망한다. 이듬해에는 이린진, 추판, 세빈츠, 수타이 등의 에미르들로 4로군을 편성해 반란을 일으킨 길란 토벌에 나서 승리하였으나 대장군 쿠틀루그샤가 패하고 전사하였다. 이후 추판이 대장군으로 선임되었고, 1307년 9월 그는 올제이투의 딸 도울란디 하툰과 결혼하며 칸의 부마에 올라 궁정에서의 영향력을 늘렸다. 그리고, 이해 룸 셀주크의 마지막 술탄이 죽자, 그 영토를 합병한다.

길란 원정 후 올제이투는 재차 헤라트 공격을 지시, 1차 공격 시에 전사한 다니슈멘드 바하두르의 아들 부자이를 사령관으로 삼아 부친의 복수를 하게 하였다. 부자이는 서유럽 출신 투석기 전문가 부대의 도움으로 포위 끝에 1307년 2월 헤라트 성채를 함락하였고, 아미르 파크렛딘이 전사하였다. 그후 기야스 웃딘과 알라 웃딘 형제의 갈등 끝에 올제이투는 전자의 손을 들어주었고, 1314년 기야스 웃딘은 단독 지배를 확립해주었다. 한편 1307년 4월 라시드 앗딘은 자미 앗-타와리크 (집사)를 완성하였다. 다만 같은해 말엽 쿠르디스탄에서 무사란 자가 마흐디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키다 진압되었고, 얼마후 아르빌에서는 1만의 네스토리우스파 주민들이 봉기하였다. 대주교 마르 야발라하의 중재 노력에도 1310년 7월 일 칸국군과 쿠르드 부족에 의해 내성이 함락된 후 기독교도들은 학살당하였다.[2]

2.3. 대유럽 외교

파일:올제이투 칸 편지.jpg
1304년 올제이투 칸이 필리프 4세에 보낸 서신 (프랑스 장서각 소장)

올제이투 칸은 유럽과의 교류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1280년부터 타브리즈에 대사를 두던 제노바 공화국이 1304년 대사관을 철수시킨 후 즉위한 올제이투는 1306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무역 협정을 맺었고, 이는 1320년 아부 사이드 칸에 의해 갱신되었다. 맘루크 왕조에 대한 연대도 지속하여 1305년 4월 올제이투는 서양인 신하 부스카렐로 데 기졸피 휘하의 사절단을 파견하였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서신을 전달하였다. 그중 필리프 4세에게 전달된 사본은 현존하여 일칸국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활용된다. 서신에서 그는 상호 방위를 언급하며 몽골 칸국들 간의 대립이 끝나 화평이 성사되었고, 십자군과의 연합 작전이 가능함을 알렸다. 1307년에도 올제이투의 일두치 (보검 운반자) 톰마소 우기 디 시에나가 이끄는 사절단이 클레멘스 5세에게 일칸국이 성지를 기독교도들에게 돌려줄 것이고, 칸이 기독교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다고 전하였다.

이에 교황은 조반니 데 몬테코르비노를 동방의 대주교로 삼아 파견하였다. 다만 새로운 십자군의 결성은 서유럽 군주들의 낮은 호응으로 지지부진하였다. 구호기사단장 기욤 드 빌라레는 교황청에 제출한 십자군 계획에서 몽골군의 시리아 침공을 서방 개입의 선결 조건으로 내걸었다. 한편 동로마 제국 안드로니코스 2세는 딸 데스피나 하툰을 결혼시키는 대신 점차 세력을 확장하는 오스만 베이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고, 1305년 올제이투는 장인에게 4만 대군 파병을 약속하였다. 1308년 마침내 출정한 3만 원정군은 오스만 군을 격파하고 비티니아의 여러 읍들을 동로마 령으로 회복시켰다. 1312년 4월 비엔 공의회에서 클레멘스 5세는 십자군을 선포하였고, 올제이투는 재차 교황과 에드워드 2세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같은해 필리프 4세가 십자군 종군을 서약했으나 궁재 아게랑 드 마리니의 반대로 주저하다 1316년 사냥 중 다쳐 사망하였다. 맘루크 조에 대한 일칸국의 대서방 군사 개입 유도 노력은 1322년 알레포 평화 조약 시까지 이어진다.

2.4. 외정

파일:라시드 앗딘 집사.jpg
(올제이투의 치세에 완성된) 라시드 앗딘의 집사에서 묘사된 일 칸국군

1312년 2월, 재상 사드 앗딘 사바지와 비서 타즈 앗딘 아바지가 부패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후 재상에 오른 타즈 앗딘 알리 샤는 1323년까지 국정을 이끌었다. 같은해 올제이투는 맘루크 왕조령 시리아에 원정군을 보내었고, 알레포 총독 샴스 앗딘 카라 순쿠르와 트리폴리 총독 알 아프람의 귀순에 힘입어 다마스쿠스를 일시 점령하는데 성공해으나 역시 후퇴해야 했다. 이는 몽골-맘루크 전쟁의 마지막 대규모 충돌이었다. 맘루크 측의 송환 요구에도 올제이투는 카라 순쿠르에게 마라게, 알 아프람에게 하마단 총독위를 하사하여 정착시켰다. 1314년 2월 아크 순쿠르로 개명한 전자는 칸의 고모 올지타이와 결혼하였다.

동시에 몽골계 칸국들과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1312년 10월 킵차크 칸국의 새 군주 우즈베크 칸은 사절을 보내어 재차 아제르바이잔 할양을 요구하였다. 1314년 올제이투는 차가타이-원나라 전쟁에서 대칸을 지지하며 카라우나 (네구데리) 부족을 축출하고 아프간 남부를 장악하였다. 이에 차가타이 군이 침공하자 올제이투는 그들을 격퇴한 후 1315년 아미르 세빈츠의 후견 하에 어린 아들 아부 사이드를 호라산과 마잔다란 총독에 봉하였다. 같은해 카사르의 또다른 후손 바바 오굴이 킵차크 칸국령 호라즘을 약탈한 후 귀화하였다. 이에 우즈베크 칸이 지속적을 항의하자 올제이투는 그러한 불법 행위를 몰랐다며 바바 오굴을 추방하였다.

2.4.1. 히자즈 개입과 죽음

1316년 올제이투는 일 칸들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슬람 성지인 히자즈에 개입하였다. 그 배경은 이러하다. 후마이다 이븐 아비 누마이는 동생 아불 가이스와 메카 아미르 직을 놓고 서로를 2번씩 폐위하는 내분을 벌인 끝에 그를 죽이는데 성공했지만, 맘루크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분노를 사 이집트 군의 침공으로 이어졌다. (1311년 11월) 이집트 군이 다가오자 후마이다는 백마리의 낙타에 돈과 재물을 싯고 성채와 2천 그루의 대추 야자수를 베어버린 후 인근 요새에 숨었다. 하지만 요새마저 함락당하자 후마이다는 어린 아들과 재물도 내팽개친 후 이라크로 도주, 올제이투를 알현하고 군사 원조를 청하였다.

이에 올제이투는 사이드 탈립 앗-딜칸디 휘하의 몽골인과 아랍인으로 구성된 수천 병력을 파견하여 히자즈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미 1310년 자말 앗딘 하산 (알라마 힐리)과 카말 앗딘 마이탐 알-바흐라니의 영향으로 쉬아 열두이맘파로 개종한 올제이투는 메디나를 장악하면 아부 바크르 우마르의 무덤을 부관참시할 계획이었다 한다. 하지만 원정군이 출정한 후 1316년 12월 올제이투는 신의 징벌인지 솔터니예에서 34세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바스라를 지나던 중 소식을 접한 원정군의 대부분이 이탈하였다. 3백의 몽골, 4백의 아랍 기병대만이 원정을 지속하다 이듬해 3월 무함마드 빈 이사[3]의 4천 베두인 군에 격파되었다.[4]

2.5. 사후

올제이투 사후 아들 아부 사이드가 계승하였다. 재상 라시드 앗딘 하마니는 칸을 독살했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는데, 후일 그의 아들 기야스 앗딘은 아부 사이드 칸에게 재상으로 기용된다. 하지만 그 역시 결국 끔살당한다 올제이투는 그가 1306년 콘구르-올렌그 평원에 세운 솔터니예에 자신의 쉬아 스승과 함께 안장되었는데, 15세기 초엽 카스티야 왕국 티무르 제국 대사를 지낸 루이 곤살레즈 데 클라비호에 의하면 그의 시신은 티무르의 아들 미란 샤에 의해 부관참시되었다 한다.


[1] 아르파 케운 칸의 조부 [2] 그중에는 외성에 거주하는 아시리아인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3] 맘루크 조에서 임명한 아미르 알 아랍 무한나 빈 이사의 동생 [4] 목숨을 부지한 후마이다는 앗딜칸디, 말리크샤 등 두 일칸국 귀족들을 포함한 23인과 메카 주변에 주둔하다가 맘루크 사절이 오자 도주하는 존버 끝에 1318년 2월 아미르인 동생 루마이타의 노예들을 이용해 찬탈에 성공하며 4번째로 아미르에 등극하였다. 이후 그는 앗 나시르 무함마드 대신 아부 사이드 칸의 이름을 쿠트바에 넣으며 맘루크 조에 대한 적대감을 나타냈으나, 그해 5월 이집트의 토벌군이 당도하여 루마이타를 복위시켰다. 후마이다는 복위를 노리다 1320년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