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군위 오씨(軍威 吳氏)[2] |
출생 | 1910년 5월 21일 |
전라남도
제주군 중면 오라호리 (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라동) |
|
사망 | 1951년 7월 28일 (향년 41세) |
제주도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77호 |
상훈 | 건국포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10년 5월 21일 전라남도 제주군 중면 오라호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라동)에서 아버지 오수병(吳壽柄, 1890. 10. 19 ~ ?. 7. 29)[3]과 어머니 여산 송씨(1891. 10. 9 ~ ?) 사이의 6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6학년 때 중퇴하였다.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시 히가시구(東區) 산노미야히가시정(三宮東町)에 거주하면서 사이센(細線) 합자회사에서 직공으로 근무했다. 그는 이곳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1932년 12월에는 전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 금속노동조합 오사카지부에 가입했고, 이 단체를 중심으로 노동운동 및 항일운동을 했다. 1933년 4월에는 일본공산당에 입당, 오사카시위원회에 소속되어 오사카 지구의 문서 배포계(配布系)에서 활동했으며, 주로 동지를 규합하기 위한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1934년 1월 10일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고, 취조를 받은 뒤 그해 2월 8일 기소되었다. 그러다가 1935년 10월 14일 오사카공소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360일 통산)을 선고받고 3년 20일의 옥고를 치렀다.
1937년 10월 20일 출옥하였으며, 이후 귀국하였다. 1951년 7월 28일 제주도에서 별세했다.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당초 일본 오사카에 안장되었다가 2009년 6월 30일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