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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2:02

염상(고려)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 삼한벽상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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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공신
1등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2등
견권 능식 권신 염상
김락 연주 마난
3등
2천여 명(사서에 전하지 않음)
삼한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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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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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廉湘/廉相
생몰연도 미상

고려의 무장이자 개국공신

2. 생애

태봉의 마군장군으로 4명의 마군장( 신숭겸, 홍유, 배현경, 복지겸)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로 국호가 회복된 후 개국 2등 공신에 봉해졌다. 1등 공신들 중 복지겸이 야전 사령관으로 활동한 다른 3명과 맡은 역할이 달랐던 것처럼 염상 또한 같은 2등 공신으로 일선 지휘관으로 활동한 김락이나 견권 등과는 장기가 달랐다.

918년 9월 복지겸이 청주 출신 순군리 임춘길(林春吉)과 동향의 배총규(裵悤規), 계천(季川: 전남 장흥) 사람 강길(康吉), 아차귀(阿次貴)와 매곡(昧谷: 충북 회인) 사람 경종(景琮)의 역모 사실을 밝혀냈을 때 왕건의 측근 중에서도 청주 출신이라 그 곳 사정에 밝았던 현율(玄律)은 경종이 매곡성주 공직(龔直)의 매제임을 들어 죽이는 대신 회유할 것을 권했다. 매곡성과 그곳을 다스리는 공직의 중요성을 모를리 없었던 왕건은 현율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을 용서하려 했는데 염상이 나서 강하게 반대해 도망친 배총규를 제외한 일당 전원을 처형했으며 현율의 예상대로 공직은 후백제에 투항해 오랫동안 고려의 발목을 잡게된다. 이후 이흔암의 역모도 밝혀내어 그를 숙청하는데 일조했으며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 고려사>에 등장하는데 내용은 모두 축성에 관한 기록이다.
928년 2월에 대상 염상과 경(卿) 능강 등을 보내어 안북부(安北府)에 성을 쌓고, 원윤 박권을 진두(鎭頭)로 삼아 개정(開定) 군사 7백 명을 거느리고 이를 지키게 하였다.
929년 (태조 12년), 봄 3월에 대상 염상을 보내어 안정진(평남 순안)에 성을 쌓고 원윤 언수고에게 이를 지키도록 하며, 또 영청현(평남 영유)에 성을 쌓았다.
930년 (태조 13년) 8월, 대상 염상을 보내어 마산(馬山)에 성을 쌓고 안수진(安水鎭)이라 이름하였으며, 정조 흔행을 진두로 삼았다.
934년 (태조 17년) 겨울, 이해에 대상 염상을 보내어 통해진(평남 평원군 영유)에 성을 쌓고, 원보 재훤을 진두로 삼았다.

고려 건국기부터 시작해 고려에서 이름 꽤나 날린 무장들은 거의 모두 참전한 일리천 전투까지 참전 기록은 전혀 없는데 종합하면 전투 지휘보다는 축성과 진지 구축에 조예가 깊었던 공병 사령관으로 추측된다.

943년(태조 26년) 5월 왕유, 박수문과 함께 임종 직전 왕건의 유언을 받들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3. 대중매체



[1] 2003년 KBS 드라마 < 무인시대>에서는 양숙 역, 2014년 KBS 드라마 < 정도전>에서는 우현보 역. 참고로 타짜에서는 오 장군 역. [2]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점차 궁예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궁예가 조회에서 기침한 신하를 때려죽이라고 할 때 처음에는 염상에게 명령을 내렸으나 염상이 머뭇거리자 금대가 대신 그 신하를 죽인다. 바로 "염 부장은 뭐하고 있는거냐? 어서 쳐죽이라고 하지 않았느냐?"하는 대사의 염 부장이 염상이다. [3] 은부가 말하기를 "내군이란 궁예의 개와도 같이 무조건 충성해야 하는데 염상은 언제부터인가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은부는 종간에게 "염상을 군부로 보냈다"고 말하면서 "목숨을 거두려 했으나 그간의 정이 있어 그렇게 처리했다"고 알린다. [4]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환선길 역. [5] 염상의 잘못만은 아닌 것이, 극중에서는 왕규와 박술희가 서로 협력하며 혜종을 보좌하라는 것이 왕건의 뜻인 것으로 묘사되는데 정작 왕규는 군부 조직에 무지하기도 하고 은연중에 경시하는 태도를 수시로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박술희를 유배보내려는 생각까지 하는데, 측근들조차 "박술희를 유배 보내는 방법으로 병권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고 간언했지만 "잠시 유배 보내는 걸로 병권을 빌려 왕식렴을 제거한 후에 다시 불러서 더 잘 대우해 주면 되지 않느냐"라는. 박술희나 염상 등이 들으면 분개할 만한 말을 내뱉는다. 혜종도 반대하나, 왕규만 무조건 지지하지 근시안을 가진 장화왕후 역시 박술희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나중에 다시 데려오면 그만이라고 내치는데 정작 왕식렴을 압박하고 대등하게 견제할 수 있던 것은 왕규가 아니라 박술희였다. 당장 왕식렴부터가 "태후나 시중(왕규)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저 병부령 박술희야."라고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박술희를 두려워했다. [6] 다만 엄밀히 따지면 박술희와 왕규는 혜종의 후견인이었다가 혜종의 혈통이 이어야한다는 생각으로 흥화군을 지지한 것이다. 작중의 혜종과 의화왕후는 박술희를 불러 흥화군 대신 태자 요를 후계자로 삼고 싶다는 뜻을 밝힌 적도 있었다. 당연히 흥화군이 대를 이어야 한다는 장화왕후의 겁박으로 철회하긴 했지만. 당장 왕식렴에게 박술희가 살해당하는 이유도 흥화군을 지지한다는 이유였다. [7] 몰락 때 후회하는 것이 박술희의 문제였다. 당장 측근들부터가 박술희가 없어서 군대가 명령을 안 듣는다고 아무리 조언을 하더라도 강하게 밀어붙이면 그만이라는 무식한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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