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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7 16:53:48

연수영

淵秀英

1. 개요2. 생애3. 실존 여부4. 가족 관계5. 기타

1. 개요

고구려 무인, 제독이자 연개소문의 여동생이라고 주장되는 인물. 이름이 '연개수영', '연개소정'으로 표기되기도 한다...만 연개소문의 성씨는 연 한 글자이기 때문에 후자는 억지로 만든 가짜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오고성 등지에서 발견되었다는 비문에서 언급되는 연개소문의 여동생. 비문에 따른다면 1차 고구려-당 전쟁의 수군 지휘관이다.

2. 생애

개전 이전에 요동반도의 석성의 처려근지(도사)[1]를 맡았다. 의외로 연개소문의 후광같은 것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으나[2] 상당한 통솔력으로 인망이 두터웠다고 한다. 요동반도 남부로 상륙해 들어오는 병력을 막는 거점이었던 석성의 위치상 주 임무는 비사성의 지원과 비사성 함락시 탈환, 평양 직공이 들어올 시 요격 혹은 배후타격 등의 공격적인 임무가 주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석성 처려근지로 임명된 연수영은 급속도로 수군을 증강시켰다. 70여 척의 군함과 5천여 명의 군사를 추가 양성해 전쟁에 대비했다고 한다.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한다. 육군 10만 명[3]과 수군 7만명이 동원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군은 상상을 초월한 기동으로 고구려의 방어선을 혼란시켰으며 요동성, 개모성이 함락됐다. 이 와중에 요동반도의 요새인 비사성 역시 장량이 이끄는 수군의 야습에 의해 허무하게 함락된다.

비록 많은 성이 함락되었으나 주요거점인 신성과 건안성 공략의 실패로 인해 당군이 상당히 소모되었고 이 때문에 충분히 맞서볼만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비사성 방면은 너무 허무하게 함락되어 당 수군의 전력이 온존된 상태였다.

비사성이 순식간에 사라져 수군의 비사성 지원은 물건너 가버렸다. 하지만 건안성 공략을 지원하기 위해 장량이 수군 일부를 이끌고 북쪽으로 향하자 수군에 빈틈이 생겼고, 연수영은 당 수군의 해상기지인 창려와 성산을 침공해 당나라 함대 100여척을 불태우고 2만여 명을 사살한다. 당나라 수군 2만여 명을 이끌고 통째로 실종되어버린 미스테리로 유명한 인물 구효충이 여기서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얼마 뒤 고구려의 중앙군은 주필산에서 당태종의 본대와 정면으로 대회전을 벌였다가 패전했고 이때 고연수가 항복했다. 당군은 대회전에서 승리했으나 전후 수습이 잘 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약 1달간 방황한다.

연수영의 수군은 이후 대흠도와 광록도 등지에서 전선 50여 척을 불태우고 병력 8천여 명을 사살하고, 노백과 가시포에서도 전선 80여척을 불태우고 5천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다. 이때까지 연수영은 기민한 기동과 상당한 전술적 능력으로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연이은 승전으로 연수영은 수군원수로 승진하고, 수군기지를 광록도 부근으로 이전했다.

당태종의 본대가 안시성을 공략하던 중인 8월 15일, 연수영의 수군이 대장산도에서 당나라 수군과 결전을 벌여 대승을 거둔다. 당군은 전선 1천여 척과 병사 10만여 명을 동원해 그 중 절반 가량을 잃었다고 전한다. 동원된 병력은 과장일 가능성이 높지만 이 당시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당 수군의 수와 연수영 군이 올렸다는 전과의 숫자가 일치한다. 당나라 수군의 미귀환자들인 유영행, 상하, 좌난당, 왕대도와 그 휘하 수군 수만 명이 여기서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성 직공도 공중분해됐고 북방의 신성 공략도 실패했으니 당군에 남은 것은 당태종과 함께 안시성에 묶여있던 본대 뿐이었다. 당나라는 더 이상 답이 없다는 심정으로 안시성의 동남쪽 방면에 토산을 쌓아 내려다보면서 공격을 시도했으나, 토산이 무너지면서 성벽까지 같이 무너뜨린 결정적인 순간 고구려군이 한끗 차이로 토산을 먼저 점령하고 끝내 사수하면서 당군은 모든 전투의지를 상실하고 패퇴한다.

이 전쟁에서 당나라 수군은 엄청난 수의 미귀환자가 발생했고, 귀환한 수군 총책임자 장량, 수군총관 장문행은 각각 하옥과 참수를 당했다.

이후 기록은 명확하지 않으나 작은오빠 연정토 뿐이 아니라 큰오빠이자 대막리지인 연개소문과도 불화가 상당했다고 한다. 654년 축출당해 656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전설에 전해진다. 또한 이 모든 사건들 이전에 딸이 있었다고 하는데 역시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3. 실존 여부

하지만 위의 내용은 당시 오고성을 답사했다는 고구려연구회 서길수 박사에 따른 것으로, 이 오고성 비문 이른바 비공식적으로 입수했다는 일련의 비문 내용은 언제, 어디서 어떤 경로로 입수했는지에 대한 근거가 전혀없다.

저 내용대로라면 7세기 고당 전쟁 상황을 담은 고구려 측 금석문이 남아있다는 이야기인데 입수된 루트 또한 비공식적일뿐만 아니라 단순 중국에 의해 훼손되고 감춰져 있다고 주장될 뿐, 사진이나 탁본조차 없다.[4]

또한 비문의 내용과 관련하여 실체가 확인되어 교차검증되는 내용은 비석이 아닌 소장루 안내판밖에 없으며[5], 비문 내용의 출처인 서길수 박사도 연수영에 관한 텍스트의 출처로 소장루 안내판밖에 거론하지 않았고, 본인 또한 관련 논문이나 책자에서 실제 역사보다는 전설로 가깝게 언급하고 있다. 중국 야사집인 서곽잡록, 비망열기에서 연수영의 존재가 언급된다고 하는데, 서곽잡록은 조선 선조 당시의 시대상을 다룬 조선 후기의 야사집이고, 비망열기는 관련 자료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연수영의 존재를 증명할 공신력있는 증거가 하나도 없는 이상 만약 중국측이 존재한다는 연수영 관련 비석을 공개하지 않는다면, 중국 현지 전설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드라마 연개소문이나 이를 바탕으로 한 가상역사소설의 내용에 여러가지 살이 붙어, 실제 금석문처럼 둔갑된 것으로 추측된다.

4. 가족 관계

5. 기타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황인영이 연기하였고, 극중 이름은 연수정으로 나왔다.

소설 백제의 이름을 잇다에서는 부여풍과 혼담이 있는 것으로 등장한다.

[1] 욕살보다 급이 낮은 중간급의 성을 담당하는 지방관에 해당한다. [2] 안시성주와 같이 연개소문에 반감을 가진 자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3] 요동도행군 한정. 이민족 부대와 당태종의 친위대의 숫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4] 즉 비문의 내용은커녕 실존사례조차 없다. [5] 보통의 사학관계자들이 비공식적으로 입수했다는 것은. 대부분 신빙성이 떨어지는 해당지역 관공서에 있는 지역유래 안내장, 향토지, 안내판, 민간야담으로 쓰여진 글에서 추출해오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