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머 기디언 Elmer Gede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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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엘머 존 기디언 Elmer John Gedeon |
출생 | 1917년 4월 15일 |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 |
사망 | 1944년 4월 20일 (향년 27세) |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생폴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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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웨스트 고등학교 - 미시간 대학교 |
신체 | 193cm / 88kg |
포지션 | 중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39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 WS) |
소속팀 | 워싱턴 세네터스 (1939)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1942년 ~ 1944년 | |
최종 계급 | 중위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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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야구 선수.2. 생애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출생으로 고등학교 시절 육상, 미식축구, 야구, 아이스 스케이팅에 능한 스포츠맨이였다. 사촌이자 메이저리거였던 조 기디언의 영향으로 야구선수를 꿈꿨다. 미시간 대학교에서도 허들넘기에서 올아메리칸을 기록했고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다. 육상뿐만 아니라 야구, 미식축구도 병행했었고 졸업 후 워싱턴 세네터스와 계약을 맺었다. 빠른 발을 살린 중견수였다.1939년 마이너리그 67경기에서 .253를 기록하고 9월 콜업되어 18일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4경기를 더나와 15타수 3안타 .200을 기록했다. 1940년 마이너에서 시작해 .273를 기록하고 메이저리그에 도전했으나 콜업되지 못했고 시즌 종료 후 야구계를 떠났다.
이후 육군 사병으로 입대해 상병까지 달았고 이후 육군 항공 교육을 자원해 수료 후 소위로 임관했다. 폭격기 부대에 배치되었고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자 항법사가 되었다. 하지만 랄리 인근에서 비행하던 도중 기체 화재로 추락해 갈비뼈 3개가 부러졌다. 전쟁이 끝나면 야구가 하고싶다는 말과 함께 유럽전선으로 투입되었다.
제9공군 제394폭격단 586폭격대대에 배치되었고 1944년 3월부터 공습에 투입되어 프랑스 전역에서 폭격을 실시했다. 총 13번의 작전을 진행했으며 4월 20일 생폴인근에서 폭격을 하던 도중 독일군의 대공포에 격추되어 낙하산을 펼쳐 탈출하려 했으나 옷에 불이 붙어 탈출에 실패했고 그를 포함한 5명의 승조원이 전사했다. 시신은 발견되어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해리 오닐과 함께 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사했던 유이한 야구선수이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