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의 종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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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세네파(히브리어: אִסִּיִים 이시임, 고대 그리스어: Ἐσσηνοί, Ἐσσαῖοι, Ὀσσαῖοι)는 제2성전기에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와 함께 형성된 유대교 유파이다. 기원전 2세기에 형성되어 기원후 1세기에 사라졌다.요세푸스는 에세네인 수천명이 유대 속주에서 살아가고 있으나 바리사이인과 사두가이인에 비해서는 그 수가 적다고 기록했다. 쿰란 지역의 쿰란 공동체가 발견되면서 유대교의 유파로 잘 알려졌으며, 쿰란 지역처럼 공동체 생활을 하던 유대교의 한 조류이다. 에세네인들은 여러 도시에 떨어져 살았지만 서로 구제하고 몸을 씻으며 금욕주의적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 모임을 가졌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이 사독계 사제들에서 분리된 것으로 본다.
에세네파가 흔히 쿰란 공동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들이 금욕생활을 하던 곳이 정치적 이유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들의 정착지 중 하나였던 곳인 쿰란 동굴이 온전히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앞으로 도래할 종말에 대한 기대와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세상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로마제국 사회와 격리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반로마제국 성향이었던 에세네파는 유대독립전쟁 와중에 로마 군이 공격하여 궤멸된 것으로 보이며, 쿰란 유적에서 현존하는 구약성서 사본들 중 가장 오래된 사해사본이 1947년 베드윈 청소년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2. 역사
BC 2세기경부터 AD 1세기말까지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한 종파 또는 형제단. 신약성서에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없고, 요세푸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플리니가 전하는 기록들도 때로는 중요한 내용에서 일치하지 않는데, 이것은 에세네파 내에도 여러 분파가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유다 마카베오의 독립전쟁에 히브리인들은 적극 가담했다. 특히 계율에 충실했던 하시딤의 참여는 막강한 힘이 되었다(1마카 1.42). 하지만 이들은 전투는 능동적이었지만 정치에는 비판적이었다. 그러다 유다 마카베오가 전사하고 그의 동생 요나탄이 실권을 잡자 이들에게 난감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그리스의 지배를 받았고 그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의 '발라스’ 임금이 요나탄을 회유하기 위해 대제사장직을 제의했던 것이다(1마카 10,20). 하지만 요나탄은 ‘차독 가문’이 아니기에 대사제가 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가 제사장직을 받아들이면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이 제안을 빌미로 스스로 대제사장직에 올랐다. 당연히 ‘하시드 사람들’은 반발했다.
한편 이렇게 되자 정통 대사제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치논리가 앞서는 상황에서 더 이상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많은 하시딤이 그를 지지하며 요나탄의 군대를 떠났다. ‘정통 대사제’는 추종자들과 함께 광야로 물러가 때를 기다렸다. 그가 쿰란 공동체의 창시자인 ‘정의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에세네파는 이 와중에 태동했다. 요나탄을 반대하며 돌아섰던 강경세력이 에세네파로 변신한 것이다. 이들 중에는 쿰란 공동체에 합류한 이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에세네파의 구성원은 그 수효가 결코 많지 않았다. 플리니는 그 당시 에세네파의 수를 약 4,000명으로 잡는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에세네파는 3,000명이 넘었고 대부분 쿰란 공동체에 합류해 핵심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모세가 활동하던 시기의 광야생활을 모델로 받아들였으며 임박한 종말을 확신하고 있었다. 재산은 공유했으며, 독신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오래된 회원일수록 흰옷을 입었고, 성경을 중시해 많은 필사본을 남겼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함락과 함께 이들의 공동체도 와해되고 만다.
‘에세네’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다만 이 단어가 ‘경건’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하시딤(hasidim)과 연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 이런 표현이 등장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에세네라는 말은 쿰란문서나 신약성경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에세네파는 여러 면에서 신비스런 조직이었다.
바리사이파와 마찬가지로 모세 율법, 안식일, 정결의식을 철저히 지켰고 불멸과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믿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와는 달리 육체의 부활을 부정했고, 공공생활에 뒤섞여 살기를 거부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전예배에 참석하지 않았고, 은거지에서 육체노동을 하며 지내는 금욕생활에 만족했다. 안식일은 하루 종일 기도하고 토라[1]를 묵상하는 방식으로 지켰다. 맹세는 삼갔고, 한번 맹세를 하면 철회할 수 없었다. 개종자들은 1년간의 시험기간을 거친 뒤 에세네파 구성원의 표식을 받았으나, 그 뒤 2년간 공동식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 구성원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 경건히 살 것, 사람들에게 정의로울 것, 거짓을 미워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에세네파의 모든 교리를 충실히 지킬 것을 서약했다. 이렇게 하여 새 구성원이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점심과 저녁 식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키르바트쿰란 근처에서 사해두루마리가 발견된 이래 대부분의 학자들은 쿰란 공동체가 에세네파였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3. 형성
에세네파는 분리주의 공동체로도 알려졌으나, 대부분 사회활동을 하며 수도생활을 병행했고, 일부는 완전히 분리된 성소에서 수도(修道)하는 기간을 보냈다. 유대종교 유파중 가장 진보적인 성향의 유파로 신비철학적 성격이 있다고 알려졌다. 이들 역시 헬라주의가 영향을 끼친 기원전 3세기 말엽부터 형성된 이들로, 사두가이파로 인해 제사장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진보적 레위인의 후손으로 유대종교의 진보적 입장을 취했다.이들은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의 활동과 토라 해석이 불완전하다고 여겼다. 또한 사두가이파가 성전을 장악하기 시작한 기원전 3세기 이후부터 예루살렘 성전을 자정능력을 상실한 곳으로 규정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 성전 중심의 유대종교에서 벗어난 진보적이고 분리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4. 다른 유대교 유파와 관계
에세네파는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와 토라 해석과 성전 인식에 매우 달라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체적인 정결례 공간도 갖추었다. 이들이 광야로 이동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생활을 시작했고, 이들은 광야의 에세네 공동체에 완전히 소속되어 살아간 일부와 일반 직업을 갖고 사회 활동을 하는 이들로 자연스레 구성되어 그 영향을 지속하였다. 이들은 성전중심주의를 벗어나 자신들의 제사 장소에 분리되어 활동하였고, 그곳을 부패한 성전과 달리 진정한 성소로 여겼다.사회활동을 하는 에세네파 구성원은 유대절기에 성전에 가기도 했지만 자신들이 속한 지역 성소에 모였으며, 일부기간 성소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정결한 삶을 위해서 자신들만의 성소에서 정결예식과 제사의식을 거행하였고, 다양한 저술 활동과 교육을 전개하였다. 남은 문헌에 따르면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정경 해석을 남겼다. 이들은 유대종교에서 보수적 성격인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의 견제를 받았다.
5. 로마군의 공격
기원후 70년 로마제국의 이스라엘 전쟁에서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와 달리 반로마제국적 성향을 지녔고, 젤롯파와 관련성으로 로마군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아 관련 성소와 기록 자료들이 소실되었고, 살아남은 에세네파는 대부분 그리스도교와 바리사이파에 흡수되었다. 이후 에세네파는 간접적인 자료와 약간의 문헌만이 전해져 왔었다. 에세네파의 직접적인 문헌이 1947년 쿰란 부근의 동굴에서 대규모로 발견되어 자세한 상황과 사상 등에 대해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리스도교와 후기 유대종교인 바리사이파 유대교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한 연구가 현재도 진행 중이다.6.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종파들-에세네파(Essenes)
에세네파(Essenes)는 프랑스 도미니코회 수도자 뻬레 롤랑 드 뽀(Pere Roland de Vaux)가 사해 근처의 한 동굴에서 한 묶음의 두루마리( 사해사본)를 발견함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은 쿰란(Qumran)공동체라고도 불린다. 고대 기록에 에세네파에 대한 언급은 유대인 역사가 필로(Philo Judeaeus)의 글과 요세푸스의 고대사 그리고 플리니(Pliny)에게서 나타나고 있다.사두가이파나 바리사이파와는 달리 에세네파는 세속의 삶을 떠나 나름의 영역을 다져나갔던 그룹이었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수도원적 삶과 금욕적 삶을 지향하면서 유대광야에 은둔하였다. 그들은 재산을 헌납하여 함께 공유하고 학습과 예배와 일을 함께 했고, 정결의식으로서 침례를 행하였고 공동식사를 실행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요세푸스에 의하면(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Book XVIII Chapter 1) 당시에 결혼한 여성과 노예들을 제외하고도 이들의 숫자는 약 4천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결혼한 이들은 소득의 일부를 이 공동체에 지불했고, 그들을 위해 곡물[2]과 식품을 공급하기도 했다. 에세네파는 모든 사물이 하느님의 것이라고 여겼다. 영혼의 불멸과 의로운 삶에 대한 하느님의 보상을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자신을 구별하여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가장 의로운(rightoussness)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로운 존재들로 여기며, 공동생활 속에서 함께 노동하고 자급하며 살았다.
-에세네파에 대한 아래 내용은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ume V의 'Essenes'를 번역한 것이다.
에세네파라는 이름은 처음 필로가 '거룩'이라는 뜻의 단어 hosios를 사용한데서 유래했으며, 요세푸스에 의해서 Essæi와 Esseni 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들의 숫자는 약 4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사해(Dead Sea)로부터 멀지 않은 곳의 서쪽 지역에 주요 은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이곳 이외에서도 거주했지만 주로 팔레스틴의 작은 마을에 거주했었는데 도시들에서 가끔 그 흔적이 발견된다. 엣세네파(Essene의 옛이름은 Judas였다. BC 110)는 B.C 150년 경에 시작되었고 AD 1세기 말 경에 사라졌다. 그들은 모든 것들의 창조주요 통치자요 전지하신 유일신 하느님을 경배했다. 모세는 가장 존경을 받았고 그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태양은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깨우는 것으로서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신이 정한 운명의 보편성은 믿었지만 자유의지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전으로 희생제물을 보내기는 했지만 불결해지는 것을 저어하여 성전에서의 희생제사를 거부했다. 이것은 그들은 경건한 마음을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좋은 제사로 여긴 것으로서 피의 희생이 그들에 의해 드려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안식일은 가장 엄격히 지켜졌고, 그들의 모임장소에서는 연장자의 순으로 자리가 배정되었으며, 그 모임에서는 성서가 낭독되고, 현자에 의해 알레고리적 해석을 따른 성서해설이 이어졌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곳으로서 정결의식, 즉 자주 씻는 예식을 행했고, 레위인들이 제사에서 더럽혀진 반면에 이 규정을 철저히 지켰다. 심지어 젊은이가 어른을 만지는 것은 그를 더럽히는 것으로 여길 정도였다. 내부규율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죽음은 '육체는 타락하기 쉽고, 가진 물질은 영원한 것이 아니지만 영혼은 불멸하고 영원히 살아있으며 가장 신비한 하늘로부터 어떤 생래적 욕망에 의해 감옥에 들어가는 것처럼 육체 안으로 던져진다'는 그들의 생각 때문에 환영받을 일로 여겼다. 육체와의 결합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오랜 예속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서 대단히 기뻐했다. 그리고 그들은 눈이나 폭풍우 그리고 사막의 열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그렇지만 대양으로부터 시원한 북동풍이 불어와서 항상 고요하고 원기를 주는 대양(바다) 곁을 좋은 거주 장소로 여겼던 그리이스인들의 생각에 동의하였다. 나쁜 영혼들은 음울하고 결코 끝나지 않는 고통으로 가득찬 험악한 동굴 속에 있다고 보았다. 어떤 글에 보면 에세네파는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에세네파는 복종과 정직과 성적 금욕, 정의 그리고 절제 등을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병자들에게 아주 큰 관심을 기울였고, 연장자를 존중하였으며, 방문자들에게 친절과 환대를 베풀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여겼고, 노예제도는 천륜을 거스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큰 죄를 지은 것으로 판명된 사람은 오랜 기간 추방되거나 완전히 추방되는 처벌을 받았는데, 그들은 그 기간에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서 아무 것도 얻어먹어서는 안되며 큰 곤란을 겪고 가끔은 죽기도 했다. 철학은 무용한 것으로 악마적 인간의 놀음으로 배척받았다. 그렇지만 윤리는 열정적으로 학습하였다. 그들은 자연에서 약품의 재료들을 찾았고 신조에 상관없이 병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고 광천수의 효과를 조사하기도 했다.
그들은 신비한 능력과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그들의 예언의 능력에 대하여 기록했다. 에세네파 중 마나헴(Manahem)이란 사람은 헤롯이 왕위계승의 어떠한 여지도 없던 어린 시절에 그가 헤롯대왕이 될 것을 말하기도 했다. 모든 것들은 공유했고 심지어 집까지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농사와 농지경작 그리고 가내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결코 전쟁을 위한 무기는 생산하지 않았고 여행 중 방어용 이외에는 그것을 운반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수확물과 임금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배분하는 청지기에게 보내졌다. 의복들과 신발들은 다 헤어질 때까지 입었다. 물물교환 이외에는 어떠한 상업적 활동도 불허했다. 도유(기름을 붓는 예식)는 더럽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종을 두는 것은 불의에 유혹되는 것으로서 금지되었다. 그들의 지도자들과 수장은 그들의 사제들-비록 그가 부름을 받은 자라해도-, 청지기들과 마찬가지로 투표를 원칙으로 하였다. 관리로서 마을에 있는 사람은 여행하는 형제들을 돌보도록 임명되었다. 1백명으로 재판정이 구성되었는데 그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판결된 것은 번복될 수 없었다. 에세네파의 구성원은 네 개의 과업을 수행했다. 매일의 일과는 그날그날 주어졌다. 그들은 동트기 전에 기상하여 태양이 뜨기 전까지는 불경스럽지 않은 말 만을 했으며 마치 태양이 뜨도록 간구하는 것처럼 기도에 열중하였다. 그 후 그들은 지정된 일터로 보내어지고 그곳에서 11시까지 5시간동안 일을 했다. 모두가 모였을 때 그들은 특별하게 축귀된 물에서 목욕을 했다. 그리고 흰 옷을 입고 아주 고요하고 조용하게 공동 식사를 위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에게 각각 어떤 류의 빵과 한 종류의 음식이 담긴 접시가 놓여지기 전에 한 사제가 은혜를 선언하였다. 그들은 이것이 끝나기 전에는 먹을 수 없었다. 식사 기도의 끝에 사제가 다시 흰 옷을 그 곁에 놓도록하고 평상복을 갈아입으라고 말하고 그들은 저녁때까지 일을 한다. 저녁 식사도 그런 방식으로 진행된다. 정오 식사에서는 그들의 사제들에 의해 준비 된 하나의 희생 만찬으로서 외부인에게는 동참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저녁만찬에는 참석을 허용한다. 식사를 마친 후에야 말을 할 수 있고 음식과 음료는 아주 알맞게 준비되며, 외부인들에 식사에서의 고요는 매우 종교적이고 신비스럽게 보여진다. 에세네파의 많은 사람들은 고령이고 그들은 로마에 의해서 그들에게 가해진 엄청난 고통에도 마음과 몸의 평정을 유지했으며 절개를 꺾지 않았고 웃으면서 최후를 맞이했다.
대다수의 에세네파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여성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평화와 조화를 열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공동체는 어린이들을 받아들이고 플리니(Pliny)가 말한 것처럼 '인생의 거친 바다에서의 싸움에서 지친' 성인들을 받아들임으로서 유지되었다. 그들이 입회하면 그들에게는 목욕시에 입을 앞치마(apron)가 주어진다. 흰 의복과 작을 구덩이를 파기 위한 작은 연장이 주어지며 그들은 태양 광선으로부터 자신의 배설물을 덮는다. 1년 동안 공동체의 금욕적 규칙을 관찰하는 것에 의해 그들의 극기가 시험된다. 그런 다음 2년간 육체적 시험이 주어지는데 그동안 그들은 정결예식에 참여한다. 그렇지만 공동식사에는 참여할 수 없다. 그들이 이 모든 시험에 통과하면 완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고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고 정의를 지키며 모두에게 특별히 지도자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경건한 맹세를 하게된다. 그리고 비록 다른 사람의 의복이 자기들의 것보다 더 낫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을 진실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동료들에게 아무 것도 숨기지 않으며 외부인들에게 아무 것도 발설하지 않으며 그들이 읽는 서적들의 내용과 그들의 천사들 이름을 비밀로 지킬 것을 엄중히 맹세한다. 에세네파 사람들이 단 한번 이 맹세를 했을 때 그들의 말은 헤롯이 자기 신하들에게 충성의 맹세를 요구했던 것이 매우 신성한 것이었듯이 그들 모두에게 그렇게 간주되었다. 그들 중의 일부에게는 미혼이 요구된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 공동체의 의무는 아니다. 이것은 3년이 지난 후의 시험에서만 시행되고 만약 여성이 건강하고 자원하여 아이를 데리고 들어올 때에는 요구되지 않는다.
에세네파는 3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그들의 수와 동시대 사람들의 삶에 끼친 영향과 종교 운동의 한 분파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이런 주목은 외부적인 하나와 외부적인 두가지 요소에서 나타난다. 내부적인 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것들이 그들의 교의와 관습에서 매우 깊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이상함은 호기심을 자아내었고, 에세네파들이 비록 헬라어를 매우 능숙하게 말하였다할지라도 그들이 순수한 유대인들이었다는 이 조화를 가늠하는 것을 통해 알게된 것의 진의를 실험하도록 했다. 그들은 유일신 하느님을 믿었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경배했으며 안식일을 준수했고 할례를 열광적으로 고집했다(Hippolytus). 이 모든 것들은 내적인 요소를 보여주는 반면에 태양을 향한 그들의 태도, 사제들의 선출, 삶의 방식, 요세푸스 그 자신에 의해 피타고라스학파와의 유사성 등은 외부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7. 예수는 에세네파 출신이었나?
신약성경에 보면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는 자주 등장 하는 반면에 에세네파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는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에 대하여 비난하면서도 이들과 더불어 당시 주요 종파였던 에세네파에 대해서는 언급이 안나온다.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에세네파는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최근에 쿰란의 사해 사본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쿰란 공동체가 에세네파의 본거지였다고 주장하나 일부 학자들은 확실한 근거가 나오지 않았다며 이런 견해에 대하여 반대한다.
에세네파에 대한 기록은 유대인 역사가 필로 (Philo of Alexandria. 대략 BC 20~AD 50)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년경 - 100년 경), 그리고 플리니(Pliny)의 글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요세푸스, 알렉산드라의 필로, 플리니가 전하는 기록이 때때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8. 에세네파 : 정의의 급진파들
에세네파도 또한 “하시딤”에서 출현했다 . 3세기의 주교 “히폴리투스”는 네 집단의 에세네파가 있었다고 말한 반면 요세푸스는 두 개의 에세네파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집단의 수가 그보다 더 많을 가능성이 있다.“에세네”라는 명칭은 “경건한”, “거룩한”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다. 비록 다른 유대인들이 그 집단을 “에세네”라는 명칭으로 불렀을지라도 에세네 집단 자신들은 아마 그 명칭을 거부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특별히 거룩하다거나 경건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메시야가 출현할 때 이스라엘을 다스릴 신비한 진리의 수호자들이라고 간주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1896년경에 카이로 회당에서 발견된 사독 문서들이 에세네 집단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믿는다. 이 사본들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선과 악 사이의 최후의 싸움을 묘사한다.
에세네파들은 이러한 유형의 정보를 적절한 시기까지 비밀로 간직할 것을 계획했다. 그들은 아마 자신들을 “마스킬림” 혹은 다니엘이 말한 대로 혼란기에 유대인들을 인도할 자들로 간주했다.
대부분의 에세네파들은 멀리 떨어진 광야 지역에서 공동체를 이루어서 살았으며 또 다른 에세네 사람들은 예루살렘가 (街)에서 살았다. 그리하여 심지어 “에세네의 문'까지 있었다. 그들은 육체적 및 정신적으로 그들 자신들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정교한 의식을 행했다.
그들의 문서들은 (즉 사해사본으로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에세네파에 의해서 기록한 문서로 간주한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실함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소망 중에 그들이 주위의 사회에 의해서 타락하지 않도록 매우 주의를 기울였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의의 교사”로 불렀다.
사해사본은 그 사본이 기록된 장소인 쿰란 공동체에 살았던 사람들의 신원을 밝혀주지 않는다. 그러나 로마 역사가인 플리니는 이 지역이 에세네파의 본부였다고 말했다.
1947년에 한 베드윈 목동이(서해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기르벳 쿰란에 있는 동굴 안에 돌을 던졌는데, 그 동굴 안에서 진흙 항아리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그 목동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고대 사본들이 들어 있는 몇개의 항아리들을 발견했다. 학자들은 그 사본들이 이사야서, 하박국 주석, 쿰란 종파의 가르침을 수록한 몇 개의 문서들이라고 판명했다. 마침내 학자들은 고대 두루마리 사본들과 단편들이 보관되어 있는 11개의 동굴을 발견했다. 그 동굴들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에스테르를 제외한 구약성서의 모든 책들의 단편, 혹은 사본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본들은 마카비 시대에 기록되었다. 이 동굴의 발견은 기르벳 쿰란의 유적지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들은 거기서 커다란 사본 복사실을 발견했다.
학자들은 아직도 쿰란 공동체의 사람들이 실제로 에세네파인들이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논쟁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문서들이 몇몇 점에서 현재 잘 알려진 에세네 가르침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얀네오”의 폭정을 피해서 도망온 바리사이인들이 쿰란에 정착했다고 믿었다. 쿰란에서 발견된 나훔 주석은 바리사이인들의 생활양식을 언급하는 듯하다.
만약 쿰란 공동체의 사람들이 단순히 분리된 다른 에세네 집단이었다면 그것은 에세네 가르침들의 주류로부터 벗어나는 특별한 이탈이었을 것이다.
9. 관련 문서
- 구리 두루마리
- 사해문서
- 희년서
- 70인역
- 영지주의
- 금욕주의
- 분리주의
- 요세푸스
- 유다 마카베오
-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 반출생주의
- 종말론
- 헬렌(그리스 신화)
- 자유주의
- 급진주의
- 다신교
- 이원론
- 과학철학
- 사두가이파
- 요세푸스
- 바리사이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