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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B3A><colcolor=#FFD700> 출생 | 1905년 12월 4일 |
브라질 합중 공화국 히우그란지두술주 바게 | |
사망 | 1985년 10월 9일 (향년 79세) |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 |
재임기간 | 제28대 대통령 |
1969년 10월 30일 ~ 1974년 3월 14일 | |
경력 |
브라질 국가정보국 국장 ,(1967~1969), 브라질 제28대 대통령 ,(1969~1974), |
복무 | 브라질 육군 |
1927년 ~ 1969년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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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제 8대 대통령.2. 생애
2.1. 대통령 취임 전
이탈리아계 우루과이인 에밀리우 메디시와 바스크계 브라질인 줄리아 가하스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포르투 알레그리에 있는 군사 학교에서 공부했다. 1924년 Realengo 사관학교에 진학했고 1927년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 중위 시절인 1930년, 제툴리우 바르가스의 군사 쿠데타에 동조했고 대위로 진급했다. 1932년 혁명에서 바르가스 정부를 지지했다. 1939년 리우데자네이루 주 우루과이나에 위치한 제8기병연대로 보직을 이동했다.1957년, 그는 포르투알레그리에 있는 3군 사령부의 참모장이 되었고, 부대 사령관인 코스타 이 시우바과 친분을 쌓게 된다. 1961년 준장으로 진급했고 1964년 4월 군부가 들어서자 코스타 이 시우바 장군의 부름을 받게 된다. 이후 미국에 국방무관으로 파견되었으나 봉급과 언어 문제로 2년만에 귀국했다. 이후 브라질 국가정보국 국장이 되었고 코스타 이 시우바 대통령이 서명한 제도법령 제5조를 지지했다. 1969년 4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포르투알레그리의 3군 사령관으로 있던 중 코스타 에 시우바 대통령이 건강악화로 사임하게 된다. 1969년 10월 25일, 메디시는 찬성 293, 기권 75로 제2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2. 대통령 임기
메디시는 1967년 6차 개헌을 단행하며 이전 헌법보다 훨씬 더 권위주의적으로 개정시켰다. 이 헌법은 정부에게 언론을 검열하고 시민권을 제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었으며 군부의 20년 통치 중 가장 심각한 인권 유린이 발생했다. 고문과 엄격한 언론 검열이 시행되었으며 플레이보이나 슈피겔, 펜트하우스 등의 잡지들이 도덕과 올바른 행동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수입이 금지되었다. 또한 정적들을 도청하고 미행하여 정권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제거했다. 메디시는 전임 대통령인 코스타 이 시우바의 군 강경파 파벌의 대표격 인물이었으며 국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이러한 통치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를 통해 우민화 정책을 펼쳤고 반정부 언론을 탄압했으며 그 와중에도 헤지 글로부는 정부의 나팔수 역할을 하며 폐지를 피할 수 있었다.메디시의 임기는 브라질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호황 기간과 맞물려있다. 정부는 국가 개발 사업을 펼쳤고 아마존 횡단 고속도로, 이타이푸 댐, 니테로이강 대교[1]를 준공했다. 하지만 최저 임금의 인상이 이뤄지지 않아 공식 최저임금이 월 40달러로 내려갔고, 임금 노동자의 3분의 1 이상이 1960년 구매력과 비교했을때 약 50% 수준에 불과하는 등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메디시 정부는 프로파간다 활동을 활발히 했다. '브라질, 사랑하거나 떠나라'[2]라는 슬로건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공산주의 열풍이 불어 공산당 게릴라가 자주 발생했다. 1968년 12월에 제정된 제도법령 제5호는 게릴라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명시했고 게릴라는 조직적으로 은행 습격, 군인 공격, 납치 등을 시행했다. 특히 주 브라질 미국 대사, 주상파울루 일본 영사, 주브라질 독일 대사, 주브라질 스위스 대사 외교관을 대상으로하는 납치도 발생했고 브라질 정부는 6개의 게릴라 조직을 토벌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