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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15:08:13

에리히 클라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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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h Kleiber
파일:Erich_Kleiber_01.jpg
출생 1890년 8월 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망 1956년 1월 27일 (향년 65세)
스위스 취리히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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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NNNcm, NNkg, 혈액형
가족 이름 (관계)
학력 초등학교 (졸업·중퇴)
중학교 (졸업·중퇴)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교 단과대학 (학과1·학과2[복수전공] / 재학·학사·중퇴)
종교 종교
직업 지휘자
소속 소속
서명
파일:빈 가로 이미지.svg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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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와 공기가 이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해 존재하듯 음악도 모든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힘든 시기에 꼭 필요한 위안의 샘물이 어떤 인간의 목을 축일 수 없다면, 더군다나 그가 특정한 종족에 속한다는 이유 때문이라면 나는 절대로 그런 곳에서는 예수의 역할도 예술가의 역할도 떠맡지 않을 것이다." - 볼프강 슈라이버, '지휘의 거장들', p. 158

에리히 클라이버(1890년 8월 5일 ~ 1956년 1월 27일)는 오스트리아 체코 출신의 아르헨티나의 지휘자이다.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고전파부터 신 빈 악파의 작품까지 탄탄한 연주를 들려준 명지휘자였다.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그의 아들이다.

2. 생애

그의 아버지인 프란츠 클라이버는 언어학자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이는 매우 과장된 서술이다. 실제 그의 아바지는 독일 작센 출신으로 젊은 시절 체코 프라하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독일어, 그리스어, 라틴어, 철학 등의 가정교사를 했으나 벌이가 시원치 않자 결국 피아노 레슨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정교사를 하면서 알게된 프라하의 부유한 사업가 요하네스 쇠플의 딸인 브로니 쇠플과 사귀고 결혼에 골인하게 되면서 팔자가 펴지게 되었다. 요하네스 쇠플은 체코에서 가장 유명한 마차 제작 회사의 오너였다. 당시 황실 마차도 독점적으로 생산, 공급하고 있었다.

1890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유명한 재벌 가문에서 태어난 에리히 클라이버는 에서 출생하였지만 이후 가문의 본가가 있는 체코 프라하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의 나이 5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고 1년 후에 어머니마저 여의게 되었다. 이후 부유한 외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당시 부유층 자제들이 받던 여러 교육을 받았으며, 또한 외할아버지에게 마차 사업에 대해서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열살때 외할아버지마저 사망하면서 결국 외할아버지의 마차 사업을 이어받는 것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빈에 있는 이모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자랐다. 이후 쭉 빈에서 자라면서 김나지움(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쳤다.

그런데 대학은 빈 음악원에 떨어졌는지, 프라하 음악원에 들어갔다. 당시 에리히 클라이버는 피아노를 잘 치지 못했고, 조건부 입학 허가를 받았다. 그래도 집안이 워낙 금수저 집안이라 피아노, 오르간 등 온갖 레슨을 받으며 프라하 음악원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문서에 따라 내용이 상이한데, 어떤 자료에는 그의 주전공이 바이올린이라고 나와 있고, 어떤 문서에는 작곡이 주전공이라고 나온다. 그밖에 팀파니, 지휘를 배웠다. 음악원 3학년때인 1911년 프라하 극장에서 Johann Nestroy의 연극 "Einen Jux will er sich machen"[2]을 공연하면서 데뷔했다. 이후 1919년까지 다름슈타트에서 지휘 경력을 쌓았다. 이후 뒤셀도르프, 만하임 등에서 활동했다.

1923년 베를린 국립(주립) 오페라[3]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베를린 국립 오페라의 명성은 독일에서 최고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에리히의 전임자였던 레오 블레흐는 1923년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도이치 오페라하우스(Deutsches Opernhaus)로 이적했고, 베를린 주립 가극장은 그 후임으로 오토 클렘페러, 브루노 발터,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등에게 음악감독을 제의했으나 모두 거절당한 후 에리히에게 제의했으며 에리히는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에리히는 베를린에서 모차르트, 베토벤 등 전통적인 작곡가 외에도 레오시 야나체크의 '예누파',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 등 현대작품을 초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926년 에리히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극장 객원지휘를 갔다. 이때 아르헨티나 주재 미대사관에서 근무하던 기혼녀 루스 굿리치(Ruth Goodrich)에게 줄기차게 청혼했고, 결국 그해 연말 그녀를 베를린으로 데려와 결혼했다.

나치가 집권한 후, 1935년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음악 감독직을 사임했다. 이후 밀라노 라 스칼라 가극장 위주로 잠시 활동하다가[4], 1936년 소련 정부가 창단한 모스크바의 소련 국립 교향악단의 초대 공동 상임지휘자로 취임했으나 몇 개월 후 악단의 실질적인 창단자인 알렉산더 가우크에게 밀려나 곧 그만두게 되었다.

1937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극장의 독일 레퍼토리 감독이 되어 1949년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처음에는 아내와 자식들은 스위스에서 살았고 클라이버 혼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건너가 한 시즌 내내 체류하다가 비시즌 기간 스위스로 돌아오곤 했다. 때때로 우루과이 등에서 객원 지휘를 맡기도 했다. 이런 생활이 약 3년간 지속되었다. 1939년 전쟁이 터지자 가족을 신속히 아르헨티나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클라이버 본인은 그해 오스트리아 국적을 버리고 아르헨티나 시민권을 취득했다. 1940년에는 직장이 있던 부에노스아이에스에서 700km 떨어진 지방의 전원도시 알타그라시아에 대저택을 구입하여 가족들과 함께 그곳에서 함께 살았다.

이후 에리히는 남미 각국에서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칠레, 우루과이, 멕시코, 쿠바에서도 지휘했다. 그러나 에리히는 1946년까지 미국에서는 거의 지휘를 하지 못했다. 1930년대 초 미국에서 객연 지휘를 한 후 평단의 혹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6~1947 겨울 시즌에 뉴욕에서 토스카니니의 초청을 받아 NBC 교향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에리히는 연로한 토스카니니의 후임 자리를 내심 노린 듯 한데, 하지만 이 악단은 사실상 토스카니니의 수족과 같은 악단이었고 클라이버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클라이버가 NBC에 오기 5년 쯤 전에도 토스카니니와 NBC가 약간 틀어졌을 때 스토코프스키가 공동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적이 있었지만 1년만에 그만둔 적이 있었고 오케스트라는 다시 토스카니니의 1인 독재 체제로 복귀한 적이 있었다. 클라이버 역시 1시즌만에 NBC를 떠나게 되었다.

사실 1947년 로진스키가 떠나면서 뉴욕 필 상임지휘자 자리가 공석이 되었고, 내심 이 자리도 노렸던 것으로 보였다. 아들 카를로스도 뉴욕 브롱스에 있는 사립기숙학교인 '리버데일 컨트리 스쿨'로 전학시켰다. 이 학교는 지금도 세계최고의 학비를 자랑하는 학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뉴욕 필은 브루노 발터에게 계속 구애하며 2년이 넘게 상임지휘자를 뽑지 않았고, 발터가 계속해서 제의를 고사하자 다른 몇몇 네임드 지휘자들을 재다가 결국 1949년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를 상임지휘자로 선정했다. NBC에 이어 뉴욕 필에서도 물을 먹은 에리히는 결국 1949년 뉴욕을 완전히 떠나게 된다.

때마침 아들 카를로스가 스위스의 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이 결정되고 콜론 극장과의 계약도 끝나면서, 에리히 클라이버는 아들 뒷바라지를 할 겸 유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유럽에서 그는 생각보다 큰 인기를 얻지 못했고, 그 어떤 오케스트라에서도 고정적인 포스트 제의가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런던 코벤트 가든 음악감독 제의가 들어왔으나 에리히는 거절했다. 당시 코벤트가든의 수준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코벤트가든이 세계적인 수준에 이른 것은 나중의 일이며, 당시에는 전쟁으로 와해되었던 오페라단을 재건하는데 애를 먹던 시기로 당시 코벤트가든은 해외 유명 성악가들을 초청할 여력이 전혀 되지 않아 영국 국내 가수진으로만 운영하던 상황이었고, 심지어 오케스트라도 상설화되지 않아 매 프로덕션마다 임시직 연주자들로 그때그때 임시로 악단을 조직하여 공연하는 실정이어서 공연의 수준이 형편없던 시절이었다.

고향이었던 체코로의 진출을 타진해 보기도 했으나 이쪽도 상황은 여의치 않아 객원 지휘 몇번으로 그쳤다. 그밖에 이탈리아 피오렌티노 마지오 무지칼레 오페라 극장에서 1951년 당시 무명이었던 신인 마리아 칼라스와 공연하기도 했다. 그는 공석이었던 고향 빈 국립 가극장의 음악감독이 되길 크게 희망했다. 하지만 정작 빈에서는 그에 대한 평판이 크게 엇갈리고 있었다. 그가 나치에 저항했다는 영미 언론의 관점으로 그를 반나치 투사로 치켜 세우며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면 그가 조국을 등지다 못해 국적까지 버렸고, 나치에 저항한다면서 계속해서 소련, 동독, 체코 등 공산 독재정권 밑에서 계속 부역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도 높았다. 결국 1951년 빈 국립가극장에서 장미의 기사를 공연이 성사되었으나 단발성으로 그쳤다. 빈 국립가극장 음악감독은 전임 칼 뵘이 다시 복귀했고, 내심 기대했던 그는 크게 실망했다.

1951년 동독 공산당 정부가 베를린 국립(주립) 오페라의 음악 감독을 제의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음악감독에 취임했다. 그의 집은 동베를린의 소련인 거주 지역에 배정되었다. 소련인 거주 지역인 만큼 나름 동독에서는 가장 부촌이라 할 수 있었다. 에리히 클라이버는 이곳에 가족들을 데리고 정착했다. 하지만 베를린 가극장은 점차 공산주의 체체를 선전하는 선전도구로 전락해갔고, 그는 점점 심해지는 공산당의 정치적 간섭과 압박으로 공포를 느꼈다. 공산당에 의해 서유럽에서의 지휘 활동을 점차 제약 받았고, 1954년경 서방에서의 지휘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러다가 1955년 3월 동독 당국이 베를린 국립 오페라의 프리드리히 대왕 기념비를 철거하자 과거 유산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급히 사임을 표하고 즉각 가족들과 함께 동베를린을 탈출했다.

그러나 동독을 탈출한 후 그의 활동은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이미 서독이나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서유럽에서는 그가 공산 독재정권에 부역했다는 사실에 비판적인 청중이 많았고, 몇몇 언론 매체 또한 그의 정치적 행적을 비판했다. 하지만 에리히 클라이버는 자신이 동서 가교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고, 서유럽 정권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자신의 음악 활동을 방해한다고 주장했다.

1955년 3월 동독을 탈출한 후 곧 음반사 및 방송사와 연결되어 그해 3월 ~ 4월에 걸쳐 쾰른 방송 교향악단, NDR 방송 교향악단, 빈 필하모닉 등과 공연 및 녹음을 잇달아 가졌으나, 5월부터는 스케줄이 뜸해졌다.

1956년 1월 취리히의 한 호텔 욕조에서 피를 흘리며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공식적인 사인은 심장마비라고 되어 있으나, 그의 아들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증언에 따라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미국 주요 오케스트라에서 번번히 물먹은 것에 이어, 내심 믿었던 유럽에서마저 유명 악단들로부터 별다른 제의를 받지 못하던 상황이 이어지자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나름 고향이라고 생각했던 빈 청중들에게 냉담한 반응을 얻었던 것도 주요 요인으로 거론된다. 그를 지원해주던 DECCA에서도 처음에는 콘서트헤보, 빈 필 등과 연결해주며 베토벤 교향곡이라는 대작 레코딩을 의뢰해왔지만 1955년 이후에는 쾰른 방송 교향악단과 베버와 모차르트의 무곡 등 소곡 레코딩을 취임하는 등 찬밥 신세의 분위기[5]가 확연해졌다. 결국 쾰른 방송향과 모차르트의 독일 무곡들을 취입한지 일주일 후에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3. 기타

에리히 클라이버는 파시즘에 반대해서 베를린 국립 가극장을 떠나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내용은 영미권의 여러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유럽 대륙 사람들의 생각은 이와 차이가 있다. 유럽에서는 그가 곧 벌어질 전쟁을 피해 도망갔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에리히 클라이버는 자신이 파시즘에 저항하기 위해 독일을 떠나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유럽에서는 이를 곧이 곧대로 믿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에리히 클라이버가 나치와 대립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으로 언급되는 힌데미트 사건 이후에도 클라이버는 이듬해까지 국립 가극장에서 자리를 지켰다. 이후 1935년 클라이버는 베를린 국립 가극장을 사임했지만 직후 밀라노 라스칼라 가극장과 소련 국립 교향악단에서 활동한다. 게다가 당시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의 여파로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지불하느라 경제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고 회복하려던 차에 경제대공항이 터지면서 그 여파를 제대로 맞고 말았다.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하는 것은 사실 당연한 것이었다. 소련 국립 교향악단 역시 당시 대공황의 반대급부로 소련의 국력이 정점에 올랐던 시기였고, 서방에서는 전례가 없는 국가 주도로 창설된 악단인 만큼, 아직도 대공황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휘청이고 있던 유럽과 미국의 오케스트라들보다 훨씬 재정적으로 안정된 악단이었다.

클라이버가 베를린을 떠나서 새로 자리잡은 이탈리아는 원조 파시스트 국가였다. 1935년 당시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나치 독일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독일은 히틀러가 총통으로 권력을 장악한지 얼마 안되어 서서히 전체주의적 정책을 밀어붙이는 중이었지만 이탈리아는 이미 완전히 파시스트 국가화된 상태였다. 에리히 클라이버는 스칼라좌의 음악 감독직을 계속 유지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인 1939년 4월에야 사임했다.

소련 역시 독일, 이탈리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스탈린은 1936년 1월 그 유명한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파동을 일으켰고, 이에 생명에 위협을 느낀 쇼스타코비치는 철저히 정권의 혁명 정신에 동조하는 작품을 작곡해야 했다. 이후 그 유명한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에리히 클라이버가 취임한 것은 므첸스크의 맥베스 사건 이후이며, 소련이 본격적으로 예술계에 사상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이후였다. 힌데미트 사건에 항의하여 베를린에서 직을 사임하여 떠났다는 사람이 파시즘 국가 이탈리아와 므첸스크 멕베스 부인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소비에트 국가에서 연달아 취임한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유럽을 떠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했는데, 하필이면 그가 망명(?)한 나라는 파시스트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군사독재국가 아르헨티나였다. 잘알려져 있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이히만 등 나치 최고위층이 대거 망명간 곳이 아르헨티나였다. 어쨌든 아르헨티나는 당시에는 상당히 부유하고 잘 나갔던 나라였고, 지휘자 개런티도 전간기에 찌들리던 유럽보다 좋으면 좋았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같은 여러 거장들이 여러 차례 남미를 방문해 지휘를 한 것도 당시 남미의 풍족한 경제력 덕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클라이버는 당시 경제력이 풍족했던 아르헨티나에 5년간 더 머물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서는 대다수의 지휘자들이 연합국에서 연주금지를 당했고 이때문에 1948년까지 해당 지역 오케스트라들은 극심한 지휘자 구인난을 겪었다. 때문에 첼리비다케처럼 오케스트라 지휘 경력이 전무한 젊은 음악도가 베를린 필의 임시 수장이 될 수 있었다. 당시 독일의 지휘자 구인난 때문에 미국의 젊은 지휘자들이 낮은 연봉에도 불구하고 경험을 쌓기 위해 독일로 건너가서 지휘자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뉴욕 필의 부지휘자에서 잘리고 백수생활을 하던 청년 레너드 번스타인도 있었다.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여러 유명 오케스트라들이 에리히 클라이버에게 객원 지휘를 간절히 요청했다. 이중에는 베를린 필도 있었다. 하지만 클라이버는 이러한 요청들을 모두 무시했다. 당시 독일의 지휘 개런티는 미국에 비하면 10 ~ 20% 수준으로 거의 헐값에 불과해 비행기값도 안나왔기 때문이다. 그 기간동안 클라이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물면서 콜론 가극장을 지휘하면서 다른 아메리카 대륙의 오케스트라들을 주기적으로 객원지휘했다. 특히 1947년 로진스키가 사임한 후 뉴욕 필이 차기 상임지휘자를 내정하지 않고 공석으로 두자 내심 이 자리를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에리히 클라이버는 뉴욕에 별도의 집을 마련했고, 이때 아들인 카를로스 클라이버를 미국 최고의 부유층 자제들이 다니는 세계에서 학비가 가장 비싼 학교로 유명한 뉴욕의 '리버데일 컨트리 스쿨'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허나 뉴욕 필은 2년간의 공석 끝에 1949년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를 상임지휘자로 임명했고 에리히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콜론 가극장과의 계약이 끝나자 에리히 클라이버는 스위스 대학으로 진학시킨 아들의 뒷바라지도 할 겸 1950년 유럽으로 돌아왔다. 당시 유럽은 어느 정도 재건을 마치며 전쟁 후유증을 극복하고 본격적인 성장을 시작하고 있었다. 클라이버는 프라하, 암스테르담, 로마, 빈 등에서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극장에서 객원 지휘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만족할만한 고정 포스트를 제의받지는 못했고 그의 지랄맞은 성격 탓인지 객원 지휘 제의도 꾸준히 이어지지 않고 단발성으로 끝나버린 경우가 많았다. 물론 객원 지휘만으로도 충분한 수입을 올릴 수는 있었다. 그러나 클라이버는 유럽에서 자신의 입지가 탄탄하지 못함을 느꼈던 것 같다. 고향인 프라하나 빈에서도 그는 간간히 초청되는 정도였지 주요 객원 지휘자가 되지는 못했다. 게다가 빈 국립 가극장의 성악가들은 푸르트벵글러, 칼 뵘, 카라얀 등을 따랐다. 빈의 유명 성악가들은 다른 지휘자들과 스케줄을 우선시했고 에리히 클라이버는 성악가들을 섭외하는데도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사실은 에리히 클라이버의 지랄맞은 성격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에리히 클라이버는 아들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지랄맞은 성격으로 당시에 유명했다. 이에 반해 푸르트벵글러, 뵘, 카라얀 등은 이미지와 달리 단원들은 이들을 무척 존경했다. 베를린 필과 빈 필 단원들이 푸르트벵글러에게 가진 존경심은 유명하며[6], 칼 뵘은 빈 필에서 아버지같은 존재로 통했다. 다만 리허설에서의 무자비함은 있었지만. 카라얀 역시 빈 필과 빈 국립 가극장 단원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빈 국립 가극장의 성악가들은 카라얀은 전혀 독재적인 지휘자가 아니며 성악가들의 컨디션을 누구보다도 잘 배려하는 배려심이 뛰어난 지휘자라고 칭송했다. 빈 성악가들은 카라얀은 개인적으로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의 목소리를 가진 성악가도 실제로는 전혀 차별하지 않았고 약간 역량이 떨어지는 성악가에게는 오히려 템포를 맞춰주는 등 성악가들에 대한 배려심이 뛰어난 지휘자였다고 말했다. 또 성악가들이 아프거나 컨디션이 안좋은 날에 카라얀은 즉흥적으로 템포를 조절해 가면서 성악가들을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카라얀은 빈 성악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어쨌든 당시 빈 성악가들은 에리히 클라이버를 기피했고, 이는 당시 빈 사람들에게 유명했다. 1955년 한번은 카라얀과 에리히 클라이버가 같은 날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빈의 주요 성악가들이 모두 카라얀 공연에 참석했고, 이 사건이 클라이버의 사망(자살)에 영향을 미쳤다는 소문도 있었다.

클라이버는 파시즘에 저항했다는 이미지와 달리 소련과 동구권 공산주의 독재 국가에서는 활발히 활동했다. 클라이버는 1927년 소련에 데뷔한 이래 소련에서 주기적으로 공연했으며, 베를린 국립 가극장을 사임한 이듬해인 1936년에는 소련 정부가 설립한 소련 국립 교향악단의 공동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다. 클라이버가 소련 국향에 취임하기 전인 1936년 1월 소련에서는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공산당으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은 유명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교향곡 4번 초연을 취소하고 당의 취향에 부합하는 교향곡을 급히 새로 작곡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클라이버는 힌데미트 사건과 달리 쇼스타코비치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저항을 표시하지 않았고 그해 10월 소련 국향의 공동 상임지휘자로 정식 취임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악단을 창단한 사람은 또다른 공동 상임지휘자였던 알렉산드르 가우크였고 실권은 가우크에게 있었다. 게다가 소련은 당시 스탈린의 대숙청이 진행 중이었다. 결국 에리히 클라이버는 취임한지 몇 개월만에 사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으로 돌아온 에리히 클라이버는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클라이버가 돌아오기 전에 체코와 헝가리 등 동구권이 공산화되었고, 라파엘 쿠벨릭, 게오르그 솔티, 조지 셀, 유진 오먼디 같은 여러 지휘자들이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않았지만, 에리히 클라이버는 그렇지 않았다. 클라이버는 공산화된 체코나 동독의 초청에 응해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등에서 여러차례 지휘를 했다. 1953년 동독으로부터 베를린 국립 가극장 음악 감독직을 제의받자 이에 응해 1954년 정식 취임했고 동베를린의 소련인 거주 구역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동독과 소련의 지나친 정치적 간섭으로 갈등을 빚고 취임한지 1년이 지나기도 전인 1955년 사임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사망했다.

카라얀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카라얀은 다른 음악가들에 대해 자신과 관계가 좋건 나쁘건 관계없이, 음악적 성향이 딴판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립서비스라도 좋게 말해주곤 했고, 특히 지휘 분야에서는 자신과 관계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존경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에 대한 진심어린 찬사와 존경심을 숨기지 않앗다. 에리히 클라이버는 카라얀이 비판적으로 말한 상당히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카라얀은 리처드 오스본과의 인터뷰에서 에리히 클라이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스본: 1947년에서 1948년까지 당신은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푸르트벵글러, , 크나퍼츠부슈 등에 비해 다소 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리히 클라이버가 남미에서 다시 돌아왔지요. 그는 영국에서는 언제나 큰 명성을 누렸고, 1950년대 코벤트가든 오케스트라는 분명 그와 함께 일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피아니스트 한 사람 - 남의 명성을 파괴하는 유명한 사람은 아니다 - 은 최근 내게 이런 말을 해주더군요. "그는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요. 사람들이 말하는 만큼 훌륭하지도 않았고요."
카라얀: 그는 정말 끔찍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각 신문에서는 그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와 '클라이버 다시 돌아오다'라는 헤드라인 기사들을 앞다투어 실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돌아오자, 국립 오페라단 총감독을 비롯하여 수많은 정부 각료들이 모두 정장을 하고 그를 영접하기 위해 공항까지 나갔습니다. 그는 공항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여기서 그는 이제 빈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이 도시의 음악계를 정화하기 위하여 돌아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친구 한 명이 신문에 난 기사를 내게 보여주더군요.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말이라곤 오직 그가 도대체 어떤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기에 그처럼 위대한 임무를 떠맡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의 첫 공연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지요. 양차 대전 사이의 기간에도 그는 베를린에서 커다란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연주에 크게 실망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극장의 감독 슈(Schuh)는 막간 휴식 시간에 혼자 앉아 있는 나를 보았지요. 그는 장난꾸러기 같은 재치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내게 오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내가 보기에 당신은 이 공연을 별로 즐기지 않는 것 같군요. 오늘 공연은 내게도 큰 충격입니다. 왜냐하면 에리히 클라이버의 지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치임이 틀림없다는 말이 지금 이곳에서는 너무도 잘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죠." - 리처드 오스본, '카라얀과의 대화', pp. 95-96


[복수전공] [2] musical play. 음악이 딸린 연극(희극)이다. 다만 뮤지컬이나 오페라처럼 음악이 주를 이루는 극이 아니고, 대부분 일상적인 대사로 이루어진 연극이며, 다만 연극 도중에 간간히 음악이 연주되는 정도다. [3] 엄밀히 말해 국립이 아니라 주립이지만 국내에서는 국립이라는 번역이 일반화되어 있는 상황 [4] 라 스칼라 가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었다는 이전 서술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5] DECCA는 1950 ~ 60년대 동안 빈 필과 독점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빈 필과 손쉽게 녹음이 가능했었다. 그래서 게오르그 솔티, 이스트반 케르테츠 등 DECCA 소속 신예 지휘자들이 빈 필과 여러 음반들을 녹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빈 필을 놔두고 굳이 쾰른 방송 교향악단을 주선해서 모차르트 춤곡을 녹음했다는 것은 에리히 클라이버에 대한 DECCA의 대우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6] 물론 당시에 빈 필에서는 소수의 푸르트벵글러 반대파가 있긴 했다. 허나 어느 조직에서도 반대파를 가지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반대파에도 불구하고 푸르트벵글러와 빈 필의 관계는 매우 원만했고 푸르트벵글러는 빈 필을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