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알브레흐트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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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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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라인베르거 (1931~1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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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알브레흐트 (1933~1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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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 스체판 (1934~1939) |
독일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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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에른스트 알브레흐트 Ernst Albrech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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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7년
11월 12일 / 독일 제국, 뒤셀도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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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6년
3월 26일 (향년 68세)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뒤셀도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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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독일 | |
신체 | 169cm, 66kg | |
직업 | 축구선수(라이트 하프백, 아웃사이드 라이트 / 은퇴) | |
소속 | 선수 |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1923~1947) |
국가대표 | 17경기 4골( 서독 / 1928~1934) |
1. 개요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시절[1] 활약한 축구선수.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서만 약 24년간 뛴 뒤셀도르프의 레전드이다.2. 생애[2]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알브레흐트는 뒤셀도르프의 플링에른 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23년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 입단했고 1924년 1군 무대에 데뷔했다. 하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은 건 1927-28 시즌이었다.포르투나 뒤셀도르프는 당시 니더라인 지역에서 손에 꼽힐만한 강팀이었고, 알브레흐트 역시 주축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가울리가[3] 니더라인에서 5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포르투나에서의 최고의 순간은 단연 1933년 샬케를 꺾고 독일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하지만 알브레흐트는 부상으로 결승전에 참가하지 못해 개인에게는 아쉬움이 남는 순간이기도 했다. 1936년, 포르투나는 다시 우승의 기회를 잡았지만 결승전에서 뉘른베르크에 1대2로 패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2차 대전 이후에는 뒤셀도르프 SC, 빅토리아 02 등 여러 팀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뛰기도 했다.
2.1.2. 국가대표
알브레흐트는 1928년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곧 1928년 올림픽에 참가했지만 독일은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에 8강전에서 1대4로 대패했다. 1933년에는 독일 대표팀 주장을 맡기도 했고 그의 대표팀 마지막 시합은 월드컵 예선 룩셈부르크전이었다.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알브레흐트의 자리는 에른스트 레너가 대체했지만 알브레흐트 역시 명단에는 포함되었다. 그는 경기 출전 없이 후보로 월드컵에 참가했고, 월드컵을 끝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2.2. 이후
축구계에서 은퇴한 이후론 뒤셀도르프에서 복권 판매점을 운영하였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빠르면서 책임감 있는 윙 플레이어.4. 수상
4.1. 클럽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우승 1회: 1933(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36(포르투나 뒤셀도르프)
- DFB 포칼 준우승 1회: 1937(포르투나 뒤셀도르프)
- 독일 서부 리그 우승 1회: 1931(포르투나 뒤셀도르프)
- 가울리가 니더라인 우승 5회: 1935-36, 1936-37, 1937-38, 1938-39, 1939-40(포르투나 뒤셀도르프)
4.2. 국가대표
4.3. 주대표
- 라이히스분더포칼 우승 1회: 1937(니더라인)
[1]
정확히 말하면
연합군 점령하 독일까지 포함.
[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3]
나치 독일 시대의 최상위 지역 리그. 여기에서 우승하면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 나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