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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8 03:28:46

양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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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제주 양씨
출생 1915년 4월 13일
전라남도 제주군 구우면 한림리
사망 1949년 8월 11일
제주도 제주군
정당
[[남조선로동당|
파일:남로당_노랑.png
]]
묘소 4.3 평화공원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2.1. 일제강점기2.2. 4.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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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가이며 광복 후 남조선로동당원으로 제주 4.3 사건에 가담하였다.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1930년에 일본 오사카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1931년에 돌아왔다. 제주도(濟州島) 한림면(翰林面)에서 고갑선(高甲善) 등과 함께 사회주의자 이익우(李益雨)의 지도를 받고 1931년 말경 이들과 함께 한림독서회(翰林讀書會)를 조직했다. 1932년 6월 하순경 운동자연구회(運動者硏究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청년부(靑年部)를 맡았다. 출처

1932년 10월 중순경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 결성의 준비로 제주의 각 리(里)에 반(班)을, 각 면(面)에 지부(支部)를 설치하고, 외곽단체로 각 리에서 농민위원회(農民委員會)를 조직해 각각의 반(班)을 두어 지도하기로 했다. 그 준비로서 새로 ‘운동자연구회’라는 결사를 조직하여 위의 운동자연구회와 마찬가지로 책임부서와 담당을 정했다. 같은 해 말경 한림면의 민풍진흥회(民風振興會)에 가입하고, 그 총무를 설득하여 함께 구우면장(舊右面長)이 주창한 ‘도로 확장수리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34년 2월 민풍진흥회를 통해 ‘도로수선 무상부역 반대, 면 당국이 지정한 공동목야 설치 반대, 한림 축항공사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7월 구우면 명월리(明月里) 수박밭에서 김경봉 등과 함께 한림리 적색노동조합 및 농민조합 결성을 위한 준비로 ‘노농연구회(勞農硏究會)’라는 결사를 조직하고, 농민부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농민부는 주로 농민청년을 규합하여 독서회를 조직하고 이들을 전위부대로 양성하는 데 치중하였다. 출처

이렇게 활동하던 중 1934년 10월경 제주경찰서(濟州警察署)에 체포되었다. 12월 28일에 동지 60여 명과 함께 목포검사분국으로 송치되었다. 여섯 차례의 공판 끝에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 목포지청(木浦支廳)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처

이후 광복 시까지 별다른 활동 없이 제주도에서 조용히 지냈다.

2.2. 4.3 사건

8.15 광복 남로당에 가입해 좌익 활동을 전개했다.

4.3 사건 진행중인 1949년 8월 11일 다른 남로당원과 함께 국군 제2연대에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라며 체포된 후 총살형에 처해졌다. 출처

그가 4.3 사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등에서는 찾을 수 없다. 위 출처 링크는 4.3 사건 당시 인민유격대에게 살해당한 유족회인데,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양병시는 남로당 인민유격대로서 한림장날인 1948. 5. 14. 한림지서를 습격했다. 출처 따라서 그가 서훈을 받은 것을 일부 우익 유튜버나 일부 인터넷 커뮤 사용자가 문제삼고 있다. 그런데 출처가 신뢰성있는 곳인지 의문이라 자료가 더 필요한데, 일단 대중이 인터넷으로 접근할 수 있는 4.3 사건 행적에 대한 자료는 이외에는 거의 없다.

같은 4.3 사건 당시 사회주의자라도 이경선 김달삼을 야단쳤다, 4.3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탈출해 일본으로 피난갔다가 월북했다는 해방 후 행적에 대한 구체적 기사를 내는데 양병시는 2023년 4월 제주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뽑혔으면서 해방 후 행적에 대한 구체적 기사를 전혀 안 낸다.

그가 빨치산이었다고 해도 빨치산으로 서훈받은 게 그 혼자만은 아니고 다른 빨치산도 서훈을 받았다. 정치성향을 다 떠나서 빨치산에게 서훈을 줬으면 조선공산당, 남로당원에게 전격 서훈을 개방하든가 누군 주고 누군 안 주는 공정성과 형평성이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