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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4:40:16

안익조

안익조 安益祚 (Eak-Joe Ahn)
1903년 ~ 1950년 11월 7일 (향년 47세)

1. 개요2. 생애

1. 개요

일제강점기의 군의관, 친일반민족행위자. 대한민국 경찰공무원, 군인이다.

작곡가 지휘자 안익태의 형이다.

2. 생애

1903년[1]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태어났다. 평양제일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 고치고등학교(現 고치대학), 1929년 3월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수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해 1933년 7월 10일 학사시험에 합격해 졸업했다.

야구와 음악에 조예가 있었다. 일본 유학 중에는 동경유학생야구단에서 야구선수로 활약하면서 야구단가(歌)를 작곡했고, 경성제국대학 재학 시절에는 교내 만돌린 구락부 지휘자로 활동했다. 경성제국대학 졸업 후 1935년 경기도 경성부 장곡천정(現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일본축음기상회에서 근무하다가 일본 컬럼비아레코드회사로 자리를 옮겨 경성지점 문예부장으로 근무하면서 게이오기주쿠대학 만돌린 구락부의 지휘자로 취임했으며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독창을 선보이기도 했다.

1937년에는 만주국군의 군의관 소좌 근무했으며 1939년 11월 퇴직했다. 1940년 연예계로 복귀해 콜럼비아 악극단을 경영하고 1941년 1월에는 극작가 최연(崔然) 등과 함께 경성부에서 조선연예기업사라는 악극단을 창단했다. 1941년 5월에는 자신이 대표로 있던 신흥악극단의 이름을 와카쿠사(若草)악극단으로 바꿨다. 1943년에는 연예계를 접고 후생의원을 개업했다.

8.15 광복 경찰공무원에 입직해 경감에 올랐으며, 1947년 5월 30일부터 1948년 3월 14일까지 제7대 군위경찰서장을 지냈다. 1948년 9월 21일에는 내무부 치안국 3관구( 충청남도)경찰청 부청장에 임명되었다. 1949년 6월 29일 육군본부 특별명령 제131호에 의해 육군 헌병 소령으로 특별 임관했다. 군번은 15113. 1950년 3월 21일에는 제130부대 헌병대장으로서 이른바 충무사(忠武士)라는 정보원을 공식적으로 해체하고 신분증을 회수했으며, 전국적으로 가짜 장교, 가짜 헌병, 가짜 정보원 등이 횡행하는 것에 대해 적발했을 경우 즉시 처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제7보병사단 헌병대장( 중령)으로 재직 중이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 6월 28일 서울특별시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되자, 군무이탈을 범해 7월 3일 조선인민군 군사비밀조사위원회에 자진출두하여 자신의 집을 이들의 사무실로 제공했다. 그리고 9월 27일까지 자신이 숨겨 둔 기관단총, 권총, 장총 각 1정과 실탄 300발을 자진 제공하는 한편,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및 서울특별시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던 대한민국 국군의 전투상황과 그 지역에 집결한 부대 상황을 제공하는 등 부역하였다. 이후 인천 상륙 작전 9.28 서울 수복 이후 부역자로 체포되었고, 1950년 10월 28일 계엄사령부 계엄고등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제32조, 형법 제77조 내란방조 위반, 계엄고등군법회의 명령 제25·26·27·28·29·30·31·32호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고 1950년 11월 7일 서울특별시 교외 모처에서 총살형 처해졌다.

만주국군 이력으로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군 부문에 수록되어 있다.


[1] 1949년에 47세라고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