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兀良哈·阿术,[1] 1234~1287수부타이의 손자이자 우량카다이의 아들이다.
업적으로 아버지 우량카다이와의 대리국 정복과 베트남 정벌, 몽송전쟁이 있다.
2. 생애
그는 몽케 칸 시기 아버지 우량카다이를 따라 대리국을 점령한 뒤 서쪽에서 남송의 만리 원정을 우회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척후기를 이끌며 개척자 역할을 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압적성[2]을 공격할 때, 아술은 군대를 이끌고 비밀리에 잠입했고, 건덕고성[3]에서는 아버지 우량카다이가 병이 들어 아술에 군사에 관한 일을 위임했다. 아술은 기대에 부응하여 부대를 이끌고 성을 격파하고, 화합인, 아합아인[4]에서 아술이 먼저 올라하여 삼성을 취하고, 수가산채[5]를 공격하여 승승장구하여 노로덕국[6]을 점령한다. 이에 아백국이 항복을 청하였다. 이후 아버지 우량카다이와 함께 광서 지역을 통해 호남성 지역의 담주까지 북상했으나[7] 상사벽에게 야습을 당해 위기에 놓이자 우량카다이의 도움으로 남송군 대부분을 몰살시켰다. 그러나 상사벽이 성 안으로 도망치고, 상사벽을 위시한 담주 군민들의 악전고투로 인해 담주를 점령하지 못한 채 쿠빌라이 칸이 북상하자 이에 따른다.1261년 쿠빌라이가 즉위한 뒤에는 숙위에 임명되고, 산동 지역의 이단을 지원하여 연수를 수복한다. 1262년에는 이단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한다. 같은 해 9월 숙위장에서 정남도원수로 관직을 옮겨 개봉에 주둔했다.
제4차 양양 전투에 참전했고 1274년 양라보[8]를 함락시킨다.
뒤이어 1275년에는 가사도가 이끄는 13만 군대를 무호에서 격파한다. 가사도가 사신을 보내 화의를 청하였을 때 바얀은 진군을 멈추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쥬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사도를 공격하지 않으면 이미 항복한 주군을 올 여름에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게다가 송나라는 신의를 지키지 않고, 화해를 구하러 왔고, 또 우리 군선을 쏘아 우리 순찰 기병을 체포했습니다. 지금은 진군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실수가 있다면, 죄는 제가 짊어질 것이옵니다.
이에 원나라의 군대는 정가주로 진격하여 송군의 선봉 손호신과 대전했고
하귀는 전함 2,500척을 이끌어 가사도가 이끄는 장병을 지원했으나 양군 대전에서 송군은 크게 궤멸했다.그 이후 세조는 송나라의 병사들이 모두 양주에 주둔하는 것을 보았고, 임안의 남송 조정은 이를 장벽으로 삼았다. 4월에는 아쥬로 하여금 양주를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4월 19일, 원군이 진주에 도착하여 주금사에서 송군을 물리치고 2,000급 이상을 참하였다. 대군이 양주에 도착한 후, 과주에서 전투선과 무기를 만들고 진주에서 식량을 운송했다. 송군 도통 강재는 기마군 2만 명을 이끌고 공격하였으나 패했다. 아쥬는 이 전투에서 부장 장림을 체포하여 1만 8천 급을 참한다.
이후 7월 1일 남송의 장세걸과 손호신이 10,000척의 배를 이끌고 초산의 동쪽에 주둔하였는데, 이 때 배를 쇠사슬로 묶어 놓고 있었다.[9] 아쥬는 석공산에 올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화공을 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강건하고 능숙한 군사 천 명을 선발하여 거함을 타고 병사들을 두 부대로 나누어 협공하였다. 아쥬가 가운데 진격하여 불화살을 쏘아 불을 질렀다. 화염이 하늘을 뒤덮었고, 송나라 병사의 배가 움직이기 불편하여 전군은 물에 빠져 죽고 후군은 도망쳤다. 아쥬는 도산까지 추격하여 700척 이상의 황곡선을 노획한다. 그 이후 송군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10월에는 중서좌승상으로 임명되었고 회남에 주둔하여 이정지를 상대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대군이 임안에 오고, 아쥬는 과주에 주둔하여 양주의 지원군을 차단했다. 이로써 바얀은 혈전 없이 송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고 아쥬는 과주에서 양주의 남송 지원군을 통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276년에는 회서 지역의 사령관 하귀가 회서 지역의 성들을 바치고 투항하자[10] 이를 받은 뒤 제장들에게 말하였다.
송은 망하였는데 이정지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 그 원병을 끊고 양도를 막으면 동으로 통주, 태주로 건너가 강바다로 도망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정지와
강재가 지키던 회동 지역을 점령한다.[11]9월 30일, 조정에 들어가 세조를 뵈었고 세조는 아쥬의 공로를 인정하여 태흥현 2,000호에 봉하였다.
1287년 5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고 하남왕에 추봉되었다.
3. 평가
아술의 일생은 남정북토 40년 동안 다소 150회의 싸움에서 패한 적이 없다고 말해 보기 드문 장수임을 입증했다.4. 기타
- 그의 아버지 우량카다이는 쿠빌라이 칸 시기 중용을 받지 못하였지만[12] 아쥬 본인은 쿠빌라이 칸 시기 중용을 받았다.
5. 대중매체
- 징기스칸 4 챕터 2에서 원나라 소속 장수로 등장한다. 오논의 대기장수로 스타팅하며, 능력치는 정치 26, 전투 84, 지모 36으로 수부타이의 손자답게 전투력이 매우 강력하다. 하지만 정치와 지모가 매우 낮은게 흠이다. 내정특기는 없으며, 전투특기로 돌격, 공성이 있다. 병과적성은 보병: B, 궁병: B, 기병: A, 수군: D로 병과적성 역시 할아버지인 수부타이와 비슷하다.[13] 전형적인 맹장형 장수이므로 전장, 특히 공성전에 투입시키면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1]
몽골어: Ажу
[2]
지금의
운남성
곤명시이다.
[3]
지금의 징강
[4]
현재의 곡정경
[5]
현재의 소통경
[6]
오늘날 티베트 지역이다.
[7]
정강성을 지키던
이증백에 의해 가로막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북상했다.
[8]
오늘날 호북성 무한시 신주구 양라진이다. 또다른 이름은 무기보이다.
[9]
10척의 배가 쇠사슬로 1대씩 연결되어 있었다.
[10]
《
신원사》에 수록된 하귀 열전에는 그의 투항이 2월로 기록되어 있지만, 《평송록》과 《
송사》이정지 열전에는 하귀의 투항이 3월로 기록되어 있다.
[11]
이정지와 강재는 양주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 부장 주환이 성문을 열어 성이 함락되고 만다.
[12]
우량카다이가 상도에 이르러 병권을 회수당하였다.
[13]
수부타이의 병과적성은 보병: B, 궁병: B, 기병: S, 수군:E로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