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足尾鉱毒事件(足尾銅山鉱毒事件)19세기 말 메이지 시대의 일본 제국 도치기현에 위치한 아시오 동광(銅鑛)에서 발생한 환경 재해. 일본 최초의 대형 공업재해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21세기에도 꾸준히 후유증을 남기는 대형사고다. #
2. 아시오 광산
지금의 도치기현과 군마현 경계를 흐르는 와타라세강 주변에 위치한 아시오 동광산은 막대한 구리가 매장되어 있어 센고쿠 시대 후기인 16세기 중반부터 처음 채굴이 시작되어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힐 만큼 많은 구리가 산출되고 있었다.[1] 하지만 막부 말기에 이르러서는 산출량이 극도로 악화되어 에도 막부는 이 광산을 폐쇄한 상태로 방치해 두었다.이런 상태에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후인 1877년 후루카와 이치베에(古河市兵衛)가 경영하던 후루카와 광업은 신정부로부터 아시오 광산을 사들여 다시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서양의 최신식 광맥탐사와 채굴법을 도입한 후루카와는 1885년에 대규모 동광맥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고 아시오 광산은 해마다 일본 전체 산출량의 1/4를 생산하는 엄청난 규모의 광산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했다.
3. 광독의 발생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광산 주변의 산림과 주변 농지의 작물들이 갑자기 말라죽었고 1887년에는 와타라세강의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해 물 위로 떠오르는 사건이 발생했다.그해 가을 도쿄전문학교에서는 '광독'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즉, 광산에서 구리를 제련할 때 발생한 부산물이 문제가 된 것인데 제련할 때 발생한 연기에는 이산화황이 포함되어 있었고 제련에 사용된 공업용수에는 그 과정에서 온갖 중금속이 녹아들어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산화황이 비구름이 되면서 엄청난 농도의 산성비가 광산 주변과 강에 퍼부어졌고 중금속이 녹아 있는 공업폐수는 사후 처리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으로 무단방류된 것이다.
결국 오염된 강에서 사는 물고기와 오염된 강에서 물을 끌어와 기른 농작물을 먹는 주민들은 광독에 중독되었고 광독으로 죽지 않더라도 별 것 아닌 비로 일어난 홍수로 죽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4. 사고 처리 경위
세월이 더 지나 1890년 여름에 이르면 이미 나무가 전부 죽어버린 산에 비가 내리면서 심각한 수준의 산사태와 홍수 피해가 발생하게 되었다. 피해를 입은 각 마을에서는 후루카와에게 손해 배상과 제련소 이전을 요구하고 이를 현지사에게 건의하기로 결의했다. 그 결과 1897년에는 광산에 광독을 중화할 장치를 설치할 것을 후루카와 측에 지시했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이후 각 촌과 도치기현 중의원인 다나카 쇼조(田中正造) 등이 항의를 계속했지만 정부는 주민들의 요구를 묵살했으며 오히려 1900년 2월에 광독 피해 주민들을 폭도로 몰아 탄압했는데 100여 명이 체포되고 그 중 51명이 재판을 받아 치안경찰법이 적용되어 19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1892년과 1901년에 이루어진 조사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피해를 입은 마을만 없애 버리고 주민들은 강제로 이주시키는 행정조치만 이루어졌다.[2]
다나카 쇼조는 제국의회에서 한 발언이 정부에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자 1901년 중의원 의원을 사직하고 메이지 덴노에게 직접 상소를 올렸다가 저지당한 뒤 관리 모독죄로 감옥에 들어갔다.[3] 그나마 다나카에 대한 구제 운동이 일어나면서 이 사건에 대한 관심도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초에 정부에서 후루카와 재벌에 확실한 조치를 취할 것을 강제적으로 지시함에 따라 어느 정도 사건은 마무리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정부의 피해 토지 강제 매수 등 절차에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다나카 쇼조는 전 재산을 탕진해 가면서 재판이나 항의 연설 등을 계속하다가 1913년 8월 2일에 후원자의 집에서 지병인 위암이 악화되어 객사하였다. 향년 72세.
최종적으로 아시오에서 광산이 폐업한 것은 1973년으로, 이후 광산 주변 2개 현과 도시가 후루카와 광업과 공해방지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후루카와가 농지 상태 개선과 수질검사를 책임지고 실시하도록 합의하게 되었지만 그때까지 꾸준하게 방류된 중금속은 아직도 강바닥에 퇴적되어 있는 상태로, 현재까지도 많은 비가 내리거나 강에 영향을 주는 사고가 발생하면 강바닥이 뒤집혀 중금속이 수면으로 떠올라 순식간에 환경 기준치를 초과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4]
5. 미디어에서
-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만화 왕도의 개 3권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되며 다나카 쇼조 역시 조연으로 출연한다. 작중 연도가 1890년으로 다나카는 도치기 현의회 의장 신분으로 등장하며 이후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고 언급된다.
- 아라카와 히로무의 백성귀족에서 언급되는 작가의 증조할아버지 아라카와 요사쿠가 다나카 쇼조와 함께 광독 사건으로 항의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경찰과 몸싸움을 하다가 경찰을 논에 메다꽂기도 했다고. 결국 영장이 나와서 쫓기게 되자 가족들을 이끌고 홋카이도로 이주해 거기서 농원을 차렸다고 한다. 작가는 경찰을 피해 도망쳐 왔다는 이야기에 "범죄자였잖아!" 라고 외쳤지만 이 사건의 실태를 감안하면 "범죄자"보단 차라리 의인에 가깝다. 이 사건의 실태와는 별개로 사실 국가 행정력이 확고하지 못하던 근대나 현대 초기까지 범죄자나 반정부 인사 등이 변경에 아무렇지도 않게 정착하는 경우는 꽤 흔하다. 미국의 서부개척시대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 에가와 타츠야의 만화인 <러일전쟁이야기>[5]에서도 이 사건이 언급된다. 현지를 시찰하러 와 광독으로 강이 썩고 나무들이 선 채로 죽어 바싹 말라 있는 풍경과 살려달라고 애원하다가 결국 마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촌민들을 외면하며 "경치는 한 푼도 되지 않지!" 하고 단언하는 무쓰 무네미츠의 태도가 일품이다.
[1]
현대 도량형으로 환산한 에도 시대 아시오 광산의 연간 채굴량은 1천
톤을 초과했으며
일본은 물론
동아시아 최대 구리 산지로 꼽혔다.
[2]
세계 열강에 진입하기 위해 있는 것 없는 것 가리지 않고 전력을 쥐어짜내던 당시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 공업 기반은 물론 수출 자원이 되는 구리의 생산을 절대 포기할 리가 없었다. 광산에서 나오는 이익에 비하면 '사소한' 주민 피해 따위는 신경 써줄 가치도 없는 일이었으며 광산 소유주인 후루카와 이치베에는 정계의 거물이자 당시
농상무대신이었던
무츠 무네미츠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들인 관계였다.
[3]
이때 압수당한 직소장은 무려 113년 후인
2014년에야
아키히토에게 전달되었다.
[4]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이 일어난 후에도 와타라세강에서 기준치를 넘는
납이 검출되었다.
[5]
명성황후 문서에 삽화로 등장한 그 만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