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기 고르간에 대한 내용은 곤바데카부스 문서 참고하십시오.
시가지 전경
구도심 전경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도시 گرگان 고르간 | Gorg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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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골레스탄주 | |
면적 | 1,700km² | |
인구 | 198,845명 (2016년) | |
주 인구 | 1,868,819명 (2016년) | |
인구밀도 | 117명/km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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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 동북부 골레스탄 주의 주도. 테헤란에서 동북쪽으로 300km 떨어져 있고, 인구는 35만명이다. 옛 지명은 아스트라바드 (Esterabad) 이다. 본래 고르간은 동북쪽의 곤바데카부스를 지칭하는 지명이었지만, 해당 도시가 몽골의 침공으로 파괴된 후 아스타라바드가 고르간으로 불리게 되었다. 중세 시기 아스트라바드는 비단 생산 도시이자 실크로드 교역의 거점 중 하나로 번영하였다. 근대 이전의 출신 인물들은 아스타르바디란 호칭이 붙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나디르 샤의 참모였던 미르자 메흐디 칸, 20세기 여성운동가 비비 카눔 등이 있다.[1]구도심에는 금요 모스크와 여러 박물관, 저택, 정원, 시장 등의 옛 건축물이 다수 남아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띈다. 교통 수단으로는 서북쪽 외곽에 기차역과 서북쪽 5km 지점의 고르간 국제공항이 있다. 골레스탄 주의 중심지여서 대학이 많은 편이다. 도심에 골레스탄 대학교, 서쪽 외곽에 파얌누르 대학과 알무스타파 대학의 고르간 캠퍼스, 서북부에 파르헨기얀 대학교 고르간 캠퍼스, 북쪽 외곽에 아자드 이슬람 대학교 고르간 캠퍼스가 있다. 카스피해와 약 25km 떨어진 덕에 기후는 온화하여 여름에 35도를 잘 넘지 않고, 겨울에도 영하로 잘 떨어지지 않는다.
2. 역사 : 아스트라바드
11세기 지여르 왕조 시절에 세워진 자메 모스크의 미나렛 | 아가 모하마드 칸 궁전 |
2.1. ~중세 초기
시가지 서부의 사산 제국기 칸단 성채 유적
기원전 5천년 경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고대 히카르니아의 중심지였던 자드라카르타가 이곳 혹은 사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마이야 왕조 시기인 716년, '옛 고르간'을 함락한 호라산 총독 야지드 빈 무할랍이 본격적으로 도시를 세우고 아스트라바드라 명명하였다. 중세 지리가 이븐 하우칼은 아스트라바드를 고르간 지역의 4대 도시 중 하나로 기술하였다. 압바스 왕조가 혼란에 빠진 9세기 후반, 고르간 지역은 타바리스탄에 기반한 자이디 쉬아 세력인 알라비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타히르 왕조가 멸망하고 사파르 왕조가 약화된 880년대에 호라산을 장악한 군벌 라피 빈 하르타마는 889년 아스트라바드를 포위하였고, 1년 간의 공방전 끝에 알라비 군주 무함마드 빈 자이드는 패퇴하였다. 다만 라피 역시 칼리파 알 무타디드에 의해 896년 소탕되었고, 10세기 초엽 일대는 사만 왕조령이 되었다가 다시금 알라비 조의 영토가 되었다.
2.2. 10세기의 혼란
920년대 알라비 조는 내전에 돌입하였다. 923년 알라비 군주 자파르는 빈 하산은 자신의 즉위를 도운 다일람계 장인 마칸 빈 카키를 아스트라바드에 기반한 고르간 총독으로 봉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자파르가 사망하며 재차 내전이 터졌고, 마칸은 자파르의 아들 이스마일을 제위에 올렸으나 다른 다일람계 권신 아스파르 빈 쉬루야에게 패하여 고르간마저 상실하였다. 산지에 은둔하던 마칸은 927년 아스파르가 옹립한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이미 두 차례 폐위되었던 하산 빈 카심을 복위시켰다. 다만 고르간은 여전히 아스파르의 수중에 있었고, 마칸과 하산이 사만 왕조령 레이를 점령하러 떠난 틈에 타바리스탄을 점령하였다. 아스파르는 사만 왕조의 나스르 2세와와 동맹하여 레이까지 점령, 더 나아가 살라르 왕조까지 멸하려 했으나 도중 부장 마르다비즈에게 암살당한다. 한편 930년 아스파르의 부재를 틈타 마칸은 타바리스탄과 고르간을 수복하고 나스르와 맞섰다.931년 지여르 왕조를 세운 마르다비즈는 타바리스탄을 공격하였고, 이에 마칸은 나스르와 휴전하고 맞섰으나 패퇴하였다. 마칸은 나스르에게 망명하였고, 이라크 진격을 염두에 둔 마르다비즈는 고르간을 사만 조에 할양하며 휴전하였다. 할양된 고르간의 총독으로 봉해진 마칸은 935년 마르다비즈가 피살되자 타바리스탄을 공격했으나 지여르 군주 부슘기르에게 격퇴되어 역으로 고르간 지역을 상실하였다. 다만 부와이 왕조에 대처해야 했던 부슘기르는 마칸에게 고르간을 되돌려주었다. 이후 마칸이 자립하려 들자 939년 사만 군대가 아스트라바드를 포위하였고, 7개월 간의 공방전 끝에 마칸은 레이로 도주하다가 전사하였다. 그후 지여르 왕조의 지배 하에 놓였고, 956년 지진으로 파괴를 겪은 도시는 981년 부와이 왕조의 왕공 파크르 앗 다울라에게 점령되었다. 당시 시타델 (칸단 성채)가 파괴되었고, 해자는 매워졌다. 이로써 아스트라바드는 쇠퇴하였고, 고르간에게 밀리게 되었다.
2.3. 고르간 '지역'의 중심
1018년 지여르 시기에 지어진 자메 마스지드 (금요 사원)
시내의 옛 저택. 현재는 공예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984년 파크르 앗 다울라는 사만 조에서 망명해온 아불 압바스 하집타쉬에게 고르간과 아스트라바드를 영지로 주었으나, 3년만에 사망한다. 그리고 997년 파크르 앗 다울라 역시 사망하자 지여르 왕조의 카부스가 일대를 수복한다. 1042년 일대는 셀주크 제국령이 되었고, 12세기에는 바반드 왕조 령이 되었다. 그러던 1159년 아스트라바드 현지의 쉬아와 순니 주민들 간 충돌이 벌어졌고, 바반드 군주 샤 가지 로스탐은 본인이 쉬아였음에도 쉬아 주동자들을 벌하며 질서를 회복하였다. 13세기 고르간이 조지아와 몽골의 침공으로 파괴되자 아스트라바드가 일대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15세기 티무르 제국이 쇠퇴하자 고르간 지역에는 중앙아시아 출신 튀르크멘이 대거 유입되었고, 16세기 초엽 우즈베크 칸국이 아스트라바드에 고르간 총독을 두었다. 1511년 이스마일 1세가 우즈벡 세력을 축출하고 일대를 사파비 제국에 편입하였고, 이로써 안정이 회복되었다. 18세기 아스트라바드는 카자르 튀르크멘 부족의 중심지가 되었고, 1742년 아스트라바드에서 탄생한 아가 모하마드 칸은 이란을 통일하고 카자르 왕조를 세웠다. 따라서 따라서 카자르 시기 아스트라바드는 중시되었고, '다룰 모메닌'이라는 별칭과 함께 종교적인 도시로 유지되었다.
2.4. 근현대 : 고르간
팔라비 왕조 12궁 중 하나인 고르간 궁전. (현 궁전 박물관)
2012년에 세워진 고르간 타워 |
20세기 초엽 아스트라바드는 여러개의 성탑과 5개의 성문을 지닌 진흙 벽돌 성벽으로 둘러져 있었으나, 오랫동안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아 튀르크멘 부족들의 약탈에 취약하였다. 팔라비 왕조 시절 아스트라바드는 시가지 정돈과 함께 고르간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3. 갤러리
누르 이맘자데 영묘
아가 모하마드 칸 궁전
도심부 전경
팔라비 왕조 시절 궁전 (현 궁전 박물관)
[1]
고르간에서 유래된 고르가니 혹은 주르자니는 중세의 고르간 (현 곤바데카부스) 출신 인물 혹은 고르간 지역 (골레스탄) 출신을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