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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 왕조의 아미르 & 술탄 | ||||
9대 아부 사이드 우스만 2세 | → | 10대 아부 알 하산 알리 | → | 11대 아부 이난 파리스 |
1. 개요
أبو الحسن علي بن عثمان아불 하산 알리 빈 우스만[1]
생몰 1297년경 ~ 1351년 5월 24일
재위 1331년 8월 ~ 1348년 봄
마린 왕조의 10대 군주. 안정된 국력을 바탕으로 대외 팽창에 나섰다. 1333년 카스티야로부터 지브롤터를 점령하였고 1337년에는 2년 간의 포위 끝에 틀렘센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1339년 타리파 포위는 실패했으며 1340년 리오 살라도 전투에서 카스티야-포르투갈 연합군에 패배, 이후 안달루스에 개입하지 않아 1344년 알헤시라스를 카스티야에 잃었다. 다시 마그레브로 눈을 돌린 그는 하프스 왕조의 내분에 개입하여 1347년 튀니스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반란과 흑사병으로 이듬해 철수하는 과정에서 함대가 난파하였고, 틀렘센의 자얀 왕조 복원과 함께 아들 파리스가 반란을 일으켜 사실상 폐위당하였다. 1350년 파리스에게 패배한 알리는 공식적으로 아들에게 양위한 후 아틀라스 산지에 숨어 살다가 이듬해 사망한다. 그의 치세는 마린 왕조의 전성기이자 쇠퇴의 징조가 나타난 시기로, 실패한 정복 군주라는 면에서 과거 안티오코스 3세와 비견된다.
2. 치세
아불 하산 알리 빈 우스만의 디르함 은화 & 디나르 금화 |
아부 사이드 우스만 2세와 에티오피아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검은 피부로 인해 '모로코의 흑인 술탄'으로 불렸다. 1331년 즉위한 그는 부왕의 결혼 동맹 정책에 따라 하프스 왕조의 군주 아부 바크르 알 무타와킬의 딸 파티마와 결혼, 틀렘센의 자얀 왕조에 대한 양국의 공동 전선을 구축하였다.
2.1. 지브롤터 점령 (1333년)
자얀 왕조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알리는 그라나다 술탄 무함마드 4세의 파병 요청에 응하였다. 1333년 2월, 알리는 비밀리에 아들 압둘 말리크 압둘 와히드 휘하 7천 병력을 파견하였다. 알헤시라스에서 무함마드 4세의 안달루스 병력과 합류한 압둘 와히드는 곧바로 1309년 카스티야에게 상실한 지브롤터 (메디나탈 파스)를 포위하였다. 당시 카스티야는 국왕 알폰소 11세의 대관식과 내분 때문에 신속한 대응을 하지 못하였고, 연합군은 지브롤터를 완전히 봉쇄하였다. 지브롤터 수비대는 완강히 저항하였지만 보급을 받지 못한 탓에 6월 중순에 이르면 식량난에 시달렸다.[2] 식량이 바닥나자 주민들과 병사들은 방패, 허리띠, 신발의 가죽을 벗겨 먹으며 버텼다. 결국 6월 17일 수비대장 바스코 페레즈[3]는 수비대의 안전 철수를 대가로 항복하였다. 압둘 말리크는 약속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수비대의 충성심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그들이 무기를 들고 명예롭게 철수하도록 해주었다.1333년 여름, 제4차 지브롤터 공방전
세비야에서 작전 회의로 8일간 지체한 알폰소 11세는 헤레즈 진영에서도 귀족들과 충돌하며 시간을 보냈고, 6월 20일 지브롤터의 항복 소식이 당도한 후에야 카스티야 군은 남하를 지속하였다. 아직 마린 조의 입지가 확고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알폰소 11세는 알폰소 조프레 데 테노리오 휘하 해군을 파견하며 지브롤터 수복에 나섰다. 26일 카스티야 군이 지브롤터 부근 카스테야르에 당도하자 알헤시라스에 있던 압둘 말리크 역시 6천 병력과 출정, 해안을 따라 지브롤터로 행군하였다. 압둘 말리크는 고지대의 카스티야 군을 해안 저지대로 유인하여 도중에 매복하려 하였지만, 알폰소가 병력을 나눠 포위하자 패하고 5백여 전사자를 내었다.[4] 카스티야 군은 알폰소의 제지에도 압둘 말리크를 추격하다가 마린 군의 나머지 부대의 반격에 직면했으나 강을 거슬러 온 카스티야 함대에 의해 구원되었다. 밤이 되자 양측은 진영으로 돌아갔다.
며칠 후 카스티야 군은 지브롤터의 취약한 남쪽 성벽을 공략하기 위해 해변에 상륙했는데, 2차 상륙군을 엄호해야 할 1차 상륙군이 곧바로 성을 향해 진격하는 바람에 2차 상륙군은 수비대의 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하였다. 1천 5백의 1차 상륙군 역시 포위 섬멸되었고, 지휘관 루이 로페즈와 페란 야네스 데 메이라 모두가 전사하였다. 그후 압둘 말리크는 해안에 기병대를 배치하고 접근하는 선박에 화살 세례를 퍼붓게 하여 더이상의 상륙을 저지하였다. 풍향의 불리함과 1일치 식량만이 남은 악조건에 알폰소는 지브롤터 포위망의 병사들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철수하였다. 다만 얼마 후 풍향이 바뀌자 (혹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 알폰소는 귀족들을 설득하여 포위망으로 돌아왔다. 카스티야 군은 같은 방법으로 공격하되 수백척의 뗏목에 엄호를 위한 석궁병과 기병을 포함한 병사들을 나눠 단번에 상륙시키는 인해전술을 통해 해변의 마린 군을 성내로 격퇴하였다. 다만 항구에 정박한 마린 함대에 대한 카스티야 해군의 공격은 큰 손실을 입고 실패하였다.[5] 어쨌든 알폰소는 지브롤터를 수륙 양면으로 포위할 수 있었다.
카스티야 군은 참호를 파고 남북으로 지브롤터를 포위하였고, 알폰소는 세비야에서 가져온 6대의 투석기로 도시를 포격하였고 갱도를 파서 성벽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6] 수비대는 돌과 끓은 기름을 투하하며 저항하였고, 알폰소의 바람과는 달리 포위는 장기화되었다. 본진에서 멀었던 양측은 모두 식량난을 겪었고, 투항한 카스티야 병사들은 알헤시라스에서 소의 1/8 가격에 노예로 팔렸다. 그리고 그라나다의 무함마드 4세가 원군과 함께 당도하자 알폰소는 지브롤터 반도의 입구인 이스무스에 참호를 파고 맞섰다. 이는 효과적인 방어선이 되었으나 산지로의 접근이 차단된 카스티야 군은 뗼감을 구하지 못하여 음식을 날로 먹어야 했다. 다만 마린 군대 역시 무기력하였기에 대치가 이어졌다. 마침내 내부 반란에 직면한 1333년 8월 24일 알폰소는 마린 조가 제시한 1만 두블룬의 연공 납부의 4년 휴전에 합의하였다. 모로코 상인들은 카스티야 영토에서 기름과 가축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고, 카스티야 군은 철수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알폰소는 무함마드 4세와 호화로운 연회에서 직접 만나 선물을 주고받고 협정에 서명하였다.[7]
비록 다음날 무함마드 4세는 그의 기독교도에 대한 호의에 분노한[8] 두 귀족들에 의해 암살되었지만 카스티야 군의 철수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한편 알헤시라스로 귀환한 압둘 말리크는 스스로 론다와 알헤시라스의 왕이라 선포하였고 신임 그라나다 술탄 유수프 1세와 함께 카스티야와의 전쟁을 이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틀렘센 원정을 준비하던 부왕 알리는 그를 소환하였고, 1334년 2월 26일 페스에서 모로코-카스티야-그라나다 간의 4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지브롤터 수복은 약 한세기 만에 안달루스에서 무슬림 세력이 기독교권의 주요 도시를 탈환한 쾌거였고, 이슬람권 서부 전역에서 축하되었다. 당시 마린 조와 적대하던 틀렘센에서 공부하던 연대기 작가 이븐 마르주크는 교수가 낭보를 전하자 동료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뻐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1년에 걸쳐 약 반세기 만에 지브롤터 해협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한 알리는 이제 대망의 틀렘센 원정에 착수한다.
2.2. 틀렘센 함락 (1337년)
한편 1334년 자얀 왕조의 야심찬 군주 이븐 타슈핀 압델 라흐만 (재위 1318 ~ 1337년)은 하프스 조의 베자이아를 포위하고 튀니스로도 파병하여 아부 바크르 알 무타와킬을 격파하였다. 패배한 아부 바크르는 콩스탕틴으로 도주하였고, 쟈안 군대가 튀니스를 장악하였다. 장인의 구원 요청을 받은 알리는 1335년 1월 틀렘센을 침공하였고 하프스 조를 돕기 위해 해군을 파견하였다. 자얀 군대는 수도 틀렘센을 지키기 위해 돌아왔고, 알리는 조부 아부 야쿱 유수프가 세운 병영도시 알 만수르를 거점으로 틀렘센을 봉쇄하였다. 포위는 2년 넘게 이어졌고, 그 사이에 (1336년 혹은 1337년) 알리는 시질마사의 번왕인 형 아부 알리를 제거하여 후방을 안정시켰다. 마침내 1337년 5월 틀렘센은 함락되었고, 압델 라흐만은 전사하였다. 후자의 형제들 역시 사로잡혀 처형되었고, 틀렘센 왕국은 마린 왕조에 병합되었다. 틀렘센을 얻은 알리는 이집트, 그라나다, 튀니지, 말리의 축하 사절을 접견하였다.2.3. 안달루스 개입
1333 ~ 1344년 지브롤터 해협의 세력도
한편 휴전기 동안 알폰소 11세와 유수프 1세는 각각 내부 반란을 진압하였는데, 후자는 우마르 아빌 울라 가문을 튀니지로 추방하였다. 1338년 카스티야와의 휴전이 만료되자 알리는 '안달루스 부왕' 압둘 말리크에게 5천의 기병 및 다수의 보병을 주어 그의 거점 론다로 파견하였다. 이에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이 연합하여 더 이상의 증원 저지를 위해 지브롤터 해협을 봉쇄하였다. 1339년 알폰소 11세는 론다, 안테케라, 아르키도나 일대를 습격하였다. 압둘 말리크 역시 메디나 시도니아, 아르코스, 레브리자를 습격하고 헤레즈를 포위하였다. 비록 도시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압둘 말리크는 그 교외 지역에서 얻은 많은 전리품과 함께 회군하였다. 하지만 카스티야 군의 매복에 당하여 1만에 달하는 마린 군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압둘 말리크 역시 죽은 척하던 중 살해되었다.[9] (1339년 10월 20일) 그후에도 카스티야 국경을 습격하던 마린 군은 헤레즈에서 격퇴되었는데, 그동안 유수프 1세는 카르카부에이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아라곤 함대가 알헤시라스 부근에 상륙을 시도하나 격퇴되었고 제독 조프레 길라베르가 전사한다.
알제리의 평정 후 안달루스 원정을 염두에 두던 알리는 세우타에서 60척의 전함과 250척의 선박을 준비하고 현지 유력가인 무함마드 알 아자피를 제독으로 선임하였다. 지브롤터 해협에서 물자와 병력 수송이 이어지던 1340년 4월 8일, 알폰소 조프레 테노리오 휘하의 카스티야 함대가 알헤시라스에 접근하였다. 무함마드 알 아자피는 적 함대를 포위하여 조프레를 전사시키고 51척의 카스티야 함대 중 35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두었다.[10] 자신감을 얻은 알리는 공성병기와 조정 전체, 부인들까지 대동하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8월 4일[11] 알헤시라스에 상륙하였다. 유수프 1세와 합류한 알리는 9월 22일 타리파를 포위하였다. 다만 기독교 왕국들의 해군력이 괴멸되었다고 자신한 알리는 알헤시라스의 12척을 제외한 함대를 해산하였는데, 알폰소가 기존에 적대하던 포르투갈의 아폰수 4세와 연합하며 상황은 급변하였다. 포르투갈의 제독 마누엘 페산하는 고용된 미케르 에기디오 보카네그라 휘하 17척의 제노바 함대에 세비야에서 급조된 27척의 함선까지 합친 연합 함대를 이끌고 나아가 10월 초엽 지브롤터 해협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2.3.1. 리오 살라도 전투 (1340년)
17세기의 삽화
한편 타리파 포위는 장기화되었고, 마린 군대는 본토로부터의 보급이 단절되자 사기가 저하되었다. 그마저도 상당 부분의 병력이 카스티야 군을 묶어두기 위해 그라나다 방면에서 지속적으로 습격을 이어가느라 분산되었다. 10월 10일 폭풍으로 12척의 카스티야 함선들이 파괴되자 알리는 타리파에 대한 총공세에 나섰으나,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은 끝에 격퇴되었다. 7년 전과는 달리 알폰소는 원군과 함께 15일 세비야에 당도하였고, 다음날 아폰수 4세와 합류하였다. 26일, 2만 2천에[12] 달하는 병력을 모은 기독교 연합군은 남하를 개시하였다. 알리 역시 타리파 포위를 풀고 도시와 바다 사이의 언덕에 주둔하였다. 29일 기독교 연합군은 타리파에서 8km 떨어진 해안의 사슴 언덕 (하야르 알 아얄)에 당도하였다. 무슬림 연합군은 7천 그라나다, 6만 모로코 병력으로 구성되었다.[13]
또한 알폰소는 전투 도중 그라나다 군의 후방을 기습하려는 목적으로 밤을 틈타 1천 기병과 4천 보병을 타리파로 보냈는데, 이를 저지하러 나선 3천의 모로코 기병대를 이끈 장교는 실패했음에도 알리에게 카스티야 군의 입성을 저지했다며 거짓 보고를 올렸다. 다음날인 30일 아침, 양측의 진영 사이에 흐르는 살라도 강 (리오 살라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14] 1만 2천의 카스티야 군은 모로코, 4천의 포르투갈-산티아고 기사단은 그라나다 군을 공격하였다. 모로코 군은 카스티야 군과 대등하게 싸우며 버텼는데, 왕자 페르난도와 파드리크가 이끄는 8백여 기사들이 2500 모로코 기병대가 지키던 작은 다리를 장악하며 전세에 변화가 일었다. 알폰소는 1천 5백의 기사를 더해주며 교두보를 확고히 하였고, 그를 통해 살라도 강을 건넜다. 3천의 산티아고 기사단 역시 살라도 강을 건너 언덕의 모로코 진영을 향해 진격하였다. 동시에 타리파의 5천 병력 역시 모로코 진영을 공격하였고, 진영 방어를 위해 알리가 남겨둔 3천 기병과 8천 보병 중 절반은 알헤시라스로 도주하고 나머지는 본군과 합류하였다.
이러한 악재에도 알리는 소수의 병력과 강을 건넌 알폰소를 목표로 총공격에 몰두하였다. 알폰소 역시 백병전에 나서려 하자 톨레도 대주교가 말 고삐를 잡아당겨 만류할 정도로 마린 군의 공세는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때 모로코 진영을 약탈하던 타리파의 카스티야 군이 마린 군의 후방을 공격하며 전세가 다시 역전되었다. 포위된 마린 군대는 붕괴되었고, 병사들은 알헤시라스를 향해 도주하였다. 3시간의 전투 끝에 정오 무렵 그라나다 군대 역시 포르투갈 군의 공격에 밀려 철수하며, 전체 인원 10만명이 참여한 리오 살라도 전투는 기독교 연합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그후 알폰소는 전장에서 6km 떨어진 과다메시 강까지 가차없이 적군을 추격하였다. 다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술탄의 진영을 약탈하는 데에 치중하였는데, 알리의 부인들 대부분을 살해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그중에는 하프스 조의 공주인 첫 부인 파티마, 귀족 아부 야흐야 이븐 야쿱의 딸 아이사 등이 있었다. 그외에 알리의 누이 우말파트, 아들 아부 우마르 타슈핀, 조카 알리 등이 포로가 되었고 많은 귀족들이 전사하거나 추격당하여 죽었다.[15]
2.3.2. 알헤시라스 공방전 (1342 ~ 44년)
유수프와 함께 알헤시라스에 돌아온 알리는 그날 밤 지브롤터에서 세우타로 향하는 갤리선에 몸을 실었고, 다시는 안달루스로 돌아오지 않았다. 많은 병력과 인재들을 잃은 마린 조는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다. 1341년부터 알폰소는 함선 건조 및 포르투갈 / 아라곤 / 제노바 함대를 고용하고 자금을 마련하는 등 알헤시라스 포위를 준비하였다. 1342년 기독교 연합 함대는 지브롤터 해협을 봉쇄하기 시작하였고, 포르투갈-제노바 함대는 80척의 모로코 보급선을 공격해 26척을 나포하고 나머지를 몰아내었다. 7월 25일 알폰소는 군대와 함께 원정 준비 거점 헤레즈를 떠나 남하하였다. 8월 1일 1천 6백의 기병과 4천 궁병 & 창병으로 구성된 카스티야 군과 서유럽 각지의 십자군은 인근 게타레스에 당도하였다. 3일 연합군은 알헤시라스 북쪽의 언덕에 진영을 차렸고, 알폰소는 그 중앙에 세워진 성탑 (토레 데 로스 아달리데스)[16]에 거주하며 지브롤터 만 일대를 시야에 두었다.
알폰소의 목적은 적의 식량을 고갈시켜 항복을 유도하는 것이었기에 포위 초반에는 직접적인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17] 그러던 어느날 수비대 중 3백 기병과 1천 보병이 성을 나와 산티아고 기사단이 맡은 포위망으로 출격하였다. 기사들 역시 출격을 준비하는 동안 방문 중이던 독일인 백작이 6명의 동료들과 먼저 돌격하였다. 이에 모로코 기병대는 거짓 철수로 그들을 끌어들인 후 반격하였고 백작이 전사하였다. 나머지는 카스티야 기사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를 보고받은 알폰소는 바다에서부터 강까지 도시를 두르는 참호를 파게 하였고 각처에 방어 거점을 세운 후 밤에도 병사들을 정기적으로 교대하며 감시하게 하였다. 또한 일단의 병력을 카르테이아로 보내어 카르타헤나 성탑을 장악해 지브롤터를 감시하게 하였다. 9월 들어 아라곤-마요르카 전쟁이 터지자 아라곤 함대가 철수하였다. 한편 육상 포위군은 두 성탑이 감싸는 서북문 근처에 공성 병기를 세웠다. 이에 수비대가 출격하여 도발, 기사들을 성벽까지 끌어들인 후 반격하여 격파하였다. 그러한 방식으로 알폰소의 종자 후안 니노와 산티아고 기사단장이 전사하였다.
10월 초엽 거대한 폭풍으로 저지대에 위치했던 포위 진영이 늪처럼 변하자 수비대는 야습에 나서 큰 피해를 가하였다. 결국 포위군은 물을 피해 동쪽 팔모네스 강가로 진영을 옮겨 남은 달을 보내었다. 수비대는 (동쪽 비야 비에자의) 전군을 동원하여 새 진영을 공격, 많은 기사들을 포함한 다수를 전사시켰으나 결정적인 타격에는 실패하고 회군하였다. 홍수 이후 포위군은 식량 부족과 질병에 시달렸다. 11월에는 약속대로 10척의 아라곤 함대와 또다른 10척의 포르투갈 함대가 당도하였으나 후자는 불과 3주 후에 철수하며 수비대의 사기만 진작되었다. 다만 수비측 역시 봉쇄로 인한 식량난에 시달렸다. 12월 카스티야의 증원 병력이 당도하며 포위군은 재차 공세에 나설 여력을 얻게 되었다. 그들은 수비대의 화살 세례 하에 거대한 제노바 투석기들을 설치하였다. 해가 바뀌어 1343년 1월에도 양측의 소모전은 이어졌다. 포위군은 거대한 목재탑 바스티다를 세워 성 안을 포격하였다. 이에 수비대가 출격하여 그를 전소시켰지만 포위군은 또다른 바스티다를 세워 발사 무기를 이용한 공격을 이어갔다.
그라나다의 유수프 1세가 알헤시라스 보급과 구원을 준비하자 포위군은 성벽의 약한 지점이자 수비대가 집중된 폰사리오 문을 공격하였다. 알폰소는 그 앞의 참호를 덮어 공성 병기를 진격시켰다. 수비대 역시 초기 화약 무기로 대응, 철제 구체를 발사하여 공성탑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화약 무기가 쓰인 사례라고 한다.[18] 한편 1343년 3월에 이르면 알헤시라스는 완전히 포위 측의 참호와 그 뒤의 목책, 일정 간격으로 세워진 탑들로 둘러쌓여 있었다. 카스티야 군은 많은 투석기를 만들어 돌을 발사하였는데, 그 사정거리는 300m에 불과하였기에 종종 수비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다만 하도 많이 돌 포환을 쏘아댄 이유로 1487년 말라가 포위 당시 페르난도 2세가 알헤시라스의 폐허에서 이들을 가져와 재사용하게 할 정도였다. 한편 카스티야 측 원군이 속속 도착하여 죽거나 지친 병사들과 교대하는 가운데 알헤시라스는 2월 무렵 포위군이 설치한 쇠사슬 때문에 지브롤터로부터의 해상 보급마저 막히자 식량난에 시달렸다. 다행히도 3월 말엽 폭풍으로 사슬이 파괴되며 수비대는 보급을 받고 저항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 무렵 그라나다 술탄 유수프 1세의 원군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알폰소는 그에게 알헤시라스가 조공한다면 포위를 풀 것을 제안하였고, 유수프 역시 휴전을 제안하였으나 양측 모두 서로가 거부하였다. 동시에 포위 진영에는 영국 (더비, 솔즈베리 영주), 독일 (부스 백작), 프랑스 (푸와 백작 가스통 2세), 나바라 국왕 필리프 3세 등의 증원 병력이 당도하였다.[19] 유수프는 적절한 공격 시점을 기다렸고, 이렇게 양측은 초여름까지 대치하였다. 그라나다-카스티야 간의 협상이 이어지던 8월, 마침내 모로코 술탄 알리가 그라나다 함대를 기다리며 구원 함대를 조직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편 화재로 포위 진영의 밀 창고가 전소하자 가뜩이나 자금난에 시달리던 알폰소는 왕관을 담보로 두고 은제 귀중품을 세비야에서 녹이기에 이르렀다. 이때 8월 중순 아라곤 함대가 재차 파견되었고, 이들은 15척의 카스티야 함대와 합류한 후 모로코 측 원군 준비에 최대한 타격을 입히고자 알리가 친히 원군 편성을 감독하던 세우타 습격에 나섰다. 다만 카스티야 포로를 통해 작전을 입수한 마린 함대가 잘 대비하여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20]
2.3.2.1. 팔모네스 전투와 항복
10월 마침내 마린 함대는 지브롤터 만에 진입하였는데, 봉화를 접한 40척의 카스티야-아라곤 함대가 발진하자 지브롤터로 피신하였다. 해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제노바 함대[21]가 임금 체불에 항의하며 떠나려 하자 알폰소는 사재를 털어 급료를 지급하였다.[22] 11월 지브롤터에 하선한 수만의 마린 군은 한 왕자의 지휘 하에 유수프의 그라나다 병력과 합세,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포위망 동쪽 팔모네스 강으로 진군하였다. 카스티야 함대는 바람을 따라 불화살을 쏘고 화공선을 보내었으나 마린 함대는 돛을 적시고 막대로 화공선을 몰아내어 위기를 모면하였다. 알폰소는 적군이 강을 넘기 전까지 공격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고, 얼마간의 전초전 후 양측은 각각 강을 두고 대치하였다. 그러던 12월 12일 포위군은 강한 공세에 나섰고 수비대는 화포로 맞섰다. 새벽 직후 공성탑에 의해 성벽 일부가 무너졌고, 수비대는 가까스로 포위군의 진입을 막아내었다. 혼란에 빠진 수비대는 모스크 첨탑에서 연기를 피워 위급함을 알렸고, 신호와 소음을 통해 상황을 깨달은 그라나다-모로코 군대는 강을 넘어 후방 공격에 나섰다.알폰소는 적군이 강을 건너는 순간 대군으로 반격한 후, 전군을 동원하여 강을 건너 후퇴하는 마린 군대를 추격하였다. 마린 기병대는 와해되었고, 보병들은 지브롤터 귀환 명령에도 추격을 받으며 인근 산지나 알모라이마 탑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비록 카스티야의 승리였지만 양측 모두 전사자가 상당하였고, 곧 패잔병을 추스른 유수프는 2차 공격을 준비하였다. 다만 병사들의 사기가 저조하였고, 마린 사절은 유수프에게 평화 협상을 권유하였다. 카스티야 진영에도 서신이 보내졌지만 알폰소는 알헤시라스 병합 외에는 어떠한 조건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를 유지하였다. 1344년 1월 알폰소는 완벽한 해상 봉쇄를 위해 재차 쇠사슬을 설치하였다.[23] 노끈과 돛대로 고정된 나무통 등으로 보강된 쇠사슬 설치에는 두 달이 걸렸다. 작업 도중에도 몇차례 보급선이 파견되었다. 1월의 경우는 실패여지만 2월 24일에는 5척이 성공하였다. 다만 3월 초엽 쇠사슬이 완성되자 도시의 식량은 바닥날 일만 남았다. 성내에는 주민들이 먹을 빵이나 다른 음식이 없었고, 간신히 성벽에 배치될 정도의 병력만이 있었다.
3월 2일 일요일, 유수프의 사절 하잔 알 가라페가 알폰소에게 도시 양도 의사를 밝혔다. 그 대신 알폰소의 보호 하에 주민들이 재산을 챙겨 철수하고, 15년간 휴전하며 그 대가로 매년 카스티야에 12000 두블룬 금화를 납부한다는 제안이었다. 카스티야 기사들은 세비야와 톨레도의 증원 병력이 곧 올 것임으로 포위를 계속하자고 주장하였지만, 막대한 인명과 자금 손실에 부담을 느끼던 알폰소는 휴전 기간을 10년으로 조정한 것 외에 휴전 제안을 수용하였다. (알헤시라스 조약) 이와 함께 21개월에 달한 공방전도 막을 내렸다. 3월 26일 서쪽 비야 누에바의 주민들이 재산을 챙겨 비야 비에자로 넘어갔고, 종려주일인 다음날에는 비야 베이자의 주민들과 함께 지브롤터로 향하였다. 무슬림 사가들은 알폰소가 주민들을 잘 대해주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로써 알헤시라스는 카스티야령이 되었고, 성탑에는 알폰소와 귀족들의 문장이 걸렸다. '에스타도 델라 팔마'로 개칭된 도시에는 제노바 함대를 이끈 에기디오 보카네그라가 영주로 임명되었고, 27일 열린 미사에서 대사원은 산타 마리아 델라 말마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2.4. 튀니지 정복 (1347년)
아불 하산 알리의 일시적인 마그레브 통일
1346년 10월 하프스 왕조의 아부 바크르 알 무타와킬은 사위이던 알리에게 자신이 후계자로 정한 어린 아들 아불 압바스 아흐마드의 후견을 맡기고 사망한다. 그러자 다른 아들 우마르가 재상 이븐 타프라긴의 지지 하에 칼리파를 칭하며 반발하며 내전이 터졌다. 아흐마드는 튀니스를 장악했지만 곧 우마르에게 살해되었고, 후자는 다른 형제들 역시 숙청하였다. 사태를 관망하던 술탄 알리는 튀니스 내부의 지원 요청을 받자 1347년 봄, 찬탈자를 몰아낸다는 명분 하에 진격하였다. 우마르는 튀니스를 버리고 도주하다가 8월 마린 군에 붙잡혀 처형되었고, 다음달 알리는 튀니스에 무혈입성하였다. 이로써 알리는 무와히드 왕조 이후 약 한세기 반 만에 마그레브 전역의 통일을 이룩하였고, 한동안 튀니스에 머물렀다.
2.5. 반란과 죽음
그러나 알리의 성공은 채 1년도 가지 못하였다. 현지 베두인들에 대한 지나친 중앙 집권화 시도는 1348년 4월 그들의 전면적인 반란으로 이어졌고, 마린 군대는 카이로우안 부근에서 패배하였다. 그틈을 타 틀렘센 총독이던 아들 아부 이난 파리스가 페스로 돌아가 술탄을 칭하였고, 남겨진 틀렘센은 아부 타슈핀의 아들 아부 사이드 우스만 2세와 아부 싸비트의 수중에 들어가며 10년만에 왕국을 재건하였다. 1349년 흑사병의 창궐과 함께 수세에 몰린 알리는 그해 12월 선박에 올라 투니스를 떠났고, 이듬해 초엽 베자이아 총독이던 하프스 왕자 알 파들이 칼리파 알 무타와킬로 추대되었다.[24] 한편 모로코로 향하던 알리의 함대는 베자이아 해안에서 난파하였고, 알리는 적지 한가운데에 소수의 병력과 남겨졌다.추격을 피해 도주한 그는 알제의 병력과 합세하여 우선 틀렘센 수복을 시도했으나 진군 도중 츨레프 강 전투에서 자얀 군에게 격퇴되었다. 재차 패전한 후 기존 지지자들 대부분이 이탈하였고, 알리는 과거 번국이 있던 시질마사로 향하여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파리스의 군대가 남하하자 알리는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마라케쉬로 도주하였다. 그곳에서 재차 군대를 모은 알리는 왕좌를 회복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군대를 모아 북진하였으나 1350년 2월 움물 라비아 강 전투에서 다시 파리스에게 패배하고 아틀라스 고산 지대의 힌타타 부족에게로 피신하였다. 좌절하고 병약해진 그는 1350년 말 (혹은 1351년 초) 아들에게 양위한 후 1351년 5월 은둔지에서 사망하였다. 파리스는 공개적인 애도 속에서 그의 시신을 셸라 왕실 묘원으로 이장하였다.
[1]
Abu al-Hasan Ali ibn Othman
[2]
수비대장 돈 바스코 페레즈 데 메이라부터가 국왕이 지급한 자본을 착복해 헤레즈의 개인 영지를 매입하는 데에 사용하였고, 성내의 식량을 무어인들에게 팔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포위 후에 그의 창고에서는 수비대를 5일간 먹일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협상 카드로 쓸 생각으로 데리고 있던 무어인 포로들은 잘 먹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포위가 시작되기 8일 전에 식량을 실은 보급선이 인근 해역에서 좌초하며 성내의 비축 식량은 적었다. 포위 막바지 무렵 조프레 휘하 카스티야 선박들이 투석기로 밀 포대를 성 안에 투입하려 하였지만 마린 함대에게 밀려났다. 그후 포위군의 투석기 공격이 수비대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3]
무능했던 그는 면책이 두려워 북아프리카로 도주한다
[4]
후위는 그대로 해안으로 내려보내고 기병대는 구릉 지대를 우회, 궁병과 창병은 숲을 통해 행군하게 하여 매복조를 공격하게 함. 언덕의 마린 군이 저지대의 카스티야 군을 공격하기 위해 내려가자 다른 카스티야 부대가 언덕을 장악해 협공한 것
[5]
마린 측이 선박에 두꺼운 지붕을 얹어 투석기 공격에 대비하였고 항구 입구에 거대한 나무를 깔아 적함의 진입을 차단한 결과이다.
[6]
그중 3대는 바위산 정상에 설치되어 성을 내려다보며 포격해 큰 피해를 주었다.
[7]
이때 무함마드는 에메랄드, 루비, 사파이어로 장식된 금 칼집과 검을 선물했다. 두 루비는 밤 크기였다고. 알폰소는 답례로 옷을 선물했다.
[8]
기독교로의 개종 혹은 마린 조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했다.
[9]
한 카스티야 군인이 그의 미동을 보고 창으로 죽였다.
[10]
병력 차이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44척 전함, 35척 보급선 vs 44척 전함, 7척 보급선. 보급선도 모두 나포되고, 11척은 카르타헤나, 5척은 타리파로 피신했다.
[11]
혹은 14일
[12]
알폰소 11세는 8천 기병, 1만 2천 보병과 알려지지 않은 수의 민병대를, 아폰수 4세는 1천 기병 이끔
[13]
기독교 연합군에는 마린 조의 왕자가 지휘하는 부대가, 무슬림 연합군에는 그라나다측 기독교 민병대가 있었다.
[14]
9시에 진영을 떠나며 알폰소는 2천 민병대를 남겼다.
[15]
그외에 많은 귀족들이 전사 혹은 추격당해 죽었다. 아부 타비트 이븐 파스 알라, 아부 무야히드 가지 이븐 알 카스, 무함마드 빈 야흐야 빈 아부 바크르, 그라나다의 유명한 작가 압둘라 빈 살문, 이맘 이븐 알 카팁 등.
[16]
승자들의 탑
[17]
다만 포위가 장기화되자 톨레도 대주교를 프랑스 왕에게, 사제 산 후안을 신임 교호아 클레멘스 6세에게 보내 도움을 청함
[18]
기독교권 유럽이 사용한 것은 3년 후에 벌어진 칼레 포위(1346-47년)였다고 한다.
[19]
그외에 교황은 2만, 프랑스 국왕은 5만 플로린의 자금을 지원해줬다. 이로써 알폰소는 줄기차게 체불된 임금을 요구하던 제노바 용병대에게 급료를 지급했다.
[20]
본래 15척의 카스티야 함대만 접근하고 아라곤 함대는 오히려 마린 조를 도와주려는 척을 하며 끌어내려 하였으나 포로의 누설로 마린 함대가 항구로 돌아가며 실패했다. 20척의 아라곤 함대는 게타레스에 정박하여 마린 함대의 봉쇄 돌파 시도를 경계했다.
[21]
세우타와 지브롤터의 마린 조와 협상하기도 했다.
[22]
이때 제노바로부터 돈을 빌려 제노바 인들에게 지급하였다고 한다.
[23]
가끔 지브롤터로부터 작은 배들이 봉쇄를 뚫고 보급하는 등 완벽하지 않았다.
[24]
다만 그는 1350년 7월 재상 이븐 타프라긴에게 살해되고 동생 이브라힘 2세로 대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