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20:39:12

아디(축구인)

아디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파일:K리그1 로고.svg
2007 · 2008 · 2010 · 2012 · 2013
}}} ||
브라질의 축구 코치
파일:20241026_193319.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아지우송 두스산투스
Adilson dos Santos
K리그 등록명 아디
출생 1976년 5월 12일 ([age(1976-05-12)]세)
브라질 세르지피 아라카주
국적
[[브라질|]][[틀:국기|]][[틀:국기|]]
직업 축구선수 ( 수비수[1], 미드필더[2] / 은퇴)
축구코치
신체 183cm / 81kg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아푸카라나 아틀레치쿠 클럽 (1997)
파라나 클루비 (1997~1998)
레드스타 베오그라드 (1998~1999)
레알 베티스 (2000)
세비야 FC (2000)
다롄 스더 (2000 / 임대)
다롄 스더 (2001~2005)
FC 서울 (2006~2013)
코치 FC 서울 (2014~2017)
별명 이지스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이후5. 플레이 스타일6. 여담

[clearfix]

1. 개요

브라질 축구선수 출신 축구 지도자. 통산 305경기를 FC 서울에서 뛰었다.

2. 선수 경력

브라질 파라나에서 성장해 1997년 아푸카라나 아틀레치쿠 클럽에서 프로에 데뷔했으며, 이듬해 세르비아 리그의 레드스타 베오그라드에 입단하며 첫 해외 진출을 했다. 하지만 유고의 내전으로 제대로 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고, 6개월 만에 계약 해지했다.

이후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구단들에 입단 테스트를 보기도 했지만 모두 워크퍼밋을 받지 못했다.

2000년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 레알 베티스 세비야 FC 등에 합류했지만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 못했다.

2000년 중국 슈퍼 리그 다롄 스더로 임대되었다. 이후 다롄 스더로 완전 이적하여 6년 간 활약했다. 다롄에서 6년 간 거의 모든 경기를 소화하였다.

2.1. FC 서울

2006년 이장수 감독의 눈에 들어 FC 서울로 이적했다. 중국 리그에서 오랫동안 지도했던 이장수 감독이 다롄에서 6년 간 활약했던 아디를 눈여겨보다가 자신의 임기 2년 차에 영입한 것이다.


파일:external/img.sportalkorea.com/SK004_20101205_180101.jpg
이제 다신 볼 수 없는 그의 화려한 현역 시절

만 30살의 중국 리그 출신 무명 수비수 용병이 팀에 합류하자 서울 팬들은 우려의 시선을 보였으나,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듯 FC 서울 수비진의 중심으로 종횡무진 활약했다. 서울 팬들은 이장수가 남긴 최고의 작품으로 아디를 꼽는다. 이장수 감독은 훗날 잡지 인터뷰에서 아디를 중국으로 데려갈 기회가 있었지만 팀을 떠나는 마당에 선수까지 빼가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 아디를 잔류시켰다고 밝혔다.

K리그에서 뛰는 동안 우승 2회, 준우승 1회를 경험했다. 그밖에 2007, 2009, 2012년 리그 최소 실점에 크게 기여했으며 2007, 2008, 2010, 2012, 2013년 총 5번에 걸쳐 K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2006 시즌 등번호 30번을 달고 리그와 리그컵에서 34경기를 소화했고 팀의 삼성 하우젠컵 우승에 기여했다. 시즌 초반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다가 시즌 중반 이을용이 합류한 뒤 왼쪽 풀백으로 자리를 옮겨 주전으로 활약했다.

2007 시즌을 앞두고 두두가 팀을 떠나자 자신을 상징하는 등번호 8번을 달았다. 기성용이라는 루키가 중원에 자리하며 왼쪽 풀백으로 자리를 굳혔다. 특유의 운동 능력을 바탕으로 브라질리언다운 유려한 드리블로 서울의 왼쪽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다. 모든 대회 총 39경기를 소화하며 팀의 리그 최소 실점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개인 첫 K-리그 베스트 11 좌측 풀백에 선정됐다.

2008 시즌에도 역시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리그와 리그컵에서 34경기에 나서며 팀의 정규리그 2위와 챔피언 결정전 진출에 기여한다. 여름에 합류한 김치우와 왼쪽에서 좋은 호흡을 보여주었다. 챔피언결정전 1차전 홈경기에선 기성용의 코너킥을 헤더로 득점하며 선제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은 수원에 밀려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그래도 2년 연속 K-리그 베스트 11 좌측 풀백에 선정됐다.

2009 시즌에는 ACL에 데뷔했다. 팀이 소화한 모든 경기에 선발 출전했고 8강 진출에 기여했다. K-리그에선 한국 진출 후 첫 퇴장을 당하기도 했다. 모든 대회 총 38경기에 나섰고 팀의 리그 최소 실점에 기여했다.

2010 시즌을 앞두고 현영민이라는 리그 정상급 왼쪽 풀백이 팀에 합류했기 때문에 김치곤의 이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중앙 수비수로 출전하고 있다.

2010년 10월 9일 경남전에서 김병지와 공중볼을 다투다가 광대뼈가 함몰되는 부상을 입고 장기간 결장했다. 이때만 해도 시즌중 복귀가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느나, 서울이 리그 상위를 지키며 사실상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하자 컨디션을 끌어올려 12월 1일 챔피언 결정전에 복귀했다. 많은 이들이 부상 후유증과 50일 넘는 공백으로 인한 실전 감각 상실을 우려했으나 다행히 큰 실수는 없었으며, 후반 근육경련으로 교체되었다. 12월 5일 홈에서 열린 챔피언 결정전 2차전에서 코너킥 상황에서 높이 뛰어올라 헤딩슛으로 결승골을 넣으며 FC서울에 4번째 우승을 선사했다.

시즌 종료 후 MVP 후보에 거론되기도 했으나 김은중에게 밀려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2년 만에 K-리그 베스트 11 좌측 풀백에 선정됐다. 그리고 자신의 커리어 하이인 시즌 5골을 득점했다.

가족 때문에 2010 시즌 종료 후 브라질로 돌아갈 것이란 루머가 있었으나 재계약에 성공했다. 가족들도 한국말을 익히며 잘 지낸다고. 팬들은 서울의 전설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그가 은퇴식까지 치르며 명예롭게 떠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2011 시즌에는 어느덧 3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에도 여전한 실력을 과시하며 경고 누적 결장을 제외하면 팀의 모든 경기에 출장했고 ACL과 FA컵을 포함해 시즌 42경기를 소화했다. 시즌 종료 후 구단과 2년 재계약을 채결했다.

2012 시즌에도 36살의 나이임에도 리그와 FA컵 총 39경기에 나섰고 팀의 리그 최소 실점과 K-리그 역대 단일 시즌 최다 승점 기록에 기여하며 팀의 2년 만의 우승에 기여했다. 개인적으로도 2년 만에 리그 베스트 11 선정이라는 2마리 토끼를 잡았다.

계약 기간 마지막 시즌인 2013년에도 리그 33경기, FA컵 1경기, AFC 챔피언스리그 11경기, 총 45경기에 출장해 4골 2도움이라는 골넣는 수비수로서의 엄청난 스탯을 쌓았다. 특히 2013년 8월 3일 홈에서 열린 슈퍼매치에서는 헤딩 선제골로 승리를 이끌었다. 시즌 막판 스리백으로 전환한 팀에서 좌측 스토퍼 역할을 톡톡히 했다. 팀의 리그 3위와 ACL 준우승에 기여했다. 마지막 시즌임에도 2년 연속 K-리그 베스트 11 좌측 풀백에 선정됐다.

이로써 5번의 리그 베스트 11 선정이며, 윤상철 데얀을 넘어 단독으로 구단 역대 최다 기록이다. 또한 이는 2013년 기준 리그 역대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자 K리그 수비수 역대 최다 기록이다.[3]

FC서울에서의 총 기록은 305경기 20골 12도움 (리그, FA컵, ACL 모두 포함)

3. 지도자 경력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1346263813_J6UvZupg_BEC6B5F02_59_20140308173503.jpg
눈물의 은퇴식에서[4]

2014년 1월 28일 소속팀 FC 서울이 제안한 코치직을 수락하면서 그라운드를 떠나게 되었다.[5] 팬들은 아쉬워하면서도 그의 새 출발을 축복하고 레전드에게 합당한 예우를 한 구단을 칭찬하고 있다. 또한 한 시대를 풍미한 명선수가 코치로서 리그에 그대로 남아 후학을 지도한다는 점은 장기적으로 리그를 살찌우는 길이기도 한만큼 차후 행보를 주목할 가치가 있다.

17시즌 중에 감독 황선홍과의 불화 때문에 나간다는 썰이 떠돌았는데 시즌 종료 후 트위터에서 팬들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과정에서 AFC B급, A급 지도자 라이센스가 없이 C급 라이센스(KFA 3급 라이센스)로 코치를 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원칙적으로 프로팀 지도는 A급 라이센스(KFA 1급)를 소지해야 한다. C급 라이센스로는 초등학생 및 유소년 외에는 지도할 수 없다. K리그에서 100경기 출전한 선수 출신은 C급 강습회 청강만 하면 바로 B급 라이센스 취득자격이 주어지며 B급 취득후 2년 경력(상위5% 이내는 1년)을 쌓으면 A급 응시자격이 주어지는데 코치로 4년을 보낸 사람이 아직도 C급 이다.

결국 팀에서 자격증 따오라고 스카우터 겸해서 브라질로 보냈다. 포르투갈 전지훈련이 펼쳐지던 2020년 1월, 부상으로 인해 전지훈련에 참가하지 못한 고요한의 인스타 글(삭제됨)과 구단 직원의 인스타에서 오래간만에 한국을 방문한 것이 확인됐다. 팬들은 아디가 브라질 외국인 선수를 물어온 것이 아닌가 하면서 기대했다. 얼마 안가서 아드리아노의 포르투갈 캠프 참여 사실이 밝혀졌다. 2020년 6월까지 아디가 브라질로 간 이후의 그의 소속이 불투명하다.

2020년 6월 10일, 사실 아디는 2019년에 계약 만료로 팀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기사에 따르면, 아디와의 계약은 2019년에 만료되었으며, 계약 만료 시점에서 아디의 지도자 자격증 취득이 여의치 않았고, 마냥 기다려줄 수 없는 상황에서 아디 본인도 현지에서 여러 가지 생각하는 것들이 있었다고 한다. 팬들의 반응은 아디와의 계약이 만료되었음을 발표하지 않아 팬들의 의문을 키운 것에 대해서는 서울 보드진의 잘못이 크다고 말하지만, 아디의 계약이 연장되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아디가 계약이 진행된 5년동안 C급 라이선스에 머물었다는 점에서 아디와의 이별은 당연한 것이었다는 반응이었다.[6]

그런데 아디가 팀을 떠난 이유가 최용수 감독과의 불화일 수 있다는 추측이 돌고 있다. 아디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단 댓글[원문][8] 에 따르면, 자신은 사실 팀에 계속 남는데 별 문제가 없었지만, 최용수 감독은 자신에겐 좋은 사람이 아니고, 좋은 지도자가 아니며, 자신이 신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으며 최용수 감독이 어떻게 서울에 남아있는지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물론 이 해석도 아디의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인해 정확하게 해석되진 않았기에, 이는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디가 남긴 다른 댓글엔 가족들과 고민한 끝에 오랜 해외 생활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최용수와의 불화만이 아디가 팀을 떠난 이유가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서울을 떠난 후 현재까지도 다른 구단에서 지도자 경력을 이어가지 않고 있다. 사실상 축구계에서 발을 뗀 것으로 추정된다.

4. 이후

2024년 10월 넥슨 아이콘 매치를 뛰게 되면서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5. 플레이 스타일

K리그 역대 최고의 레프트백이자 역대 최고의 용병 수비수로 평가받는다. 수준급 외국인 선수조차 뚫기 어려워하는 맨마킹과 K리그 최고 수준의 태클, 왕성한 활동량과 좋은 내구성, 브라질리언 특유의 뛰어난 스피드와 유연성을 살린 공격력, 측면 수비수, 중앙 수비수, 측면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가 모두 가능한 멀티 플레이 능력의 소유자로 공수겸장의 만능 외국인 선수이다.

선수단 태반이 부상으로 이탈했던 2007 시즌 멀티 플레이 능력을 살려 세뇰 귀네슈 감독의 전술폭을 넓혀줬으며, 2008년 준플레이오프에선 당시 물올랐던 울산의 측면 공격을 완벽히 분쇄하며 서울을 결승에 올려놓았다. 2010 시즌에는 보직을 옮겨 중앙 미드필더와 센터백으로 출전했으며 공수 양면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6. 여담



[1] 풀백, 센터백 [2] 측면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3] 홍명보도 5번 수상했으나 1996년에 미드필더로 수상했기 때문에 순수 수비수로 5번의 베스트 11에 5번 선정된 건 아디가 유일하다. [4] 가족들도 함께 했다. 왼쪽부터 아들 니콜라스, 딸 이사도라, 부인. [5] K리그에서 뛴 외국인 선수가 은퇴 후 바로 코치가 된 케이스로는 발레리 사리체프( 신의손)에 이어 2번째다. [6] 만일 이 자격증 문제가 진짜라면 최용수라도 사이가 틀어질수밖에 없는데 최용수는 2015년 프로구단 감독 자격증(A급)이 없으면 감독을 할수 없다는 연맹의 결정이 떨어지고 여름 휴식기 들어가자 바로 황선홍과 함께 독일로 따러 갈 정도로 순식간에 일을 해놓는데 브라질로가서 2년가까이 안따고 있었다면 어떤 지도자도 빡치는게 이상하지 않다. [원문] For me not problem for help team fcseoul so this manager Choi I can’t not good people for me and not good coach he think God but is nothing I don’t believe how him stay in fcseoul? [8] 아디 본인이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 게시물에 달린 서울로 돌아와 달라는 팬의 댓글에 답한 말이다. 현재는 게시물의 댓글창이 사라져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 [9] 맨유의 마케다를 가지고 노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10] 사실 외국인 선수들 입장에서 타지에서 만난 고향 사람들은 정말로 반갑고 의지가 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일단 말이 잘 통한다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점 하나로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 일례로 분데스리가에서 뛰었던 홍정호가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같은 리그에서 뛰었던 박주호, 구자철, 지동원, 김진수, 손흥민 등과 뭉쳐서 밥도 먹고 여기저기 놀러다니면서 스트레스도 해소했다고 하니 남의 나라 일은 아닌 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