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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7 12:11:37

시마즈 타카히사

제15대 시마즈 당주
시마즈 타카히사
島津貴久
파일:shimazutakahisa.webp
<colbgcolor=#3a3c4f><colcolor=#fff> 출생 1514년 5월 28일
사쓰마국 이즈미 성[1]
(현 가고시마현 히오키시)
사망 1571년 7월 15일 (향년 58세)
사쓰마국 카세다
(현 가고시마현 미나미사츠마시)
가문 시마즈씨 (이자쿠 분가)
아호 아명 토라쥬마루
별명 마타사부로
백관명 사부로 사에몬죠
법명 하쿠유
관위[2] 종오위하 수리대부 겸 무츠노카미
사후 종삼위 추증
역직[3] 사쓰마 · 오스미 · 휴우가 슈고
부모 부친: 시마즈 타다요시[4]
모친: 칸테이후진, 시마즈 시게히사의 딸
자식 시마즈 요시히사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토시히사
시마즈 이에히사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사네히사와의 승부2.3. 가문 완전 장악2.4. 시마즈 최초의 센고쿠 다이묘2.5. 말년
3. 업적4.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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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 다이묘이자 시마즈 가문의 15대 당주이다. 유명한 시마즈 4형제의 부친이기도 하며, 일본에서 최초로 조총을 제작한 타네가시마 섬의 주인이자 최초로 조총을 실전에 도입한 인물이다. 가문의 힘을 비축하여 시마즈 4형제가 시마즈 가의 최전성기를 여는 밑바탕을 만들어주기도 하여, '시마즈의 영주'(英主)[5]이라는 별칭을 받았으며 종종 그 부친과 함께 '시마즈 중흥의 조'라고도 불린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514년 5월 28일에, 사쓰마 국 이즈미 성에서 시마즈 타다요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토라쥬마루로, 종가 출신은 아니고 방계인 이자쿠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 타다요시가 또 다른 방계인 소슈 가문의 가독도 상속받았기 때문에, 사쓰마 국 서쪽 지역에 광대한 영지를 갖고 있었다.

타카히사가 태어났을 때, 시마즈 가문은 쇠락하고 있는 상태였다. 종가 출신 당주들이 줄줄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11대 당주 타다마사가 1508년에 45세를 일기로 자살한 것을 시작으로 타다마사의 장남인 12대 당주 타다하루가 26살에, 차남인 13대 당주 타다타카가 23살에 죽어버리면서 가독 상속이 흔들렸다. 또 방계 가문과 국인중[6]들이 종가와 엇나가기 시작했다. 국인중들이 무력 봉기를 일으키는 와중에 요절한 타다하루와 타다타카도 문약한 스타일이라 시마즈 가문의 통치력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져 갔다. 이러한 혼란상 중에 삼남 카츠히사가 14대 당주가 되었다.

카츠히사는 원래 위에 형이 둘이나 있어 다른 가문에 양자로 갔다가 형들이 급사하면서 시마즈 가문으로 급히 복귀한 인물인데, 이 때문에 특히나 권위가 없었다. 그래서 날뛰는 국인중들을 제압하기 위해 방계 가문인 삿슈 가문의 당주 시마즈 사네히사[7]를 끌어들여, 그에게 국정을 위임하고 그의 누나를 정실부인으로 맞기도 했다. 하지만 야심 넘치던 사네히사는 카츠히사를 무시하고 아들이 없었던 카츠히사에게 자신을 후계자로 정하라고 압박하는 등 전횡을 벌였다. 참다 못한 카츠히사는 사네히사의 누나와 이혼하고, 또 다른 방계인 이자쿠 가문의 시마즈 타다요시에게 자신을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이로 인해 타다요시의 영향력이 커지자, 사네히사는 반란을 일으켜 카츠히사를 가고시마에서 내쫓아 버렸다. 이에 카츠히사는 타다요시에게 망명했고, 아예 1526년에 타다요시의 장남 타카히사를 양자로 들인 후 1527년 4월에 가독을 상속해주고 은거해 버렸다. 이로써 타카히사가 제14대 시마즈 당주이자 사쓰마-오스미-휴우가 삼국의 슈고 다이묘가 되었다. 타다요시는 아들이 종가를 물려받는 모습을 본 후, 출가하여 이름을 짓신사이로 바꾸고 섭정을 하게 되었다.

2.2. 사네히사와의 승부

이 소식을 들은 사네히사는 짓신사이가 카츠히사를 겁박하여 당주직을 찬탈했다고 선언하고 가신을 카츠히사에게 보내 그를 설득했다. 그러자 내심 젊은 나이에 당주 자리를 포기한 것이 아쉬웠던 카츠히사는 마음이 흔들리다가, 결국 5월에 상속 무효를 선언했다. 사네히사는 상속 무효가 선언된 즉시 반란을 일으켰다. 카지키 성의 이쥬인 시게사다와 쵸사 성의 시마즈 마사히사가 이에 호응하였다. 아직 섭정 짓신사이가 친히 출병하여 시게사다와 마사히사를 토벌하였는데, 이는 사네히사의 양동작전이었다. 짓신사이가 자리를 비운 즉시 사네히사는 본대를 이끌고 타카히사의 본진을 급습했다. 이쥬인, 히오키, 카세다, 타니야마 등의 거점이 순식간에 무너졌고, 사네히사는 6월 중순에 마침내 타카히사의 거성인 시미즈 성까지 당도했다. 타카히사는 싸우다 죽을 각오를 다졌으나, 그 가신 소노다 사네아키가 목숨을 버리지 말고 후일을 도모하자고 간곡히 진언하자 결국 마음을 바꾸고 야반도주하여 아버지 짓신사이에게 합류했다. 사네히사는 시미즈 성에 입성한 후 은거한 카츠히사를 불러들여 다시 당주로 삼았다. 이로써 시마즈 가에 두 당주가 서게 되었다.

짓신사이와 타카히사 부자는 카츠히사에게 줬던 이자쿠 성을 함락시켜서 거점으로 삼고, 세력을 재건했다. 이 기간 중에 1529년, 시마즈 방계 가문인 호슈 가문과 가신들이 모여 카츠히사와 타카히사의 회담을 주선했지만 실패했다.

1533년, 짓신사이-타카히사 부자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짓신사이가 자신의 군대를 사네히사군으로 위장하는 계책을 써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난고 성을 함락시키며[8] 내전이 재개되었다. 곧바로 사네히사가 난고를 쳤으나 짓신사이는 깔끔하게 방어해냈다. 그 와중에 사네히사에게 옹립된 카츠히사는 정신 못 차리고 간신들과 노닥거리다가 가신들의 인망을 완전히 잃어, 1534년에 가로 카와카미 마사히사가 카츠히사의 총애를 받던 간신을 죽여버리는 사건까지 이어났다. 카츠히사는 자신까지 살해당할까 두려워서 오스미로 도망쳤다가 1535년에 돌아와서 마사히사를 할복시켰지만, 이로 인해 마음을 굳힌 가신들은 카츠히사를 쫓아내 버리고 사네히사를 종가 당주로 옹립했다. 이로써 카츠히사가 완전히 배제되고[9], 정국은 짓신사이-타카히사 부자와 사네히사의 대립 구도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사네히사 측의 혼란상을 노린 타다요시와 타카히사는 형편이 될 때마다 계속 진격해, 1536년에 마침내 이쥬인을 거쳐 시미즈 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고, 1538년에는 사쓰마 남쪽 지방에서 제일 큰 사네히사의 거점이던 카세다까지 함락한 후 사쓰마 중부를 지배하던 국인중 가문들인 시부야 일가들과 우호 관계를 맺어 사네히사를 궁지에 몰았다. 그러자 사네히사는 남쪽에서 온 패잔병과 북쪽의 본대를 합쳐 1539년에 남하, 카세다 인근의 무라사키바루에서 결전을 벌였는데, 여기서 짓신사이와 타카히사가 크게 승리하면서 사네히사는 더 저항할 여력을 잃고 자신의 원래 본거지인 이즈미 성으로 도망쳤다. 이로써 마침내 시마즈 가가 통일되었다. 원래는 사네히사도 종가 당주이자 3개국의 슈고로 잠시나마 인정받았지만, 타카히사가 최종적으로 승리한 후 가문 기록에서 말살해버려 현재는 역대 당주나 슈고에 포함되지 않는다.

2.3. 가문 완전 장악

내전을 마친 타카히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최후의 반란이었다. 카츠히사에게 호의적이었던 방계 가문인 호슈 가가 국인중 13개 가문을 모아서 1541년에 반란을 일으켜, 타카히사의 매형 카바야마 요시히사가 다스리던 나카하마 성을 친 것이다. 타카히사 측의 병력이 열세할 정도였지만, 요시히사가 잘 버텨주는 사이에 타다요시와 타카히사가 뒤를 치는 데 성공하여 간신히 물리쳤다. 이렇게 반란군의 군세를 걷어낸 후 성을 잘 지킨 요시히사를 더 좋은 타니야마 성으로 전봉시켜 주고 13개 국인중 가문 중 규모가 가장 크던 혼다 가문에 나카하마 성을 주면서 이간질시켜. 반란군을 와해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반란을 진압한 후 1545년에 마침내 조정의 칙사 마치 스케마사를 맞으며 수도에 자신이 유일무이한 사쓰마의 지배자임을 확인시켰다.

칙사를 맞은 후부터는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다. 1545년에 1541년 반란의 주모 세력이었던 호슈 가문이 항복해왔고, 1549년에는 오스미 국에서 가장 강한 키모츠키 가문과 화친을 맺었다. 같은 해에 혼다 가문이 조정에 몰래 사신을 보내 종오위 관위를 받은 것을 적발하여[10], 이들을 공격해 승리하고 추방해버렸다.

1552년, 조정의 칙사와 막부의 사신이 동시에 당도했다. 조정에서는 타카히사에게 시마즈 종가 당주의 상징적 관직인 종5위 수리대부를 내려줬고, 막부에서는 타카히사의 맏아들 타다요시[11]에게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이름 한 글자 '요시'[12]를 내려 이름을 요시츠네로 바꾸게 했다.[13] 그 직후, 타카히사는 모든 시마즈 가문과 시마즈 가 방계 가문의 요인들을 불러들여 타카히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청문[14]을 쓰게 하였다. 사네히사를 제외한 모두가 기청문에 서명함으로써, 타카히사는 대내외적으로 완벽하게 사쓰마의 지배자이자 시마즈의 당주로 인정받았다.

2.4. 시마즈 최초의 센고쿠 다이묘

1550년, 거성을 이쥬인 성에서 원래 사쓰마의 중심지인 가고시마로 옮겼다. 그런데 원래 시마즈 종가가 쓰던 시미즈 성이 너무 협소해지자, 해안가에 새로 우치 성을 쌓아서 그곳을 거성으로 삼았다.

1552년 가문 통합에 성공한 후 본격적으로 삼주 통일에 돌입했다. 원래 시마즈 가는 사쓰마-오스미-휴우가 3개 국의 슈고 다이묘 가문이었으나, 무로마치 막부와 기존의 체제 및 권위가 붕괴하며 센고쿠 다이묘들이 대두되던 16세기 초에 문약하고 병약한 당주들이 연이어 등장하는 바람에 센고쿠 다이묘의 형태로 전환하는 것이 늦어졌다. 거기다 카츠히사-사네히사-타카히사 간의 전쟁까지 겪으며 휴우가 국을 상실했고, 오스미 국에서도 명목상의 패권만 남은 채 국인중들이 오스미를 갈라먹고 독립해 버렸다. 타카히사는 잃어버린 오스미와 휴우가를 되찾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았다. 우선 오스미 탈환의 전초작업으로, 하치만 신앙의 성지인 오스미쇼하치만구 신사를 재건하기로 하고 매형 카바야마 요시히사를 교토에 보내서 신을 모실 신체를 받아왔다.[15] 이는 오스미 제일로 권위 있는 신사를 시마즈 가의 휘하에 둔다는 뜻으로, 오스미의 패권이 시마즈에 있음을 과시하는 행동이었다.

1554년, 출병의 명분이 생겼다. 오스미 국인중 가문들인 가모 가, 케도인 가, 이리키인 가 등이 연합하여 사쓰마와 오스미를 잇는 요충지 카지키 성를 지키던 키모츠키 카네모리를 공격한 것이다. 타카히사는 위위구조를 시전, 동생 타다마사와 매형 요시히사를 카지키 성에 보내고 자신은 일족의 병사를 끌어모아 이리키인 가가 다스리던 이와츠루기 성을 타격했다. 시마즈 가의 역사와 일본 역사에서 이와츠루기 전투는 꽤나 중요하다. 시마즈 가문의 차원에서는 그 유명한 타카히사의 아들들 중 세 명이 이 전투에서 데뷔했기 때문이고, 일본사 차원에서는 최초로 조총 부대가 투입된 전투이기 때문이다. 오스미 연합군은 우선 움직이지 않았으나, 타카히사의 계책에 의해 이와츠루기 성에서의 전령이 당도하여 성이 시마즈군에 떨어지기 직전이라고 급히 보고하자, 결국 흔들려 이와츠루기 성으로 향했다. 타카히사는 성 주변에 포진해 있다가 오스미 연합군을 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요인 50여 명을 죽였다. 곧이어 가모 가를 몰아쳐, 가모 가의 본거지인 류가 성의 북쪽을 지키는 쵸사 성과 남쪽을 지키는 마츠자카 성을 모두 점령했다. 가모 가는 최후까지 저항하여 1557년에 류가 성 인근에서 결전을 벌였다. 타카히사의 말과 둘째 아들이 화살에 맞고 첫째 아들도 화살에 스칠 만큼 격전을 벌인 끝에 가모 가의 마지막 군세까지 박살냈고, 망했음을 직감한 가모 가는 결국 류가 성을 불태운 후 집단 도주했다. 이로써 타카히사는 오스미 국 서쪽을 모조리 장악하고, 오스미를 거의 장악한 키모츠키 가문 및 휴우가의 이토 가문과 대립하게 되었다.

2.5. 말년

타카히사는 중년에 접어들며 건강이 악화되었다. 1550년대까지는 심심찮게 친히 전장에 나갔으나, 오스미 토벌 즈음부터는 아들들을 내세워 전쟁을 치렀다. 그래도 건강이 많이 나쁜 것은 아니라 내정에서는 아버지 짓신사이의 조력을, 군사에서는 아들들의 조력을 받으며 재산과 군대를 모으고 국인중들을 마저 토벌하여 지역 통일을 완수하는 데 매진했다.

1558년에 오스미 키모츠키 가문의 당주 키모츠키 카네츠구가 이토 가와 동맹을 맺어 타카히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카네츠구는 타카히사의 처남이자 매형이었으나, 이제 막 자신이 오스미를 거의 장악한 시점에서 시마즈의 세력이 오스미로 뻗치기 시작하자 오랜 기간 공들였던[16] 전쟁을 감행한 것이다. 1560년에는 카네츠구의 동맹 이토 가까지 전쟁에 합류해 호슈 가문의 타다치카가 지키는 오비 성을 공격했다. 카네츠구는 1561년에 시마즈 가가 직접 다스리던 메구리 성을 함락시키고 타카히사가 보낸 구원군을 타케하라 산에서 연이어 격파하며 타카히사의 남동생 타다마사를 죽이는 기염을 토했다. 이에 불리한 형세에 빠진 타카히사가 어쩔 수 없이 오비 성에 보내두었던 히든카드인 둘째 아들 요시히로를 빼서 사쓰마-오스마 가도를 가로막자, 1562년에 이토 가가 몰아붙여서 오비 성을 함락시켰다. 오비 성에서 철수하여 사쓰마 방어에 투입되었던 타다치카는 카네츠구에게 공격당해 또 다시 패배했다. 카네츠구는 기세를 몰아 시마즈 가의 오스미 내 중요 거점이던 시부시 성을 떨어뜨리고 자신의 거성으로 삼기까지 했다.

이 상황에서 아들들을 이토 가를 막는 데 투입하여 카네츠구와의 전쟁에 돌릴 수 없었던 타카히사는 무리하여 친정에 나섰다. 당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던 카네츠구는 자신만만하여 타카히사를 맞았으나 지금까지 싸워 온 상대와 격이 다른 타카히사에게 완패했고, 시마즈 본대는 마구 밀고 들어가 결국 1566년 11월에 키모츠키 가의 본거지 타카야마 성을 점령했다. 실의에 빠진 카네츠구는 결국 시부시 성에서 할복하였다.

타카히사는 끝내 카네츠구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그 자신도 쇠약해졌다. 결국 1566년 연말에, 타카히사는 장남 요시츠네[17]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출가하고, 하쿠유라는 법명을 지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른 가독 상속은 건강 문제도 있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자신이 살아있을 때 장남을 지도자로 세워 두고 직접 교육하며 도와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1568년에 부친상을 치렀고 키모츠키 가 잔당과의 싸움에도 계속 참전하는 등 쉬지 못하고 큰 일들을 치르다가, 1572년 7월 15일, 향년 58세에 군사 요충지 카세다에서 사망했다. 사후엔 가문이 후원하던 절인 후쿠쇼지의 시마즈 가문 묘지에 묻혔다.

먼 훗날,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한 시마즈의 명성이 높아지자 타카히사의 사망 직후 초상화를 안치한 적이 있던 가고시마의 마츠바라 신사[18] 1869년 '야스쿠니무네이사타카히코노미코토'라는 이름으로 높여 모시며 신이 되었고, 1920년에 사망 350주년을 맞아 종삼위에 추증되었다.

3. 업적

가장 큰 업적은 토지, 재산, 군사를 모으고 지역 내의 국인중들을 토벌해 시마즈 가를 센고쿠 시대를 헤쳐 나가기에 걸맞은 가문으로 재편한 것이다. 국인중들과 유화 정책을 우선으로 하되 반항하는 국인중들은 확실히 진압했는데, 진압 후 독립성이 살아있는 기존 국인중들을 축출하고 지두(地頭, 일본어로 지토)를 파견하여 영지의 중앙집권화를 시도한 것이 훗날 사쓰마 행정의 상징인 지두중중제[19]로 발전되었고, 나아가 에도 시대의 외성제[20]로 진화했다. 그가 쌓아올린 토대는 그가 죽은 후 얼마 안 되어 그의 아들들이 삽시간에 키모츠키 가와 이토 가를 쳐부수고 규슈 통일 직전까지 이룩하는 데에 훌륭한 밑바탕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짓신사이와 함께 받은 별칭이 시마즈 중흥의 조이다.

그의 또 다른, 어쩌면 일본사에 미친 영향이 더 큰 업적은 조총 도입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것이다. 조총은 1543년 타네가시마 섬에 도착한 포르투갈 상인들이 섬의 영주인 타네가시마 토키타카에게 판매하며 일본에 처음 전래되었는데(철포전래 사건), 이 토키타카가 바로 타카히사의 가신이자 매부였기 때문이다. 토키타카는 조총 복제에 성공한 후 이를 바로 타카히사에게 진상했다. 신무기를 긍정적으로 검토한 타카히사는 이를 장기간 연구한 후, 1554년 이와츠루기 성 전투에 처음으로 투입함으로써 일본에서 최초로 조총 부대를 편성한 다이묘라는 기록을 얻게 되었다. 또 타카히사는 처음 조총을 헌상받은 후 이를 쇼군에게 진상하였고, 이를 통해 서일본 전역에 조총 붐이 일기 시작했다. 1550년대 초반에 개인적으로 조총을 사용하는 무사들의 기록이 등장하고, 1550년대 중반엔 시마즈 가를 시작으로 막부 및 미요시 가문 등의 서일본 다이묘들이 조총 부대를 정식 편성하기 시작했으며, 1550년대 후반에 가면 다케다 가문 등 동쪽의 다이묘들도 조총 부대를 편성하기 시작한다.

또, 대외교류를 진행하며 가문의 수입을 늘리기도 했다. 원래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일본은 명나라 감합무역이라는 형태로 공무역을 해왔는데, 막부 쇠퇴기와 센고쿠 시대 초반에 걸쳐서 감합 자격을 호소카와 가문과 오우치 가문이 독점하고 무역을 장악했다. 그래서 다른 다이묘들은 명과 교류하기 어려웠는데, 타카히사는 사쓰마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새로운 판로를 뚫었다. 바로 류큐 왕국이었다. 당시 류큐는 명과 정상적인 조공 무역을 통함은 물론 조선 및 동남아시아 지역과도 광범위하게 교역하는 국제 시장이었는데, 사쓰마는 일본에서 류큐에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다. 타카히사는 류큐 국왕 쇼겐 왕과 우호 조약을 맺고, 류큐를 통해 명과 밀무역을 하며 많은 부를 쌓았다.[21]

유명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최초로 받아들인 다이묘도 타카히사다. 하비에르는 1549년 4월에 인도 고아에서 출항해 8월에 가고시마에 상륙했다. 하비에르는 가고시마에서 주변의 문화와 정세를 살피며 잠시 체류했는데, 얼마 뒤 남만 사람들이 당도했다는 소식을 들은 타카히사는 하비에르를 불러 직접 대화를 나누고, 그에게 사쓰마 체류와 기독교 선교를 허용했다. 덕분에 하비에르는 시마즈 가문의 사찰 후쿠쇼지의 건물 한 채를 빌려 선교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하비에르는 후쿠쇼지의 주지승인 닌시츠 몬쇼와 친분을 쌓고 종교 토론을 나누며 불교와 신토에 대해 공부하고, 두고두고 도움이 될 일본인 개종자들도 만났다.

사실 타카히사는 기독교로 개종하기는커녕 훗날 불교 승려가 될 만큼 기독교 자체엔 큰 관심이 없었으나, 상술했듯이 대외교류를 늘리기를 매우 원했기에 이들을 매개로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뚫기 위해 기독교 선교를 허용했다. 실제로 타카히사는 우호관계 수립과 무역로 개설을 요구하는 친서를 써서, 하비에르 일행에게 부탁하여 고아에 있는 포르투갈의 인도 총독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타카히사의 예상과 달리 조총을 구하기 조금 쉬워진 것 말고는 딱히 포르투갈의 무역선단이 들어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고,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 파악을 끝낸 지역 신토계와 불교계, 심지어 국인중들까지 이교도를 몰아내라고 나날이 탄원하였다. 결국 그 다음 해인 1550년에 타카히사는 기독교 선교 허가를 철회했고, 하비에르는 '교토로 올라가 선교하겠다'라고 타카히사에게 전한 후 선교단을 데리고 가고시마를 떠나, 히라도로 떠났다.[22]

4. 가족

친아버지는 짓신사이로 더욱 유명한 시마즈 타다요시, 어머니는 삿슈 가 3대 당주 시마즈 시게히사의 딸로 칸테이 부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타카히사와 치열하게 싸워 패배한 사네히사의 고모이기도 하다. 그러나 남편 및 아들과 조카가 싸움이 났을 때는 거침없이 사네히사를 비난하며 가신들을 다잡기도 했다.

형제자매는 위로 누나가 2명, 밑으로 남동생이 2명에 여동생이 2명이었다. 첫째 누나 오미나미는 상술한 키모츠키 카네츠구와 결혼했다. 카네츠구는 시마즈와 전쟁을 시작한 후 1561년에 오미나미에게 이혼을 선언했으나, 오미나미는 이혼을 거부하며, 친정을 위해 키모츠키 가 내의 친 시마즈파를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다. 둘 사이에서 다음 대의 키모츠키 가 당주가 된 요시카네를 비롯해 1남 3녀를 낳았다. 둘째 누나 오스미는 시마즈의 먼 방계인 카바야마 가의 요시히사와 결혼해 2남 1녀를 낳았다. 첫째 남동생 타다마사는 타카히사가 종가를 물려받을 때 짓신사이에게서 소슈 가를 물려받았다. 형 밑에서 훌륭한 장수로써 동분서주했으나 1561년에 키모츠키 카네츠구에게 패하여 전사했다. 첫째 여동생 니시는 조총의 도입자 타네가시마 토키타카와 결혼했다가 그가 죽자 키모츠키 방계 가문의 카네모리와 재혼했다. 토키타카와의 사이에선 딸만 셋을, 카네모리와의 사이에선 아들 하나를 낳았다. 둘째 남동생 나오히사는 이복동생으로, 독특하게도 영지 보우노츠를 거점으로 하여 왜구 두목 노릇을 하며 명나라의 북로남왜 시기에 한몫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적질을 하며 시마즈 가문의 전쟁에도 종군했지만, 1562년에 요절했다. 1561년 메구리 성 전투 때 이복형 타다마사가 위기에 빠졌는데 못 본 체하여 형을 죽게 만들었다며 짓신사이의 비난을 잔뜩 받고 억울함에 분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아들 타다타케는 훗날 미야노 성을 받아, 시마즈 가 미야노죠 분가를 열었다. 막내여동생 카슌 부인은 자기 조카인 타카히사의 장남과 결혼했으나, 딸 하나를 낳고 요절했다.

부인은 셋으로 정식 결혼을 두번 했고 첩을 한번 들였다. 첫 부인은 키모츠키 카네츠구의 누나였는데, 키모츠키와 시마즈가 싸우기도 전에 기록이 사라져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부인은 셋소 부인으로, 국인중인 이리키인 가문의 여식이었다. 셋소 부인이 살아있는 동안 이리키인 가문은 타카히사의 든든한 동맹이 되어 주었지만, 셋소 부인마저 1544년에 요절한 후 그녀의 남동생 시게아사가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돌자 타카히사는 이리키인 가문의 영지 박탈을 선언했다. 소문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를 계기로 시게아사는 1554년 국인중 반란에 가담했다. 첩은 가신 가문인 혼다 가의 여식이었다.

자식은 딸이 없고 아들만 넷이었다. 위에서부터 시마즈 요시히사,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토시히사, 시마즈 이에히사라는 이름으로 제일 유명하다. 위의 세 아들은 셋소 부인 소생이고 막내 이에히사만 혼다 씨 소생이다. 네 사람은 시마즈 4형제라는 이름으로 자주 묶여 언급되며, 합심하여 센고쿠 시대 시마즈 가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1] 타부세카메가 성이라고도 한다. [2] 천황의 조정에서 받은 관직을 일컫는 말. [3] 무로마치 막부에서 받은 관직을 일컫는 말. [4] 시마즈 짓신사이로 더 유명하다. [5] 영민하고 유능한 주인이라는 뜻. [6] 다이묘보다 낮은 급으로 간주되는 향토 호족들을 일컫는 말. [7] 타카히사의 외사촌이었다. [8] 점령 직후 짓신사이는 난고 성의 이름을 나가요시 성으로 바꾸었다. [9] 이후 카츠히사는 오스미와 휴우가의 군사를 빌려 사네히사를 쳤지만 패배하고, 아예 타카히사에게도 다시 의지해보았지만 결국 축출되어, 외갓집인 분고의 오토모 가로 망명해 우류지마에서 사망했다 [10] 상기했던 칙사 마치 스케마사와 교토의 고노에 가문에게 많은 뇌물을 뿌렸다. 시마즈 가에게서 오스미 슈고 직을 찬탈하려고 벌인 정치적 모략으로 추정된다. [11] 타카히사의 아버지 타다요시와 동명이인이다. [12] 원래 이름 타다요시의 요시는 어질 량 자고 새로 받은 요시는 뜻 의 자다. [13] 이를 편휘라고 한다. 주군에게 편휘를 받는 것은 매우 명예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무로마치 막부 최후기의 쇼군들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유력한 다이묘와 우호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편휘를 자주 선물하고는 했다. [14] 중세 일본의 서약서 양식으로, 신들과 부처를 걸고 쓰는 최고 강도의 서약서였다. 센고쿠 시대의 주요 조약 문서는 모두 기청문 양식으로 꾸며졌다. [15] 카바야마 요시히사는 전장에서 와카를 써 화살에 묶어 날려 적과 교류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당대 사쓰마 제일의 와카 애호가였는데, 교토에 갔을 때 그 와카 실력으로 공가들을 매혹시켜서 끝내 고나라 천황을 알현하고 시마즈 가로 보내는 칙서를 받아오는 위업까지 달성했다. [16] 키모츠키 가는 시마즈 가와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여러 대에 걸쳐 혼맥을 맺어왔다. [17] 훗날 시마즈 요시히사로 이름을 바꾼다. [18] 현재 이름은 가고시마 신궁이다. [19] 지역 관료 역할을 하는 지두와 지두 밑에서 지역 군사 행정을 맡는 중중이라는 관리들을 사용하여 다이묘 직할지를 다스리는 제도. [20] 지두 직위가 신설된지 오래 되어 공식화되어 가면서, 사쓰마 번 내에는 일본 내의 다른 지역에는 없는 독자적인 말단 행정구역이 생겼다. 이를 일러 외성이라 한다. [21] 정작 쇼겐 왕은 타카히사가 가독을 물려준 후인 1570년에 뜬금없이 시마즈의 사신이 무례하다며 시비를 걸더니, 1571년에 시마즈가 다스리던 아마미 열도를 침공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그의 다다음대에 류큐 왕국은 시마즈 가에게 호되게 당하고 일본의 속국이 된다. [22] 종교에 큰 관심이 없었던 타카히사가 하비에르를 아껴, 그들이 불교계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을 당하기 전에 도피시켜 줬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