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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00:26:15

환곡제도

환곡에서 넘어옴
1. 개요2. 역사3. 조선
3.1. 조선 후기의 변질
4. 환곡 제도가 없을 경우5. 기타

1. 개요

환곡이란 보릿고개에 양곡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되받는 구휼제도로 삼국시대~조선시대의 사회보장제도이자 서민금융제도였다.

다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치면 꽤 고리였다. 환곡의 이자는 봄부터 가을까지 6개월 동안 20%(연리로 40%)였고, 조선후기에는 6개월에 10%(연리로 20%)였다. 물론 이 당시 사채 이자가 연 50%는 기본에 100%도 넘는 경우가 허다했고, 왕실직속 재산관리기관인 내수사에서 빌리는 대출의 금리가 시중 사채보다 훨씬 쌌음에도 30%였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기준으로는 충분한 서민금융제도였기는 했다.[1] 물론 목적이 목적인 만큼 진짜로 심각한 기근이 터졌을 때는 이자가 면제되었다.

2. 역사

농사 기술이 제대로 개발되지 않던 과거에는 봄부터 곡식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 때문에 아사하는 경우도 많아 국가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의 재상 을파소 진대법을 시행한 것이 최초의 환곡제도로 기록되고 있다. 다만 정확히는 을파소가 직접 진대법을 시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가 집권한 시기에 실행되었고 집권하기 전 농사일을 하면서 농민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자였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동기와 능력이 되는 자여서 그럴 것이라 추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훗날 고려에서는 의창에서 춘대추납의 형식으로 실시했고, 조선에서는 최초에 의창에서 이자가 없이 운영했으나 운영될 리가 없어 중간에 폐지되었고 고려 때의 물가조절기구였던 상평창을 환곡기구로 이용했다. 춘대추납에 이자율은 10분의 1이었다.

중국에도 송나라 때에 사창이라는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3. 조선

조선은 환곡 제도를 가장 철저하게 운영한 국가로, 중앙집권이 잘 이루어졌고 농민생활의 안정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환곡제도를 적극적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유통망도 우수하지 않아 한 곳만 기근이 터졌다고 다른 곳에서 쌀을 나눠주기도 힘든 구조라, 이런 제도가 없었다면 기근이 날 때마다 기근이 난 곳의 아사자가 속출했을 것이다.[2]

조선은 환곡 제도가 망가진 후기가 되기 전까지는 미친듯이 곡물 저장에 열을 올렸다. 이는 전근대 시절에는 기술의 결여로 인해 흉년 등 자연재해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환곡 비축량은 만기요람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데, 18세기 후반에는 무려 1천만 석에 달하는 양을 비축하고 있다. 이걸 쌀로 환산하면 6백만 석에 달하는 데, 조선정부의 평균 세입이 4백만 석이니 국가 재정보다 큰 사회보험기금을 운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또한 기근이 아닌 평상시에도 종자와 식량을 공급할 수 있었다.

동시대 중국도 환곡제도를 운용했는데, 중국이 비축한 식량은 쌀로 환산하면 2천 3백만 석으로 조선의 비축미 2배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인구대비로 보면 2억 명을 넘긴 중국보다 인구가 고작 1천 5백만인 조선이 1인당 곡물비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세도정치가 활성화되기 이전 조선은 중국보다 사회안전망이 튼튼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환곡은 원칙적으로 군량이다. 먹을 수 있는 사회보험기금이었던 셈. 당시에는 농약도 방부제도 없어서 쌀이 쉽게 썩어버리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쓸 수 있는 싱싱한 군량이 필요했기 때문. 박지원의 소설 「 양반전」에서 관찰사가 양반이 환곡을 타먹고 못 갚는 상황에 깊게 빡치면서 "어떤 놈의 양반이 이처럼 군량을 축냈단 말이냐"며 양반을 잡아 가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예 환곡 제도가 없던 일본에 비해 조선은 세입의 상당량을 환곡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비축미로 돌렸기에 일본에 비해 국가 경제도 활발하지 않았고, 쌓아올린 쌀에 비해 실제 쓰는 양이 터무니없이 적은 만큼 정부 예산이 언제나 빈약했다. 대신 국가가 휘청일 만큼 큰 비용을 환곡 제도에 쏟아부었기에, 비록 굶어 죽는 사람이 아예 안 나오는 건 피할 수 없었지만 전근대임에도 불구하고 비축미로 해결이 안 되는 대기근이나 큰 전쟁이라도 터지지 않는 이상 사람들이 굶어 죽는 일이 당대의 타 국가보다 적었다. 물론 조선도 대기근이 몇 번 있긴 했지만, 이 때는 환곡으로 비축한 쌀로도 답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당시의 인류로서는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

3.1. 조선 후기의 변질

조선 후기가 되면 환곡은 부세제도로 변질된다. 가뭄이 들어 곡식을 진대하면 반드시 손실분이 생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초부터 사창제 실시를 했으나 부작용이 있어서 폐지된다. 결국 명종 때 일분모회록을 실시해 10퍼센트의 이자를 받게했고 인조 때는 청나라 사신접대에 위해 30퍼센트의 이자를 수취하는 삼분모회록을 실시한다. 이렇게 원곡 손실분을 보전키 위해 부세제도화가 시작된다. 대동법 실시 이후 유치미보다 상납미의 비율이 높아지고 균역법 실시로 지방재정이 악화되자[3] 환곡을 부세제도로 적극 활용하게된다.

이 환곡의 문제는 조선이라는 국가 자체의 근본적인 한계와 연관된다. 조선은 당대로서는 최고 수준의 관료제를 만들었지만 최소한의 예산으로 운용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기조였고, 지방 재정 역시 같은 방식으로 돌아갔다. 대표적인 예로, 아전들이 무급으로 일했기 때문에 아전들의 부패는 정말 생계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러고도 지방 재정은 항상 부족했다.[4] 환곡은 복지정책이니 국가 예산을 넣어서 운영해야 할 것 같지만, 중앙도 지방도 부족한 조선의 재정으로는 이렇게 계속 운영할 수 없었다. 결국 환곡의 이자로 환곡이 돌아가는 상황이 되버렸고, 시간이 지나면서 지출은 늘어나는데 세수는 줄어드니 결국 환곡의 이자가 지방 재정 수입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시스템의 근본적인 문제라 관리들이 아무리 청렴해도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부패한 관리는 자기 먹을 것까지 챙겨서 문제가 더 커질 뿐.[5]

그것이 극대화된 것이 19세기이다. 소위 말하는 삼정의 문란에 포함된 환곡이 바로 이맘때쯤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환곡으로 주는 쌀에 모래를 섞거나 하는 식으로 실제 주는 쌀은 적으면서 이자를 받게 하는 방법을 쓰게 한 것이 대표적인 예. 이를 군정, 전정과 묶어 '삼정의 문란'이라고 하며 조선 말 민중봉기 등 사회혼란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세도정치기 시기 진주민란 이후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파환귀결 즉 환곡의 조세기능을 결당 2냥 씩 내는 걸로 개혁했지만 이내 취소, 흥선대원군이 지방의 명망있는 관리가 환곡을 운영하는 제도인 사창제를 실시하여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그 후로 다시 반동하다가 갑오개혁 때 와서야 시정된다. 고종 11년 호조판서가 고종에게 "그래도 사창제만한 게 없습니다." 라는 말을 하고, 이에 고종은 사창에서는 내주고 받는 게 민간이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 고종 11년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다음 해 일로 사창제가 성과가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4. 환곡 제도가 없을 경우

일본은 환곡 제도가 없었고 막대한 양의 생산곡물이 시장으로 흡수되었다. 그로 인해 국가 경제는 대단히 활성화되었으나, 일본 특유의 극심한 세금 탓에 정작 생산자인 농민들은 가난했고[6] 영주와 미곡상 등 관련산업종사자와 도시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갔다.[7] 국가재난에 있어서도 조선이나 중국이 중앙정부의 지휘하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것과는 달리 일본은 막부와 세력이 큰 영주들이 그나마 해결에 나서거나 외면해버리기 일쑤였다.

사실 큰 영주가 아니면 에도에 일정 기간 거주해야 하는 제도 때문에 평소에도 돈을 많이 쓰다 보니 개인적으로 구휼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재산이 별로 없는 영주도 많았다.[8] 그래서 그나마 다이묘들에 비해 재정에 여유가 있는 막부 직할령이라든지 20만석 이상의 규모가 큰 웅번들은 기근에 대해 자체적인 구휼정책을 펼쳤으나 가신들 봉록 주기도 벅찬 비교적 영세한 군소 다이묘들의 번에서는 제대로 구휼을 하지 않았다. 안 한 게 반 못한 게 반인 셈.

하지만 어쨌거나 돈이 돌기에는 상대적으로 나쁘지 않은 구조라, 에도 시대에 들어서며 일본 경제력이 상승하면서 전국적인 육해상 유통망의 완성, 전문유통업자의 등장, 유통망의 정비와 확충, 2모작과 2기작에 따른 농민당 생산량과 그에 따른 인구부양력, 농민의 상품작물을 소비하는 거대 도시 시장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막부의 중심이었던 에도. 법적으로 농업 종사가 불가하고 다이묘의 일가와 더불어 일정 기간 이상 거주해야 하는 지극히 소비적인 무사집단이 대규모로 상주했던 곳이다. 당연히 상품유통경제 발달에는 더할 나위없이 유리한 조건이다.

물론 조선도 유통망은 존재했고 소비시장이 있었으나 남도로 한정되는 제한적 2기작과 2모작과 대부분의 지역은 1기작 1모작이었다는 점, 부보상이라는 유통망은 인력에 의존하여 상품수송량이 적고 유동적이었다는 점, 전문적인 소비시장이 한정적이었던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 이런 유통망 저질상태(...) 때문에[9] 도로개편이 다 되고 나서야 보릿고개가 없어졌다.

다만 전근대 기술력으로 한반도에 도로를 놓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은 감안해야 한다. 연교차가 크고 여름에 강수량이 집중되는 한반도 기후의 특성상 포장 도로는 만들기 어려웠다. 이는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 새로깐 아스팔트 도보 블록 조차 한국에서는 집중 호우와 온도차로 인한 온도수축으로 구멍이 퍽퍽 패이고 갈라진다 . 이러니 전근대에 매년 도로를 재정비한다고 하면 민란 일어나기 딱 좋다. 그나마 현대에는 이런 재정비에 드는 인력을 고용하기에 일자리 창출이라도 되지 조선시대에는 인력으로 동원되는 것도 세금으로 쳤기때문에, 전문기술자가 아닌 일반인부들에게 돈으로 주는것도 없었고, 준다 해봐야 밥을 주는 정도였으니, 더더욱 불만대상일 것이다.

5. 기타

국사 과목에서는 꽤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으로 평가원이나 수능에도 빈번하게 나오는 주제 중 하나이다.중학교때 시험에서 환곡을 환국이라고 잘못 쓰는 경우가 학교당 하나는 있었을 것이다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가난한 농업국이고 일본은 상업국이라 일본군이 놀랐다고 하는데 일본 또한 농업국이며 일본군이 조선의 점령지에서 병량으로 소모한게 조선의 세곡과 환곡미들이다. 아무리 조선이 상업을 천시했다지만 일단 정부가 제기능을 못하던 전국시대의 일본은 도시화율이 조선 보다 낮았는데 가난해 보였다고 표현하는건 어불성설이다. 일본이라고 상업이 엄청 발달한 것도 아니고 메이지 시대에 이촌향도 현상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일본도 농업이 주 기반인것은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조선의 세곡과 환곡미 보존은 수준급이다보니 각 읍성마다 쌓여있는 환곡미 창고를 본 일본군이 놀랄수 밖에 없다.[10] 이마저도 정부가 백성의 구휼을 위해 쌓아 놓은게 아니라 영주들 처럼 왕 개인이 소유하며 대관해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1] 꼭 고리대금을 하지 않더라도 옛날의 이자율은 오늘날보다 높았다. 행정력과 교통망 및 통신망이 미비하고 제대로 된 금융기관이 없는 전근대에는 신용을 증빙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고, 작정하고 떼먹은 후 잠적하면 추적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실제로 농업 생산량이 더 높았던 18세기 일본조차 교호 대기근(1732년), 텐메이 대기근(1782년 ~ 1787년)등 대기근이 발생하였을때 을병대기근이후 18세기 조선은 기근으로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하였다거나 기근때문에 식인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3] 균역법을 실시함과 동시에 부족분을 세우기 위한 일련의 세수들이 있었다. 해당 세수는 원래 지방재정에 쓰이던 거였는데, 문제는 중앙정부에서 싸그리 걷어가면서 그 대체분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 [4] 때문에 적지 않은 관아들에서 활동비 명목으로 사실상의 급료를 지불해주었다. [5] 사실 이런 문제는 전근대에는 어딜가나 같았다. 유럽도 관료제를 택해도 관료들에게 줄 돈이 그렇게 많지 않거나 아전들처럼 없는 경우도 있었다. [6] 덤으로 웬만한 사무라이들도 가난했다. 이들은 봉급을 쌀로 받고 살았기 때문에 식량 이외의 물품을 사려면 먹을 양을 제외한 잉여 쌀을 팔아서 돈을 마련해야 했다. 그런데 상인들이 사무라이들의 봉급철에 맞춰 쌀가격에 장난질을 했기에 사무라이들은 꽤나 가난했다고 한다. 봉지가 있는 하타모토 같은 경우에도 사무라이보다는 낫겠지만 그리 부유하진 못했는데 휘하 사무라이들에게 줄 봉급과 품위유지를 위해 드는 비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농공상 제도와 달리 오사카의 거상이 대노하면 전국의 다이묘들이 벌벌 떨 정도였다고 한다. [7] 이러한 현상은 조선에서도 말엽에 살짝 나타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순조 말 도성 내에서 쌀 관련 폭동이 일어난 적이 있다. 당해에 강상 상인들이 사놓은 쌀이 많아 쌀값이 떨어지자 시전 상인들과 결탁해 쌀가게 10곳 중 1곳 외엔 모두 문을 닫아 쌀값을 일부러 올려놨다. 문제는 이게 도성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는 것. 쌀이 없는 것도 아니고 상인들 농간으로 쌀값이 올랐다는 것에 분노한 사람들이 쌀가게를 습격하는 등 제대로 난동을 부렸고 그 기세가 어찌나 셌던지 진압하러 간 각 군영의 병졸들은 그냥 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이후 처벌도 폭동의 주동자나 적극 가담자들을 죽이고 시전 상인들을 유배보내는 것으로 끝냈지만 백성들이 불공평하다며 분노를 터뜨리자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강상 상인 1명과 시전 상인 1명을 죽였다. [8] 애초에 막부 자체부터가 각 번들과 영주들이 딴 생각을 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돈을 허투루 낭비하여 딴짓하는데 쓸 돈이 없게 만들려고 했다. 참근교대도 이러한 일환에서 내놓은 정책이다. [9] 박지원 등의 중상학파가 지적한 점이 이것이다. 나라 안에 수레가 다니지 않아 온갖 물화가 제자리에서 나서 제자리에서 사라진다고 개탄했다. 유통망의 낙후성을 지적한 셈. [10] 이는 조선이 전근대 사회치고 중국과 더불어 높은 행정력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당장에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에는 1세기간 전국시대가, 그 이전에도 중앙정부가 뭔가 제대로 통치력을 발휘한 때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그 히데요시마저 사망 후 또 혼란기가 오고 그 뒤에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조차 조선만큼의 행정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환곡제도는 기본적으로 중앙의 행정력이 뒷받침되어야 실행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당시의 일본인 입장에서는 놀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