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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13 22:24:21

스테판 블라디슬라프

파일:스테판 블라디슬라프.jpg
이름 스테판 블라디슬라프
(영어: Stefan Vladislav, 세르비아어: Стефан Владислав)
출생 1198년
사망 1269년
직위 세르비아 국왕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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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왕국의 3대 국왕.

2. 생애

1198년경 스테판 네마니치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딸 에우도키아 앙겔리나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으로 스테판 라도슬라프, 동생으로 사바 2세, 콤네나를 두었다. 1201년 어머니 에우도키아가 쫓겨난 뒤, 부친은 엔리코 단돌로의 손녀 안나 단돌로와 재혼해 3명의 아들(성 사바 2세, 스테판 블라디슬라프, 스테판 우로시 1세)을 낳았다. 1227년 부친이 사망하고 형 라도슬라프가 왕위를 계승했다. 동생 사바 2세는 수도자가 되어 훔의 주교가 되었고, 나중에 세르비아 대주교를 역임했다. 이때 그도 기록은 부족하지만 영지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라도슬라프는 몹시 유약하여 아내 안나와 장인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이끌어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그러던 1230년 4월, 테오도로스가 8만 대군을 일으켜 불가리아 제2제국으로 쳐들어갔다가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이반 아센 2세의 수천 기병대에게 대패하고 사로잡혀 실명형헤 처해진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이피로스는 급격히 쇠락하였고, 장인에게 의존하던 라도슬라프의 입지 역시 약화되었다.

1233년 가을, 불가리아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 귀족들은 그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라도슬라프는 급히 세르비아를 탈출하여 두브로브니크로 피신하였다. 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그는 형이 라구사와 손잡고 복위를 꾀하는 정황을 포착하자 라구사를 징벌하겠다고 위협했고, 결국 라구사는 라도슬라프와 손을 잡지 않기로 했다. 당시 세르비아 대주교이자 라도슬라프의 삼촌인 사바 대주교가 직접 나서 중재하였고, 그 결과 블라디슬라프가 이반 아센 2세의 딸 벨로슬라바와 결혼하고, 라도슬라프는 복위를 다시는 노리지 않고 수도자로 여생을 보내는 조건으로 세르비아에 돌아오는 걸 허락받았다. 사바는 돌아온 라도슬라프의 머리를 직접 잘라주고 그에게 요반이라는 수도명을 부여했다. 이후 사바는 성지 순례를 떠난 뒤 1235년 귀국하던 중 불가리아 영내에서 사망했다. 불가리아는 유해를 세르비아로 보내줬고, 블라디슬라프는 밀레셰바 수도원에 안장하고 삼촌을 성인으로 시성했다.

그는 자신의 즉위에 도움을 준 불가리아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던 1230년대 후반, 헝가리 왕국이 불가리아로부터 브라니체포와 베오그라드를 공략했다. 이후 세르비아 쪽으로 공격 방향을 돌린 그들은 1237년 세르비아 북부의 훔을 공격했다. 블라디슬라프의 친척 톨옌은 이들에 맞섰지만 연전연패했고, 북부 일대의 많은 영토가 헝가리의 영토로 들어갔다. 블라디슬라프는 헝가리의 국교인 가톨릭과의 관계를 끊고, 훔을 자신의 작위에 추가하며 그곳의 권리를 주장했다. 123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보스니아에서 세력을 굳힌 보고밀파를 정벌하기 위해 십자군을 선포했다. 보스니아 십자군을 이끈 칼로만[1]은 보스니아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였고, 보스니아 외곽 지대를 장악하였다. 하지만 보스니아 중심부를 공략하지는 못했고, 보스니아 공작 마테즈 니노슬라프는 라구사로 피신한 뒤 블라디슬라프의 공세에 대비해 라구사를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라구사에 대한 세르비아의 영향력은 사라졌다.

1241년 5월 또는 6월, 블라디슬라프의 든든한 동맹이었던 불가리아 차르 이반 아센 2세가 사망했다. 뒤를 이어 칼리만 아센 1세가 즉위했지만, 고작 7살밖에 안 된 어린 아이였다. 게다가 1242년 바투 칸의 몽골군 별동대가 불가리아 북부 일대를 유린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타르노보, 프레슬라프, 이사체아 등 적어도 12개의 불가리아 요새가 파괴되었다. 이후 불가리아는 킵차크 칸국에 공물을 바쳐야 했다. 한편 몽골군 본대는 헝가리에 쳐들어갔고, 헝가리 왕 벨라 4세는 친히 맞서 싸웠지만 모히 전투에서 참패하고 랍 섬으로 도주했다. 몽골군은 여세를 몰아 독일로 쳐들어가려 했지만, 오고타이 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귀국하기로 했다. 다만 그들은 다뉴브 강 하류를 따라가면서 세르비아, 보스니아, 불가리아를 횡단했고,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이때 세르비아의 도시들 중 코토르, 드리바스트, 스바치가 파괴되었다.

든든한 동맹이었던 불가리아가 쇠락한데다 몽골군이 회군길에 세르비아를 들리면서 심각한 파괴를 자행했기 때문에, 블라디슬라프의 입지는 매우 취약해졌고 민심은 등을 돌렸다. 1243년 봄, 귀족들은 정변을 일으켜 블라디슬라프를 몰아내고 블라디슬라프의 이복동생인 스테판 우로시 1세를 왕위에 올렸다. 블라디슬라프는 감옥에 갇혔지만, 아내 벨로슬라바는 제타 일대에서 항전했다. 그해 여름, 두 형제는 더 이상의 내전은 이롭지 않다고 판단하고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블라디슬라프는 스테판 우로시 1세가 세르비아의 왕이 되는 걸 인정하는 대신 제타를 통치하며 '제타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 후 제타에서 조용히 지내다 1269년에 사망했다.

[1] 헝가리 왕 언드라시 2세의 아들이자 슬라보니아 공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