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공식 홈페이지
1. 개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에 전시되어 있는 삼국시대 7세기 경 한국에서 제작한 금동 반가사유상. 박물관에서 부여한 정식 명칭은 그냥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이지만 다른 유수의 반가사유상과의 구분을 위해 흔히 '수염이 그려진 금동반가사유상'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2. 내용
높이 20.9cm.
7세기 경 삼국시대에 한국에서 만들어진 금동제 반가사유상으로, 인동무늬(忍冬文)가 새겨진 보관을 쓰고 팔찌, 연화족좌, 요패 드리개 등을 세밀하게 표현한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특히 얼굴의 이목구비를 상세히 표현하였고, 무엇보다 코의 아랫쪽에 콧수염을 자세히 묘사하였는데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불상 가운데 이렇게 수염이 표현된 예는 이 상이 유일하다.
상의 머리에 솟은 보관의 경우 원래는 멀쩡했었으나, 현재는 알 수 없는 어떠한 이유로 인해 끝부분이 외부 충격을 받은 듯 뒤로 약간 휘어져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남아있는 고대 반가사유상은 그렇게 많지 않다. 전 세계를 통틀어 총 70여점이 현존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그 중 한국에 20여점, 일본에 40여점, 총 60여점이란 대부분의 수량이 한일 양국에 남아있어 두 나라가 고대에 반가사유상의 종주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 ‘반가사유상’은 한국 20점·일본 40점 등…남아 있는 ‘금동’은 70점 특히 기술의 발전으로 반가사유상의 재질, 구성성분에 대한 연구가 점차 진척되면서 현재 일본에 소장된 반가사유상 중 일부가 한반도에서 건너온 것으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당시 한국이 반가사유상 제작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 반가사유상은 그 중에서도 작품성이 굉장히 뛰어난 작품 중 하나라서 지금으로부터 1,400여년 전 당시 한국의 금속공예술이 세계적 기준으로 굉장히 월등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현재 이 불상의 정확한 제작 장소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불상의 재질 및 양식 등을 고려했을 때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불상이라는 주장은 거의 없으며, 당시 한반도 남부에 위치했던 백제와 신라 중 한 곳에서 만든 곳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옛 백제 지역인 충청도와 옛 신라 지역인 경상도에서 이 불상의 제작국을 두고 한동안 서로 알력이 있었다.
그러다 1953년 12월에 경상북도 영주시의 숙수사지(宿水寺址)에서 숙수사 반가사유상이 발견되면서 학설에 일대 변화가 생겼다. 신라시대 사찰이었던 숙수사는 고려 후기의 유학자인 안향(安珦)이 숙수사에서 신세를 지면서 수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했다는 역사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말기까지 중흥하였으나 조선이 들어선 후 어느샌가 사찰 건물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고 그 부지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소수서원이 들어선 상태다. 6.25 전쟁 직후인 1953년 12월에 학계에서 이 소수서원 내 옛 사찰부지를 조사하던 중 신라시대 6세기 경 청동불상 25구를 발견하였는데 그 중에 숙수사 반가사유상 하반신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 숙수사 불상이 비록 한세기 전인 6세기에 제작된 것이라 좀 더 고졸한 편이긴 하나 전체적인 양식이 본 불상과 거의 똑같았던 것이다.(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장방형의 하반신 비율, 도식적인 군의자락, 일반적인 주조방식과는 달리 상 전체를 한번에 주조한 점 등)
때문에 지금은 본 불상 또한 경북 영주 일대에서 제작한 작품인 것으로 여기는 학자들이 크게 늘어났다. 물론 장소 비정이 완전히 확정된 것은 아니며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그저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으로만 남아있다.
또한 본 금동반가사유상은 현재 대한민국 국보 제78호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양식적인 면에서 유사한 점이 매우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작품은 대좌의 소용돌이 문양 및 파상당초문, 그리고 치맛자락의 하트형 물결무늬 등이 현재까지 발견된 반가사유상 중 국보 78호와 가장 많이 닮은 작품이다.
2021년에 동국대학교에서 1) 영주 숙수사지 반가사유상과 본 수염이 그려진 금동반가사유상이 국보 제78호와 양식적으로 거의 유사한 점, 2) 고 황수영 박사가 1995년 6세기 후반 것(옛 명칭 국보 78호)을 두고 경북 영천 소백산 폐사에서 나왔다고 확인한 점, 3) 국보 제78호에 대해 당시 일본 학자들이 전부 영주와 가까운 경북 안동 지역에서 발견했다고 일제히 논문에 발표한 점, 4) 당시 다른 국가와는 달리 유독 신라가 화랑제도의 특이성으로 인해 반가사유상을 신앙대상으로 존숭하였고 이로 인해 확인된 대부분의 반가사유상이 경상도 일대에서 만들어진 점, 5) 신라에서만 유행하던 섭론종 계열[1]에서 미륵보살상의 일환으로 반가사유상을 만든다는 점 등을 근거로 국보 제78호의 제작 장소를 경북 영주시 일대로 비정하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한국미술사연구소와 불교미술사학회의 검토를 거쳐 학계에 승인받기도 했다. 다만 여기에 대해 여러 이론이 존재하고 논문에서도 장소를 완전히 확정한 것은 아니니 그냥 국보 제78호 조성지역으로 추정되는 여러 후보 장소 중 현재는 영주 쪽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정도로만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옛 백제 지역의 연구자들은 이에 반발하며 본 불상보다는 백제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활석제 석조반가상 하반신이 국보 제78호와 더 닮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향신문 실제로 백제 부소산성에서 활석을 깎아 제작한 석제반가상의 하반신도 둥근 U자형 옷주름 양식을 가지고 있긴 하다.
3. 외부 링크
[1]
신라의 원광법사(圓光法師)가 한국에 처음으로 들여왔고 이후 신라 지역 일대에서 유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