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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개명 | 송인철(宋寅轍)[1] |
자 / 호 | 윤화(允和) / 해려(海旅) |
법명 | 창허(蒼虛) |
법호 | 진산(晋山) |
본관 | 야성 송씨[2] |
출생 | 1896년 1월 3일 |
대구부
성주군 유곡면 고산리 (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공동마을)[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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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1년 3월 16일[4] |
전라북도 이리시 | |
종교 | 원불교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83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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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송인집은 1896년 1월 3일 대구부 성주군 유곡면 고산리[5]에서 아버지 송성흠(宋聖欽)과 어머니 서산 류씨(瑞山 柳氏) 류춘연(柳春淵)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6]1919년 3월 파리 강화 회의 독립청원서 서명운동에 유림을 도와 협조하는 한편, 전국적으로 경성부에서의 3.1 운동의 영향으로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기정(李基定)을 찾아가 성주군내의 유림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에 군내의 유력한 유림 이기정·성대식(成大湜)· 송수근·송우근(宋祐根)· 장석영· 송훈익·김희규(金熙奎)· 송준필·이봉희(李鳳熙)· 송회근· 송문근· 송규선· 송천흠 등과 성주면 장날인 4월 2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대가면 옥화동교회의 유진성 목사가 중심이 되어 기독교측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유림들과의 협의하에 공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2일 오후 1시경, 계획대로 경산동 관제묘(關帝廟) 뒷산에 모여 있던 기독교도들이 먼저 성주시장을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시장에서 대기중이던 그는 60여명의 유림들과 함께 3천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겁을 먹은 일본 경찰의 발포로 부상자가 발생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시 후퇴하였으나, 이날 밤 10시경까지 독립만세시위를 계속 전개하였다.
그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으로 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그는 피신하여 옥고를 면하였다. 그러나 그해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그는 변성명하고 상경하여 은신해있다가, 1924년 12월 12일 조부 송정흥(宋廷興)이 별세하자 고향으로 내려와 가업을 이었다. 1926년 송규선 등과 함께 고향 땅에 동창학원(東昌學院)[7]을 개설하여 문맹퇴치운동에 주력하였으며, 정미소와 양조장을 경영하는 등 사업확장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토지중개인 장길산으로부터 사기를 당하여 가산을 탕진하였다.
이후 다른 사람의 여행증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가내공업을 운영하는 한편, 재일동포들과 손을 잡고 배일사상을 고취하며 지하공작활동을 전개하다가 8.15 광복을 맞아 서울특별시로 돌아왔다. 이때 서울역과 남대문에서 전재동포구호사업을 전개하던 송도성을 만나 유일학림 설립계획을 듣고, 송규의 권고로 1946년 4월 22일 원불교 익산총부에서 입교 수속을 밟았다. 그해 유일학림이 설립되자, 교수에 임용되어 봉직하였으며,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원광중학교가 설립되자 서무주임에 선임되어 근무하였다. #
1961년 3월 16일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에서 별세하였다.
사후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4년 9월 7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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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충숙공파(고산리)-용계공파 29세 인(寅) 항렬.
[3]
야성 송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송규선·
송문근·
송수근·
송우선·
송준필·
송천흠·
송회근·
송훈익도 이 마을 출신이다.
[4]
음력 1월 30일.
[5]
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공동마을
[6]
어머니 서산 류씨는 아버지 송성흠의 둘째 부인이다. 첫째 부인
전의 이씨 이근한(李根漢)의 딸은 슬하에 맏형 송인식(宋寅軾)을 두었고, 셋째 부인
덕산 이씨(德山 李氏) 이영수(李榮壽)의 딸은 슬하에 남동생 송인찬(宋寅贊)을 두었다.
[7]
현재 성주 초전초등학교의 전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