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성방(聖放) / 연암(蓮菴) |
본관 | 야성 송씨[1] |
출생 | 1884년 9월 22일 |
경상도
성주목 유곡방 금연동 (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금연동마을)[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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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1년 2월 27일 (향년 76세) |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동포리 동산이마을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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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송훈익은 1884년 9월 22일 경상도 성주목 유곡방 금연동(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금연동마을)에서 아버지 송인호(宋寅皞)[3]와 어머니 함양 박씨 박주혁(朴周赫)의 딸 사이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17촌 지간의 족숙 송인혁(宋寅奕)에 입양되었다. 일찍이 22촌 지간의 족손 송준필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으나, 가정형편 때문에 15세 때 학업을 포기하고 농사일에 전념하였다. #1919년 경성부에서 일어난 3.1 운동에 이어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함성이 전국적으로 퍼져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성주군의 유림들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미 3월 28일 성주면 장날에 선남면에 사는 이현호(李玄琥) 등이 독립만세를 부른 일이 있으나 큰 운동으로 확대되지는 못하였고 4월 2일 유림측과 기독교측이 연합전선을 펴 봉기함에 따라 비로소 본격적인 만세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때 월항면의 유생 이기정(李基定)은 전국 각지의 독립운동 봉기상황을 알게 되어 같은 유생이자 동지인 송인집과 더불어 성주군내 양반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이들은 그후 야성 송씨 문중에서 유력한 수 명을 불러내어 운동을 협의한 후 성주면 장날에 거사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군내 유림에게 연락하여 규합체를 형성하는 등 의거준비를 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2일 성주면 장날 모여든 700∼800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으나 일본 경찰의 발포로 계속적인 만세시위가 어려워지자, 산 위로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미결 기간을 합하여 총 11개월 18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61년 2월 27일 별세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