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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13:23:23

손봉현

성명 손봉현(孫鳳鉉)
이명 손말봉(孫末鳳)
아호 승휘(昇徽)
본관 밀양 손씨[1] #
생몰 1894년 3월 11일 ~ 1969년 7월 10일
출생지 경상남도 밀양군 상동면 가곡리
사망지 경상남도 밀양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논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손봉현은 1894년 3월 11일 경상남도 밀양군 상동면 가곡리에서 부친 손진옥(孫振玉)과 모친 황유인(黃柳仁)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7살 때 서당에 들어가 동몽선습, 소학, 대학을 비롯하여 사서삼경을 익혔고, 15살 때부터는 산외면 남기리 장승마을에 있던 한의원의 보조원으로 들어가 한약재를 다루는 법과 침, 뜸을 익혀 평생의 직업으로 삼고자 했다. 1911년 5월, 그는 밀양군 단장면 사연리에 거주하던 김태진의 장녀 태동(台童)과 혼인한 후에 스스로 한약방을 열어 가솔들의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1925년경, 그는 동서 손호와 지인인 김홍규, 이병묵 등으로부터 윤세복의 활약상을 전해듣고 자신도 참여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들로부터 함께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그는 즉시 한약방 일을 접고 1925년 3월에 북만주에 있는 영안 지역으로 건너가 윤세복이 이끄는 대종교에 입교했다. 이후 대종교 교인들이 중심이 된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정서를 주축으로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조직한 <신민부>의 일원으로서 활동했다. 이후 1927년 4월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김좌진으로부터 일제 고관과 친일 분자의 주살, 주요시설의 폭파, 군자금 모집 등의 밀명을 받은 그는 손호 등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여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수행했다.

1927년 11월 초순, 그는 자신의 장인이자 밀양군 일대의 부자인 김태진을 찾아가 군자금 3천원을 받아냈고, 이 과정에서 처남인 김용출을 포섭하여 북간도로 데려가 대종교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도중에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8년 7월 31일 제령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1년 8월 출옥한 그는 밀산 당벽진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한의술을 교포들에게 제공하며 1940년까지 동경성 일대에서 살았다. 그러나 정세가 갈수록 불안해지자 1941년 봄 밀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밀양에서 만석꾼으로 일컫던 손영돈의 집에서 집사 일을 맡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신했고,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침, 뜸 등 한의술로 먹고 살다 1969년 7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손봉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논란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가 편찬한 <손봉현 공적조서>에는 그가 대종교 신자이며 장인 김태진을 상대로 3천원을 받아낸 것은 군자금을 모집해 신민부에 송금하기 위해서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경성종로경찰서가 기록한 '손봉현 심문조서'에 따르면, 손봉현은 손호 등과 함께 해원교(解怨敎)라는 종교단체에 가입하고 장인에게 "해원교를 믿으면 무엇이든지 다 되고, 또 그 교의 본부에 가면 학업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함께 가보자"고 해 장인을 현혹시킨 뒤 그로부터 3천원을 빼앗아서 해원교 밀양지부장 윤치백(尹致伯)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에 따른다면 그는 독립운동에 가담한 게 아니라 사이비 종교에 가담하여 장인으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이다. # 사실 그가 신민부에 가담하여 김좌진으로부터 밀명을 받고 귀국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1] 교동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