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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급행정구 시할구 55, 현급시 21, 현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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沛縣/沛县
페이현 / 패현
1. 개요
중국 장쑤성 쉬저우시에 위치한 현이다. 늪이 많아 한때는 패택(沛澤)이라고 불렸다. 한나라를 건국한 한고조 유방의 고향이었으며, 한나라의 부흥을 꾀한 유비가 서주자사 시절 머문 소패(小沛)로도 유명하다. 현급시도 아닌 일개 현인데도 무려 120만 명이 넘는 인구를 자랑한다. 물론 면적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쉬저우 시의 시내 인구에 근소한 차이로 못 미치는 수준이다. 시내에는 패성 유적이 관광지로 조성되어 있어《 삼국지연의》의 팬들이 즐겨 찾는다.2. 역사
- 춘추시대: 초기 송나라(宋)의 영토였으며, 패읍(沛邑)이 설치되었다. 제나라, 초나라, 위나라 등이 주도권을 다투었다.
- 진나라(秦): 군현제 체제에서는 사수군(泗水郡)이 설치되고, 그 아래에 패현(沛縣)이 놓이게 되었다.
-
초한전쟁:
한고조 유방과 주요 공신의 대부분이 패현 출신이었다. 한나라 개국 초기에 이 동네 출신 재상이 4명이나 되었다. [1]
이 때문에 한나라 시대에 패현은 "천고의 용이 나는 땅, 제왕과 장수, 재상의 고을"(천고용비지, 제왕장상향 - 千古龍飛地,帝王將相鄉)이라고 불렸다. - 전한: 한고조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자, 사수군은 한나라의 제후국이었던 초국(楚國)의 영토가 되었다. 오초칠국의 난 이후 초국의 영토를 대거 삭감하면서 사수군 중 초국에서 떼어낸 부분으로 패군(沛郡)을 만들었다. 패현은 패군에 속했다. 또 양나라가 처벌을 받으면서 옛 양나라 땅 5현을 가져왔는데, 옛 소하의 봉국인 차현(酇縣)과 나중에 조조의 고향이 되는 초현(譙縣)도 이때 패군으로 넘어왔다.
- 후한: 패군은 패국(沛國)으로 바뀌었다. 이전 패군의 서남부는 여남군에 이관되었다.
- 위나라: 패국 초현 출신인 조조는 초현(譙縣)을 기반으로 초군(譙郡)을 설치하고, 패군의 영역을 대부분 떼어냈다. 패군은 불과 9개 현을 가진 작은 군으로 축소되었다. 이제 한나라의 천하는 끝나고 위나라의 천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한고조의 고향 패현에 치소를 둔 패군에 속했던 본인의 고향 초현을 패군에서 분리승격시켜 초군을 설치함으로써 보여주었다.
- 남북조시대: 북제에서 패현이 폐지되며, 북주(北周)에 의해서 패군은 팽성군에 편입되어 사라졌다.
- 수나라: 패현이 다시 설치되었다.
넓게 보면 이 동네에서만 개국 군주가 3명이나 나왔다. 바로 전한 태조 고황제 유방과 조위 태조 무황제 조조, 그리고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며[2] 유방이 세운 한나라를 조조가 멸망시킨 것은 유명하다. 그 외에도 전한을 세운 개국공신들의 대다수가 이곳 출신으로, 이 동네 한량은 황제가, 개백정과 마부는 장군이, 동네 관리와 교도관, 건달, 병졸은 재상이 되어 버린 묘한 동네다. 그래서 나온 말이
풍패지향
(豐沛之鄕)
인데, 한고조 유방의 고향이 '풍읍 패현'이라서 건국 군주의 고향을 일컫는 관용어로 쓰였다. 심지어 중국도 아닌 한국의
조선 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고향인
함흥시나 본관인
전주시를 가리켜 '풍패지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豐沛之鄕)
3. 소패(小沛)
소패는 전한· 후한시대 예주 패국 패현의 별명이었다. 본래 패국의 중심지가 패현이었으나, 치소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패국과 패현을 구분해서 불러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에 '작은 패'라는 별칭이 붙은 것이다. 위나라 시기에 패국의 치소가 패현으로 다시 돌아왔다.소패의 성에 촉한의 소열제 유비, 군웅 여포 등이 주둔했다. 과정이 상당히 복잡한데, 우선 유비가 서주목 도겸의 요청을 받고 소패성에 주둔했다.[3] 유비가 서주목이 되자 여포가 유비에게 의탁해왔고, 유비는 여포가 소패성에 주둔할 수 있도록 했다. 유비가 여포에게 뒤치기당해 서주를 빼앗기자 유비는 여포와 협상 끝에 소패에 주둔했고, 그러다가 여포의 공격을 받아 소패에서 쫓겨나게 된다.
[1]
재상이라고 퉁쳤지만 소하와 조참은 신하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인 상국이었고, 소하와 조참이 죽은 뒤(그리고 여산이 죽은 뒤) 상국 자리가 사실상 공석이 되고 나서야 왕릉과 주발이 임했던 승상(상국의 비서)이 최고의 벼슬 취급을 받게 되었다.
[2]
본적이 이곳이다.
[3]
소패는 당시 예주 소속이었지만, 서주의 주요 도시인 팽성과 딱 붙어 있어서 서주의 세력권으로 취급되었다. 지금도 강소성의 북서쪽으로 튀어나온
땅거스러미에 위치해 있어 강소-하남-산동-안휘 4성의 경계 근처에 있고, 말이 강소성이지 위치가 위치라 강소성의 '소'를 담당하는 소주(쑤저우)와 '강'을 담당하며 성도인 난징과는 성 내에서 거의 대척점에 있으며, 여러모로 강남ㆍ회하보다는 화북ㆍ중원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