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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덜랜드 AFC/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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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영광의 초창기 시절 (1879~1957)2.2. 재정위기와 흔들리는 위상, 그와중의 두번째 FA컵 우승 (1957~1987)2.3. 밥 머레이 시대와 신구장으로의 이전 (1987~2006)2.4. 나이얼 퀸과 엘리스 쇼트 시절 (2006~2016)2.5. 충격의 백투백 강등과 새로운 시작 (2016~)

1. 개요

선덜랜드 AFC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

2. 역사

선덜랜드의 풋볼리그 참가 100년을 맞이해 제작한 다큐멘터리 비디오(1990)

2.1. 영광의 초창기 시절 (1879~1957)

1879년에 선덜랜드에서 근무하던 교사 제임스 앨런과 그를 따르는 교사들에 의해 '선덜랜드 지역 교사 축구팀(Sunderland and District Teachers A.F.C)'이라는 이름으로 창설, 1881년부터 현재의 '선덜랜드 AFC'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일반인도 가입 자격을 부여하였고 1890-91 시즌부터 풋볼 리그에 참가하였다. 이후 풋볼 리그에서 1891-92, 1892-93, 1894-95, 1901-02, 1912-13, 1935-36 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1937년 FA컵 우승을 차지하는 등 명문으로 손꼽혔다. 밥 카일이 1905년 8월부터 1928년 5월까지 약 23년간 감독으로 있었는데 이것이 현재까지도 선덜랜드의 최장기간 감독직이다.

2.2. 재정위기와 흔들리는 위상, 그와중의 두번째 FA컵 우승 (1957~1987)

1957년에 선수들에게 규정보다 더 많은 임금을 준 것이 들통나 5천 파운드[1]의 벌금을 선고 받고 회장과 3명의 이사가 해임당했는데 이런 타격으로 1958년에는 클럽이 1890년부터 풋볼리그에 참가한 이래 역사상 처음으로 2부 리그로 강등된 후 1~2부 리그를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1973년에 FA컵 우승을 하고 1985년 리그컵 준우승을 거두기도 하였으나 1986-87 시즌에는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3부 리그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특히 1973년 FA컵 결승전은 당시 2부 리그였던 선덜랜드가 1부 리그에서도 잘나가고 있던 리즈 유나이티드를 1:0으로 꺾고 우승한 경기로 선덜랜드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날 결승골의 주인공이 선덜랜드의 레전드이자 후에 부산 아이파크에서 감독도 했었던 이안 포터필드다.

2.3. 밥 머레이 시대와 신구장으로의 이전 (1987~2006)

1987년 3부로의 강등 이후 새 구단주인 밥 머레이 경의 체제하에 1987-88 시즌에 3부 리그에서 우승하고 바로 승격에 성공하였으며 1990년에는 1부 리그로까지 승격하였다. 다음 시즌 다시 2부 리그로 강등되었으나 1992년 FA컵 준우승을 차지하였고, 1995년에 피터 리드가 감독으로 취임한 이후 1995-96 시즌에 2부 리그에서 우승하고 다시 프리미어 리그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1996-97 시즌에 최종전 윔블던 원정에서 18위였던 코번트리 시티에 업셋을 당하며 아쉽게 18위로 2부로 강등되었다. 1997년에 99년간 홈구장이었던 로커 파크를 떠나 새 구장인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로 이전했다. 1997-98 시즌 2부리그에서 간발의 차이로 3위를 기록한 뒤 셰필드 유나이티드를 꺾고 올라간 플레이오프 결승에서 찰튼 애슬레틱을 만나 4:4 혈투 끝에 승부차기로 패해 아쉽게 승격이 좌절되었으나 1998-99 시즌 2위 브래드포드와 승점 18점차인 31승12무3패 승점 105점이라는 압도적인 기록을 세우고 2부 리그 우승을 하며 프리미어 리그로 복귀하였다.

1999-2000 시즌 승격하자마자 프리미어 리그에서 시즌 중반에는 2위와 3위에 오르는 돌풍을 일으키며 7위를 기록했는데 케빈 필립스 나이얼 퀸과 환상적인 빅앤스몰 투톱을 구성하며[2] 30골로 EPL 득점왕에 오름과 동시에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하였다. 2000-01 시즌에도 중반기 2위까지 올라갔으나 페이스가 급락하며 전 시즌에 이어 7위에 올랐다. 그러나 2001-02 시즌에 리그 최소 득점인 29득점만 기록하는 극심한 골가뭄 속에 17위로 내려앉은 뒤 2002-03 시즌에는 이적시장 데드라인에 패닉바이로 나이얼 퀸의 대체자를 마련하기 위해 노르웨이 대표팀의 공격수 토레 안드레 플로를 클럽 레코드로 영입했지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고 4승7무27패, 21득점 65실점에 승점 19점[3]이라는 처참한 성적[4]으로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이 과정에서 7년 간 선덜랜드를 이끌던 피터 리드와 그 후임이었던 하워드 윌킨슨[5] 감독이 경질되었고, 아일랜드 대표팀 감독이던 믹 맥카시가 2003년 3월에 선덜랜드에 부임하였다. 2003-04 시즌 2부리그에서 3위를 기록했지만 6위를 차지한 크리스탈 팰리스[6]에게 플레이오프에서 져 승격이 좌절되었다. 해당시즌 FA컵에서 준결승에 올랐으나 같은 2부리그팀 밀월 FC를 상대로 팀 케이힐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2004-05 시즌 EFL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하며 2년 만에 프리미어 리그로 돌아왔다. 그러나 2005-06 시즌 3년 전 기록했던 프리미어 리그 최소승점 기록을 다시 경신하며 3승6무29패라는 처참한 결과를 안은채[7][8]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2.4. 나이얼 퀸과 엘리스 쇼트 시절 (2006~2016)

20년간 팀을 운영해 온 밥 머레이 경은 구단주에서 물러나고 그 대신 전 선덜랜드 선수였던 나이얼 퀸이 2006년에 구단을 인수한 후 클럽의 회장 겸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퀸은 2부 리그에서 개막 후 4경기를 모두 패한 뒤 자신에게 감독으로서의 재능이 없다고 판단하고 얼마 전 은퇴한 맨유의 전 캡틴이던 로이 킨에게 감독 자리를 맡겼다. 사실 선수 시절 로이 킨과 나이얼 퀸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선덜랜드에서는 퀸이 적극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감독을 도왔고 로이 킨은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2006-07 시즌 17경기 연속 무패를 이어가는 등 화려한 성적을 보이며 EFL 챔피언십 우승을 달성하고 팀을 승격시키며 선덜랜드는 프리미어 리그로의 복귀에 성공했다. 키어런 리차드슨과 크레이그 고든, 켄와인 존스 등이 영입된 2007-08 시즌 15위로 프리미어 리그 잔류에 성공했으나 2008-09 시즌 성적 부진으로 로이 킨은 사임했다. 2009년에 엘리스 쇼트가 구단을 사들여 새 구단주가 되었다. 리키 스브라지아가 잠시 팀을 이끌며 16위로 프리미어 리그에 잔류시킨 뒤 2009-10 시즌 스티브 브루스가 부임하였다.

2009-10 시즌을 앞두고 팀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토트넘으로부터 공격수 대런 벤트를 1,0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통해 영입하고, 프레이저 캠벨과 로릭 카나와 리 캐터몰, 마이클 터너 등을 대거 영입하며 의욕적인 투자를 했다. 벤트는 24골을 넣으면서 득점 순위 3위에 오르며 투자의 가치를 증명해냈다. 여기에 유망주 조던 헨더슨이 불과 19세의 나이에 팀의 주축으로 성장하며 자리잡았다. 다만 팀 성적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복있는 시즌을 보낸 끝에 아쉬운 13위였다. 시즌 초반에는 리버풀과 아스날을 잡는 등[9] 중상위권에 있었지만 시즌 중반 14경기 연속으로 승리에 실패하면서 하위권으로 추락할 뻔 했다가 다시 9경기 5승2무2패로 선전하면서 TOP 10 진입 가능성이 생기기도 했다.

2010-11 시즌에는 아사모아 기안, 시몽 미뇰레, 존 멘사, 티투스 브램블, 대니 웰벡(임대) 등 준척급 선수들이 들어오며 탄탄한 전력을 과시했고, 디펜딩 챔피언이자 당시 선두였던 첼시를 스탬포드 브릿지 원정에서 3-0으로 때려잡는 등 시즌 중반까지 중상위권에 위치해 내친김에 유럽대항전 내지는 챔피언스리그까지 노려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주전 공격수 벤트를 아스톤 빌라에 팔아넘긴 다음부터 팀 전력이 급격히 하락하며 25라운드부터 9경기 1무 8패라는 극심한 DTD로 하위권으로 처졌다. 다행히 마지막 5경기 3승을 거두면서 매 경기 순위가 바뀌는 역대급 치열한 레이스에서 어찌어찌 12승11무15패, 승점 47점으로 10위로 마감하였다.

2011-12 시즌을 앞두고는 유망주 조던 헨더슨이 리버풀로 떠났지만 이전 시즌 강등된 버밍엄의 에이스 세바스티안 라르손, 잉글랜드 유망주 코너 위컴과 함께 맨유 듀오 존 오셔 웨스 브라운을 영입하고, 아스날로부터 니클라스 벤트너를 임대해 데려오는 등 폭풍 영입을 했다. 지동원도 이때 아시안컵 활약을 바탕으로 전남 드래곤즈에서 선덜랜드로 이적하면서 한국에서도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개막 후 13경기에서 2승6무5패에 그치자 브루스 감독은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고 마틴 오닐이 부임하게 되었다. 오닐 부임 후 리그 10경기에서 7승1무2패를 거두며 17위에서 8위까지 올라갔고 이후에도 리버풀을 홈에서 1-0으로 꺾고, 갈길 바쁜 맨시티 원정에서 3-1로 이길 뻔한 경기를 3-3으로 비기면서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시즌 막판 8경기에서 5무3패에 그치며 13위로 내려앉는 아쉬운 모습 끝에 시즌을 마쳤다.

이후에는 매 시즌 강등권 싸움을 하다가 감독을 교체한 뒤 반등하며 살아남는 패턴의 행보를 보이다가 2016-17 시즌 들어 20위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10시즌 만에 챔피언십으로 강등되었다.

2012-13 시즌에는 개막 후 4연속 무승부 등 15경기 2승7무6패의 지지부진한 성적으로 18위까지 내려갔다가 12월과 1월 사이 5승1무3패로 11위까지 올라갔으나 다시 8경기 연속 무승을 기록하며 16위로 강등 위기에 몰리자 마틴 오닐 감독이 결국 경질되고 파올로 디 카니오가 부임했다. 파시즘을 옹호하는 인종차별적 행동으로 논란이 일었던 터라 말들이 많았으나 부임 후 타인위어 더비에서 뉴캐슬을 원정에서 3-0으로 이기고 홈에서 천적 에버튼을 1-0으로 잡아내며 연승에 성공해 한숨을 돌리는데 성공했으며 시즌을 17위로 마쳤다.

그러나 기성용이 스완지에서 임대온 2013-14 시즌에는 개막 후 5경기 1무4패에 그치면서 디 카니오 감독이 빠르게 경질되었고 구스타보 포옛이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개막 후 무려 9경기 만에 숙적인 뉴캐슬을 홈에서 2-1로 잡아내며 첫 승을 따내고 다음 홈경기에서 맨시티를 1-0으로 잡아냈으나 여전히 최하위에 있다가 박싱데이 이후 7경기 4승2무1패를 거두면서 강등권을 빠져나왔다. 타인위어 더비에서 3-0으로 대승을 거둬 더블을 기록한건 덤. 리그컵인 캐피탈원컵에서 사우스햄튼과 첼시, 맨유를 꺾는 등 승승장구하면서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아쉽게 맨시티에게 3-1로 패배하면서 트로피를 들어올리지는 못했다. 리그에서 25라운드부터 8경기에서 하위권의 헐시티, 노리치, 웨스트햄에 털리는 등 1무 7패의 최악의 성적으로 강등 위기에 몰렸고 설상가상으로 잔여일정에 맨시티와 첼시, 맨유를 잇따라 상대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으나 맨시티와 원정에서 2-2로 비기고 첼시를 그것도 원정에서 2-1로 잡아내며[10] 리그 10경기 무승을 탈출했다. 카디프 시티와의 단두대매치에서 4-0 대승을 거두며 강등권에서 빠져나왔고 최악의 성적을 거두던 맨유 원정에서 1-0 승리를 거두며 3연승, 하위권의 WBA를 상대로 2-0으로 승리해 4연승을 거두면서 프리미어리그 잔류를 확정지었다.

2014-15 시즌에는 2013-14 시즌의 극적인 잔류가 신기루처럼 보일 정도의 행보를 보였다. 16경기에서 10개의 무승부를 남발하더니 사우스햄튼 원정에서 8-0 대패를 당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타인위어 더비 4연승에 성공했으나 29라운드까지 4승14무11패에 그치면서 17위에 그치자 포옛 감독마저 경질되고 딕 아드보카트가 임시 소방수로 나섰다. 아드보카트 부임 이후 또 뉴캐슬에 승리를 거두면서 타인위어 더비 5연승에 더블에 성공했고, 사우스햄튼과 에버튼을 잡아내고 레스터와 아스날에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16위로 잔류에 성공했다.

2015-16 시즌 소방수 역할 수행 후 은퇴하려던 아드보카트를 만류하고 정식 감독이 되도록 했으나 또다시 시즌 초부터 8경기 3무5패의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아드보카트는 사임하고 '빅 샘' 샘 앨러다이스가 부임하였다. 앨러다이스는 부임 후 첫 홈경기에서 뉴캐슬을 3-0으로 제압하며 매 시즌 감독 교체 후 타인위어 더비 승리가 국룰이 되어버렸다. 시즌 개막 10경기 만에 나온 리그 첫 승리였다. 2015년에 치른 전반기는 3승3무13패였으나 2016년에 치른 후반기 6승9무4패로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면서 라이벌 뉴캐슬을 제치고 17위로 생존하는데 성공했다. 2014-15 시즌 후반기에 합류한 잉글랜드 국가대표 출신 공격수 저메인 데포가 15골로 해결사 노릇을 했다.

2016-17 시즌을 앞두고 앨러다이스 감독이 공석이 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고[11]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이 부임했다. 그러나 시즌 초반부터 패배수를 무섭게 적립한 끝에 6승6무26패, 승점 24점에 그치면서 최하위로 강등되고 말았다.

2.5. 충격의 백투백 강등과 새로운 시작 (2016~)

2007-08 시즌부터 프리미어 리그로 복귀해 2016-17 시즌까지 10 시즌을 연속해서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다가 2016-17 시즌과 2017-18 시즌 충격의 백투백 강등을 경험하며 3부 리그까지 떨어졌다. 2016-17 시즌 2부 강등 이후 구단주인 엘리스 쇼트는 클럽에 대한 투자를 중단했고 악조건 속에 2017-18 시즌에 다시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또다시 강등되었으며 그 과정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 죽어도 선덜랜드"에 잘 나와있다. 2017-18 시즌이 끝난 이후 엘리스 쇼트는 구단을 팔았고 스튜어트 도널드가 새 구단주가 되어 클럽을 재정비하며 부활을 노리고 있지만 두 시즌 연속으로 승격에 실패하며 2020년 7월 20일에 승격 실패와 더불어 코로나 쇼크로 인한 재정적 부담으로 클럽 회장직을 사임한다.[12]

이후 스튜어트 도널드가 사임한 후에 공석이었던 회장 자리의 후임을 찾았는데 잉글랜드 풋볼리그의 승인을 받아 2021년 2월 18일에 키릴 루이-드레퓌스가 지분 41%를 넘겨받았다. 나머지 59% 지분을 이전 회장단인 Madrox 컨소시엄[13]이 소유하고 있어 키릴이 구단주가 되지 못한다. 이때문에 현지 선덜랜드 팬들은 키릴이 구단주가 아니라는 것에 의구심을 품고 구단주 행세를 한 것에 반발했는데 키릴은 스스로 나서서 선덜랜드 팬들에게 사과를 표했다. 하지만 지분을 더 사들일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 현지 팬들은 키릴이 사태를 진화하자 Madrox가 구단 운영에 실패했음에도 사실상 미래수익을 기대하면서 지배주주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 분개해 퇴진하라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키릴이 대부분 실권을 가지고 있어 이사회 의장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Madrox는 지분율이 많을 뿐 Madrox에서도 스튜어트 도널드, 후안 사르토리,찰리 메트벤이 지분을 각각 나누어 소유하고 있고 또한 구단 운영에 제한적으로 참여만 가능하다고 키릴이 서포터즈를 만나 확인 시켜주었다. 죽어도 선덜랜드 시즌3에 따르면 키릴은 당시 선덜랜드에서 최대 주주가 아닌 지배주주가 되는 것으로 계약 조건을 내세웠고 결국 키릴이 지배주주로 인수하였는데, 대신 이사회에서 최대 의석을 보유하고 있어 실질적 경영에 관여하게 된 것이라고. 키릴은 오해를 일으킬 의도는 없었다며 선덜랜드 팬들에게 사과하였다.

키릴 루이-드레퓌스의 아버지 역시도 구단주였던 이력이 있는데 로베르 루이-드레퓌스는 1994년에 프랑스 리그2로 추락했던 프랑스 명문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를 인수하여 팀을 재건해 1998-1999 시즌에 다시 1부리그로 입성시킨 전적이 있다. 이후에는 마르세유에 이어 벨기에 클럽인 스탕다르 리에주의 구단주가 되기도 했다. 2009년에 로베르가 사망하고 나서는 아내인 악명높은 마르가리타 루이드레퓌스가 마르세유의 구단주 직을 승계받았다. 그러나 2016년 보드진은 구단의 부진에 책임을 지며 물러났고 마르가리타 역시 미국 컨소시엄에 구단을 넘기고 물러났다.

반면 키릴 루이-드레퓌스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축구를 즐긴 축덕으로 축구에 대해 해박해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투자할 것으로 보여 평가가 이전의 구단주들 보다는 후한 것으로 평가된다.[14]

이후 인수 1년만에 선덜랜드 AFC가 21-22 시즌 승격 플레이오프 결승전에서 위컴 원더러스를 2:0으로 꺾어내며 챔피언쉽으로 승격했다.[15] 2017-18 시즌 이후 약 4년만에 2부리그 무대로 복귀했으며 탄탄한 자본력을 갖춘 키릴 회장이 회장직을 수행한지[16] 1년만의 성과이므로 앞으로의 투자와 구단의 성장에 팬들의 기대감이 부풀고 있다.

2022-23시즌 EFL 챔피언십에서 마지막 46차전에서 극적으로 역전하여 밀월 FC를 제치고 6위를 차지하며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루턴 타운에게 합산 스코어 3:2로 패배해 승격이 좌절되었다. 위어티스 더비 상대인 미들즈브러 FC도 같이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선덜랜드처럼 일찍 탈락했다.


[1] 현재의 시세로는 9만 파운드(약 1억 5천만원) [2] 나이얼 퀸과 케빈 필립스 사이에 신장 차이가 매우 컸기 때문에 저런 별명이 붙었다. 나이얼 퀸은 리그에서 18골을 득점하였다. [3] 당시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소 승점 기록이었다. [4] 전반기 마감 무렵 리버풀을 잡을 때 4승5무9패였지만 그 다음 경기부터 20경기 동안 2무18패라는 부진한 성적을 냈다. 그리고 23라운드 블랙번과 0:0으로 비긴 뒤 나머지 15경기에서 모두 패했다. 이 프리미어리그 연패 기록은 2005-06 시즌 승격 후 개막 5연패하며 20연패가 되었다. 리그 최다골 선수도 6골을 넣은 케빈 필립스였다. 클럽 레코드 플로는 4골로 먹튀. [5] 리즈 유나이티드의 1부 리그 마지막 우승을 이끈 감독이다. [6] 크리스탈 팰리스가 그 시즌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했다. [7] 심지어 첫 홈 승리가 마지막 홈경기였다. 희생양은 풀럼. 이거조차 굉장히 운이 좋았던 이유는 33라운드 경기로 당초 2006년 4월 8일에 열렸으나 풀럼의 맥브라이드 골로 풀럼이 앞선 상태에서 엄청난 폭설이 쏟아져 노게임선언되고 5월 4일에 처음부터 리셋돼서 다시 열린 경기였다. 정상대로 진행되었다면 역대 초유의 한 시즌 프리미어리그 홈무승팀이 나올 뻔 했다. 선덜랜드의 3승을 책임져 준 팀은 도깨비팀 미들즈브러, WBA, 풀럼이었다. 여담으로 당시 우승팀 첼시를 열심히 추격하던 맨유는 시즌 막판 홈에서 선덜랜드와 0-0으로 어이없게 비기며 우승도전이 사실상 날아갔다. [8] 이 최소 승점 기록은 2년 뒤 더비 카운티가 승점 11점으로 경신했다. [9] 벤트의 그 유명한 리버풀전 풍선골이 바로 이때 나왔다. [10] 이는 주제 무리뉴 감독이 프리미어리그에서 허용한 첫 홈 패배였다. [11] 다만 부패 스캔들 파문으로 인해 단 1경기만 치르고 짤렸다. [12] 그 과정 역시 넷플릭스 다큐 죽어도 선덜랜드 시즌 2에 잘 나타나 있는데 스튜어트는 구단주임에도 1선에서 동분서주하며 어떻게든 구단을 살려보려 했으나 그동안의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무너진 구단재정과 안이해진 선수단 때문에 좌절을 겪는다. 시즌 3는 구단 성적의 부진과 어수선한 선수단 관리를 위해서 제작 중단을 선언했었다. 그러다 2024년, 챔피언십 복귀에 성공한 21-22시즌을 바탕으로 제작된 시즌 3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다. [13] 스튜어트 도널드가 이끄는 투자그룹. 59% 지분을 스튜어트 도널드 34%, 후안 사르토리 20%, 찰리 메트벤 5%로 나누어서 보유 중이다. [14] 가진 자본의 규모도 약 6조 이상에 육박해 훨씬 크다. 인수과정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로는 키릴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직접 구단을 소유하는 것에 의욕을 보였으며 어머니가 지나치게 비즈니스적으로 구단을 운영했던 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고 한다. [15] 키릴 또한 직관하고 있었다. [16] 앞서 기술한 것처럼 키릴이 아직까지 지배주주가 아니기 때문에 자본을 투입해 지분을 사들여 추가 자본을 투입할지 주목된다. 지분을 더 사들이기 전까지는 서류상 키릴 회장이 구단을 완전히 인수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덜랜드 지역지 선덜랜드 에코에 따르면 현재 지분에 만족하고 있고 당분간 추가 지분 구매는 없을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