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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8:20:40

피터 리드

피터 리드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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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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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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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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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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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리드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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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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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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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85 · 198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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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축구 감독
파일:external/cdn.images.express.co.uk/reid-393260.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colbgcolor=#ffffff,#191919> 피터 리드
Peter Reid
출생 1956년 6월 20일 ([age(1956-06-20)]세) /
영국 잉글랜드 리버풀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73cm
직업 축구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볼튼 원더러스 (1974~1982)
에버튼 FC (1982~1989)
QPR (1989~1990)
맨체스터 시티 (1990~1993)
사우스햄튼 FC (1993~1994)
노츠 카운티 FC (1994)
베리 FC (1994~1995)
감독 맨체스터 시티 FC (1990~1993 / 선수 겸 감독)
선덜랜드 AFC (1995~2002)
잉글랜드 U-21 대표팀 (1999)
리즈 유나이티드 FC (2003)
코벤트리 시티 (2004~2005)
태국 대표팀 (2008~2009)
플리머스 아가일 (2010~2011)
뭄바이 시티 FC (2014)
국가대표 파일: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3경기 ( 잉글랜드 / 1985~1988)

1. 개요2. 선수 경력3. 감독 경력
3.1. 맨체스터 시티3.2. 사우스햄튼3.3. 선더랜드3.4. 리즈 유나이티드3.5. 코벤트리 시티3.6. 태국 대표팀3.7. 스토크 시티 ~ 플리머스 아가일3.8. 뭄바이 시티3.9. 볼튼 원더러스
4. 기록
4.1. 선수
4.1.1. 대회 기록4.1.2. 개인 수상
4.2. 감독
4.2.1. 대회 기록4.2.2. 개인 수상

[clearfix]

1. 개요

영국( 잉글랜드)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6년 볼턴 원더러스 FC 코치를 맡았다.

1980년대 에버튼 FC의 최전성기를 이끈 잉글랜드의 당대 톱클래스 수비형 미드필더. 그는 선수 시절 에버튼의 최전성기를 견인한 당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또한 맨시티에서는 선수 겸 감독으로서 활약하며 많은 기여를 했다. 그리고 1999-00 시즌에 선덜랜드가 EPL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 2003년에는 리즈 유나이티드 감독 대행으로 부임해 강등권에 놓여 있던 리즈를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여러 곳을 전전하고 있다.

2.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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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튼 시절 피터 리드

리드는 1974년 18살의 나이에 볼튼 원더러스에 입단했다. 이후 그는 팀의 핵심 수비형 미드필더가 되었고 1978년 볼튼이 2부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볼튼은 2시즌만에 도로 강등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진가를 충분히 발휘했고 그의 재능을 주목한 에버튼이 6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지불하며 영입했다. 리드는 에버튼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984년 FA 우승컵을 거머쥐었고 1985년과 1987년에는 1부리그를 우승했으며 유로파 위너스컵도 1985년에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1985년 FA컵 결승전 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수비수 케빈 모란에게 과격한 태클을 가하다가 퇴장당하고 말아 팀의 1:0 패배를 초래하고 만 것은 그의 에버튼 경력에서 유일한 흑역사였다.(참고로 리드는 FA컵 역사상 최초로 결승전에서 퇴장당한 선수다.)

그는 1985년 리그와 유로파 위너스컵 우승을 차지하는데 큰 기여를 한 공로로 PFA 올해의 축구 선수에 선정되었고 당해 발롱도르 선정 때 미셸 플라티니, 프레벤 엘케어 라르센, 그리고 디에고 마라도나에 이어 4위에 뽑히는 영광을 누렸다. 이렇듯 그는 에버튼에서 1982년부터 1989년까지 7년간 159경기 8골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후 1989년 QPR로 이적해 한 시즌동안 뛰며 29경기 1골을 기록했다. 그러던 1990년, 리드는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겸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다.

한편, 그는 1986 멕시코 월드컵 때 같은 포지션에서 뛰던 대표팀 선수들이 부상당하는 덕분에 대체 선수로 뽑혀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르헨티나와의 8강전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에게 제쳐져 2번째 실점을 허용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후 그는 국가대표로서 13번 출전했다.

3. 감독 경력

3.1. 맨체스터 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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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는 1990년 초순 맨체스터 시티 FC로 이적해 18경기를 출전했다. 그후 다음 시즌에도 선수로 뛰다가 1990년 11월 7일 맨체스터 시티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맨체스터 시티는 한창 우승 경쟁을 벌이고 있던 중이었는데 하워드 켄달 감독이 갑자기 에버튼에 부임하면서 대체자로 에버튼 시절 대단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그를 선택했다. 리드는 선수 겸 감독으로서 1990-91 시즌 30경기에 출전했고 팀은 5위를 기록해 우승 경쟁에서 일찌감치 밀려났다. (그래도 최대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보다는 순위가 한 계단 더 높았다.) 그후 그는 1991-92 시즌에도 31경기를 출전하며 팀이 계속 상위권에 위치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EPL이 처음 막을 올린 1992-93 시즌, 그는 선수로서 20경기에 출전했지만 맨시티는 9위로 추락했다. 팬들은 롱패스만 일관하는 그의 전술 스타일에 비판을 가했고 1993-94 시즌 초반에 극도로 부진해 꼴찌로 추락하고 말았다. 결국 리드는 경질 통보를 받고 맨시티를 쓸쓸히 떠나야 했다.

3.2. 사우스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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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0월, 리드는 이안 브렌푸트 사우스햄튼 FC 감독의 부름을 받고 사우스햄튼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당시 사우스햄튼은 9경기에서 8경기를 패해 꼴찌로 추락했고 사우스햄튼 팬들은 브렌푸트를 당장 경질하라고 아우성이었다. 리드는 이런 암울한 팀에 입단한 뒤 그만의 지도력과 열정을 발휘해 침체되었던 팀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8경기에 출전해 중요한 승리를 몇차례 거두며 강등권에 떨어져 있던 사우스햄튼의 성적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브렌푸트 감독이 며칠 뒤 노리치 시티에게 패한 뒤 경질되자, 리드는 후임 감독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날 영입해준 브렌푸트를 봐서라도 그럴 수 없다."며 거부했고 시즌이 끝난 뒤 사우스햄튼을 떠났다. 이후 그는 선수 인생을 은퇴하고 감독으로서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했다.

3.3. 선더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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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3월, 리드는 선덜랜드 AFC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선덜랜드는 풋볼 1부리그(오늘날의 잉글랜드 챔피언쉽)에서 강등당할 위기에 직면했다. 그는 부임 이후 선덜랜드를 강등 위기에서 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다음 시즌엔 우승을 달성하며 EPL로 승격했다. 1996년, 선덜랜드 팬들은 자신들을 EPL로 올려준 리드의 응원가 'Simply Red and White'를 작곡했고 이 곡은 'Cheer Up Peter Reid'[1]와 함께 유행곡 TOP 50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하지만 불행히도 선덜랜드는 다음 시즌에 강등되어 도로 챔피언쉽으로 떨어졌다.

1997-98 시즌, 선덜랜드는 3위를 기록하며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후 승격 플레이오프 결승전에서 찰튼 애틀래틱과 4:4 무승부를 거두며 승부차기에 돌입했으나 7:6으로 패해 승격이 좌절되었다. 그래도 1998-99 시즌엔 챔피언쉽 역사상 최다 승점인 105점을 달성하며 우승을 차지, EPL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그후 1999-00 시즌, 선덜랜드는 챔피언쉽에서 굉장한 활약을 선보인 기세를 EPL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해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목전에 두었으나 막판에 부진하는 바람에 7위로 마감했다. 하지만 이 기록은 EPL이 개막한 이래 승격팀이 거둔 가장 높은 순위였다. 당시 선덜랜드의 주전 공격수 케빈 필립스는 30골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한편, 리드는 선덜랜드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선보인 걸 인정받아 1999년 잉글랜드 U-21 축구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지만 얼마 후 선덜랜드에 집중하기로 하고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2000-01 시즌, 선덜랜드는 시즌 중반에 리그 2위를 기록하며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획득하는 듯 했지만 또다시 시즌 막판에 부진해 7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2001-02 시즌엔 시즌 38경기에서 28득점이라는 극도로 빈곤한 공격력으로 인해 강등권과 단 한 순위 높은 순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리드는 득점력을 높이기 위해 첼시와 레인저스에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인 바 있던 토레 안드레 플로를 82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그러나 플로는 적응에 실패해 29경기에서 고작 4골만 기록하며 먹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리드는 팀이 강등권에 놓이던 2002년 10월 선덜랜드 감독을 맡은 지 7년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3.4. 리즈 유나이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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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덜랜드에서 경질된 뒤, 리드가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할 거라는 루머가 돌았다. 그 또한 아일랜드 대표팀 감독을 맡는 것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뜻을 바꿔 2003년 3월 테리 베너블스 감독을 경질한 리즈 유나이티드 FC의 요청을 수락하고 감독 대행으로 부임했다. 당시 리즈는 그야말로 막장이었다. 선수 영입에 너무 많은 돈을 쓰고 주급을 재정 생각 않고 펑펑 주다보니 빚이 8천만 파운드에 달해 파산 지경에 몰렸다. 리드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리즈에 부임한 후 찰튼 애틀래틱 원정에서 6:1 대승을 거두었고 아스날 원정에서도 3:2 승리를 거두어 리그 우승을 노렸던 아스날의 발목을 잡았다. 덕분에 리즈는 강등을 모면했고 리드는 팀을 구한 공적을 인정받아 정식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리즈는 재정 악화로 인해 해리 큐얼 등 주전 선수들을 닥치는 대로 팔아치우고 말았고 이로 인해 팀 전력은 극도로 떨어졌다. 4라운드까지는 1승2무1패를 거뒀지만 이후 8경기에서 1승7패, 25실점하면서 꼴찌로 추락해버렸다. 결국 리드는 2003년 11월 포츠머스에게 6:1 대패를 당한 뒤 경질되고 말았다.

3.5. 코벤트리 시티

2004년 5월, 리드는 챔피언쉽 소속 클럽은 코벤트리 시티 FC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EPL에 승격하는 것을 목표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작 2004-05 시즌에 코벤트리 시티는 20위로 추락하며 승격은 커녕 강등을 걱정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2005년 1월 6일, 리드는 코벤트리 시티 감독으로 부임한 지 8개월 만에 경질되었다. 그후 2006년 하순에 리드가 나이얼 퀸이 회장으로 부임한 선덜랜드의 축구 디렉터로 부임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3.6. 태국 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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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벤트리 감독직에서 경질된 뒤 4년 가까이 휴식을 취하던 리드는 2008년 9월 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2014 브라질 월드컵까지 태국 대표팀을 맡기로 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태국 축구를 잘 알지 못하고 대표팀 선수들을 이름이 아닌 등번호로 호칭한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하지만 그는 "나는 선수들의 재능에 놀랐고 프리미어리그에서는 결코 배운 적이 없던 축구를 배우고 있다. 이 기회는 내 축구 경력에 가장 훌륭한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이들은 순수한 축구를 하며 나는 이를 좋아한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태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그의 첫번째 임무는 베트남에서 열린 '베트남 풋볼 연맹 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테국은 북한과의 첫번째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베트남과 무승부를 차지해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이후 2010 남아공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하자 경질론이 대두되었고 결국 2009년 9월 9일 태국 축구 협회는 리드가 상호 합의하에 감독 직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다.

3.7. 스토크 시티 ~ 플리머스 아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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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국가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난 리드는 2009년 9월 10일 스토크 시티 FC 수석코치로 부임해 토니 퓰리스 감독을 보좌했다. 그러던 2010년 6월 24일, 리드는 플리머스 아가일 FC 감독으로 전격 부임했다. 그 후 리드는 지난 시즌 챔피언쉽에서 강등당한 플리머스의 혼란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플리머스는 2010년 11월에 영국 국세청인 HMRC로부터 두 차례의 winding-up petition(상대에 대한 강제 파산신청)을 권고당했고 이듬해 1월 이적 시장에서는 파산을 모면하기 위해 팀의 핵심 선수인 브래들리 라이트-필립스와 크레이그 눈을 팔아야 했다. 클럽이 어찌나 돈이 없었는지, 리드는 이시기 FA컵 준우승을 이끌어낸 뒤 따낸 상금을 가지고 난방비에 썼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플리머스는 재정 악화로 인해 2011년 2월 영국 축구 협회로부터 승점 10점 삭감이라는 중징계를 당했고 결국 3부리그 꼴찌를 기록하며 4부리그로 강등되고 말았다. 그후 2011년 여름, 리드는 대부분의 주전 선수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 자유계약과 임대로 대체 선수들을 영입했다. 오죽했으면 쉬르즈버리 타운과의 개막전 때 10명의 선수들이 데뷔전을 치렀을 정도였다고(...). 이러니 조직력이 제대로 갖춰졌을리 만무했고 결국 플리머스는 이후 리그 8경기를 모두 패하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재정 또한 여전히 파산 직전에 몰려 있었다. 결국 2011년 9월 18일, 리드는 전격 경질되고 말았다. 하지만 플리머스 팬들은 리드가 너무도 힘겨운 상황에서 고생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남탓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진 그의 관대함과 헌신에 찬사를 보냈다.

3.8. 뭄바이 시티

2014년 9월 4일, 리드는 인도 슈퍼리그에 소속된 뭄바이 시티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그곳에서 6경기 3승 3패를 기록한 뒤 2014년 12월 20일 사임했다.

3.9. 볼튼 원더러스

2016년 3월 18일, 리드는 볼튼 원더러스 FC의 코치에 부임해 지미 필립스 감독을 보좌했다. 하지만 2달 뒤 볼튼이 3부리그로 강등되자, 그는 코치직에서 물러나 야인의 삶으로 돌아갔다.

4. 기록

4.1. 선수

4.1.1. 대회 기록

4.1.2. 개인 수상

4.2. 감독

4.2.1. 대회 기록

4.2.2. 개인 수상


[1] SV 베르더 브레멘의 응원가 'Wir sind Werder Bremen'과 곡조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