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 지역에서 가장 상업 능력이 뛰어난 민족을 일컫는 표현이다.삼대 상방 商帮 외에도 십대 十大 상방 商帮이라는 표현도 있다.
2. 세 가지 상방
- 진상晋商 (산서山西 상방) : 당나라 때 부터 이어지는 오랜 역사로 유명하며, 온갖 물자의 장거리 무역과 다국적 무역을 담당했다. 산서 지역은 또한 부의 상징과도 같은 소금 산지였기 때문에 각종 정치적인 급변이나 변란 중에서도 자산과 부를 지속하는 데에 유리했다. 이들의 명성은 주변의 타국가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명나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만주인들과의 밀무역으로 이름을 떨쳤다. 심지어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국가 재정과 경제를 담당자들을 진상 상방으로 임명했다. 청나라 시기에는 진상과 휘상 두 그룹이 국가 전체의 경제 절반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진상의 경제력은 다른 그룹들에 비해서 압도적이면서도 일종의 금융의 허브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국가의 관리들도 진상을 대출을 받거나 송금 등 은행업의 창구로서 인식하게 된다.
진상은 국제 무역에도 능하였기 때문에 10년 정도는 해외에서 지내면서 상업을 익히는 것이 하나의 관례와 같은 것으로 인식했으며, 그들은 스스로의 자산을 안정적으로 저축할 대상으로 구리 또는 은을 핵심적인 화폐로 삼았기 때문에 중국 일대의 구리 시세와 은 시세를 결정짓는 민족이었다.
산서지역은 물산이 풍부했기 때문에 인구도 항상 많았으며, 교역이 잦으니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몽골어를 익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상하이시의 개방과 함께 이뤄진 대량의 은의 유출 이후로 진상이 큰 타격을 입게된다. 진상은 대체로 긴 역사에 걸쳐서 상업과 자본력을 이용하여 서구처럼 자유로운 경제력을 구사하기 보다는, 국가와 노선을 일치하여 움직이는 형태를 선호했으므로 청나라의 쇠락은 곧 진상의 쇠락으로 이어졌다.
신해혁명 이후로는 진상 세력은 완전히 힘을 일은 것으로 평가된다.
- 휘상徽商 (휘주徽州 또는 신안新安 상방) : 오호십육국/ 동진 때부터 이어진 역사를 가졌으며, 당나라와 송나라 이후로 본격적인 세력을 갖추기 시작한다. 장사와 전당포가 그들의 특기였으며, 학식 또한 뛰어나서 큰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통적으로 자녀들에게 상업과 학업 양 측면을 가르쳤으며, 학자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휘상은 늘 진상과 라이벌 관계에 있었으며, 때에 따라 휘상은 진상을 능가하기도 했다.
- 조상潮商 (조주潮州 상방) : 지리적으로 해안에 위치하여 외지에 나가서 상업적 능력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진상과 휘상 두 그룹과는 달리 상업적으로 긴 역사를 갖거나 중국 본토의 역사의 축을 담당하지는 않았으나 모험심과 독립심이 탁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은 상당 부분 조상이 주도가 되었거나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구성된 나라들이며, 난방공화국처럼 현재는 잊혀졌으나 그들이 주축이 된 나라들도 있었다.
조상은 기원전 1세기부터 동남아시아 지역과 교류가 활발했으나, 이 당시에는 중국의 역사라기보다는 고유한 독립적인 역사에 더 가까웠다. 민족 역시 중국의 주류였던 한족과는 관련이 없었으며, 한족은 그들을 침략하려는 위협세력으로서의 인식이 더 강했다. 해안가에 자리했던 광둥성과 차오저우시 일대는 전통적으로 중국의 수도들과 한참 멀었으므로, 중국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골칫거리로 여겨졌다.
조상이 중국의 역사에서도 두각을 드러낼만큼의 성장을 이룬 것은 명나라 시대부터이며, 명나라에서는 여러가지 리스크를 막기 위한 해금령이 내려지는 것에 따라 흥망이 결정되는 지역이었다. 또한, 명나라도 조상은 무역 의존도가 중요한 것을 파악하고 있어서 그들이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전략적으로 경계했다.
정성공의 동녕국 건국을 거대한 문제로 인식한 청나라는 광둥성 일대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해금령을 내리게 된다.
조상들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두 왕조에 걸치면서까지 지속적으로 탄압받는 것에 꾸준히 반감을 가졌으며, 중국 주류 세력과는 거리감을 가지게 되어 이후 본격적으로 해외 이주를 결심하는 세력이 대폭 늘어나게 된다.
동녕국이 멸망하고, 관련 세력들이 평정되어 지방세력들이 안정된 이후로는 조상들의 지역은 중요 무역항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때 1723년 제정된 법률에 따라 배는 지역에 따라 고유의 색상을 칠해야 했는데 광둥성의 배들은 빨간색을 칠해야 했다. 따라서 이 빨간색 배는 홍두선(紅頭船)이라 불렸으며, 조상의 상징이 되기에 이른다.
홍두선 시대 이후로는 조상들의 폭발적인 해외 이주 및 국가 건국 등이 줄지어 일어나게 된다.
홍두선이 무역을 담당하는 주요 품목으로는 시암의 쌀이 있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태국의 주요 화교 구성원은 압도적으로 치우차우계가 차지한다. 또한, 시암을 세운 건국자역시 치우차우계 혼혈이다.
톈진 조약 이후로는 산터우가 완전 개방되어 서양인들도 자유롭게 무역하는 곳이자, 치외법권까지 적용되는 특별한 지역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1차의 홍두선 시대의 첫 폭발적 이주 이후로 2차의 폭발적 이주로 불린다. 또한, 산터우 개방 이후의 이주는 쿨리 무역의 핵심이 되기도 한다.
1980년에 이르러서는 산터우가 중국 최초의 경제특구 중 하나로 지정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