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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0 12:22:53

블라디미르 라주바예프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Разуваев(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라주바예프)

소련의 군인. 2대 주 북한 소련 대사 및 4대 주북 소련 군사고문단장을 지냈다.

2. 생애

1900년 1월 16일에 러시아 제국 쿠르스크현 시그리군(Щигровский уезд) 알렉세옙카 마을에서 유리공인 아버지와 재봉사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1912년, 트빌리시로 이사했다. 학교 졸업 이후 1916~1917년 사이 건설현장 작엽부로 일했다. 1917~1918년 사이에 청소부로 일했으며 다시 건설현장 노가다로 돌아갔다. 1921년, 트빌리시 국립박물관 석공 겸 콘크리트공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노농적군에 입대, 1921년 1월에 노농적군 제11군 제20보병사단 176보병연대 저지부대의 병사로 배치되었다. 그러다가 간부후보로 발탁되어 바쿠에서 간부과정을 밟았고 1922년에 수료, 1924년에 다시 보병간부학교를 졸업했으며 1934년 프룬제 군사대학을 졸업, 1939년에 총참모부 군사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는 등 우수한 군인으로 성장했다. 소대장, 중대장, 보병연대 참모장을 거쳐 군관구 참모부 과장으로 승진했다. 매우 정력적이며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태도를 보여주며 높은 규율을 견지하는 박학다식한 인물로 상부의 평가도 매우 높았다.

1939년 겨울전쟁이 발발하자 라주바예프는 참전을 자원했고 1940년 1월, 제9군 참모장으로 부임했다. 성공적인 전과를 거두어 1940년 5월, 적성훈장을 수훈받았으며 1941년 자캅카스 군관구 부참모장으로 이동했다. 이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페르시아 침공 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1942년 10월, 자캅카스 전선군 제37군 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다재다능하고 엄정, 과감, 용감한 지휘관으로 계속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3년 4월, 남부전선 제2근위군 참모장에 임명,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을 몰아냈으며 크림 반도 공격에 참여, 세바스토폴을 해방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작은 부상을 입었다.

1944년 4월 13일, 이오시프 스탈린이 친히 라주바예프를 지목하여 그가 발군의 공적을 세웠다고 칭찬하였다. 1945년 2월, 제3발트전선군 제1충격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쿠를란트 독일군을 섬멸하였다. 종전 이후 1946년 3월까지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으로 재임하다가 벨로루시 군관구 해체 이후 소련 전쟁부 제1부총감에 임명되어 1950년 10월까지 재임했다.

그가 소련 본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해 6.25 전쟁을 일으켰지만 유엔군의 반격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후원한 전쟁이 망하게 생긴 소련은 테렌티 시티코프 대사에게 책임을 물어 그를 경질하고 11월 18일에 라주바예프를 신임 소련대사 겸 국방무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붕괴되는 북한군의 전열을 가다듬고 참전하는 중국과 소련 사이의 외교 업무를 조율하고 동시에 북한대사 및 국방무관직도 수행하는 등 실로 어마어마한 업무를 떠맡았다. 1951년 1월, 바실리예프의 뒤를 이어 주북 소련 군사고문단장까지 맡게 되었다.[1]

1952년 8월, 스탈린의 지시를 받고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을 수행하였으며 1953년 9월 29일에 북한 대사에서 소환되어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이에 대해서는 그는 훌륭한 군인이었지 정치, 외교 전문가는 아니었고 전쟁 중인 나라의 대사로 여러 업무를 동시에 처리하는 것은 너무 무리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그는 김일성의 외교전문을 늦게 전달하거나, 스탈린의 전문을 잘못 이해하는 등 몇번 실수를 저질러서 1951년 2월에 스탈린에게 개인전문으로 혼쭐이 나기도 했다. 외무성 제1부상 안드레이 그로미코도 라주바예프에게 김일성이 소련과 협의도 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게 방치하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질책했다. 그럼에도 소련군부는 라주바예프의 근무성적을 높이 평가했다.

귀국한 라주바예프는 1954년 10월에는 프리모리예 군관구 제1부사령관 및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56년 7월까지 프리모리예 군관구 사령관 제1비서로 근무하였으며 상관인 세르게이 비류조프 원수에게 지상군 근무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비류조프는 그의 일솜씨를 높이 평가하면서 보로실로프 군사대학에서 일하는 것을 제안하였고 라주바예프가 승낙하면서 이반 코네프가 선발한 25인의 보로실로프 군사대학 신임 교관으로 뽑히게 된다.

초기에 보로실로프 군사대학에서 전략전술강좌 선임강사로 임명되었다가 12월에 방공강좌장으로 이동했다. 이후 1968년 9월에 전역할 때까지 12년간 이 직책을 맡았으며 준박사, 전임강사, 교수 직위를 취득하였고 군사학에 관련된 많은 논문과 저서 및 교재를 집필했다.

이후 은퇴생활을 하다가 1980년 8월 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였으며 트빌리시에 안장되었다.

3. 여담

훗날 라주바예프는 6.25 전쟁에서 자신이 접한 자료들을 정리하여 소련 군부에 보고하였다. 이는 극비문서로 분류되어 오랫동안 러시아 국방부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6.25 전쟁 50주년을 맞이하여 6.25 전쟁사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측으로부터 문서를 전달받아 번역하였다.

4. 참고문헌


[1] 연달아 패한 김일성과 박헌영이 만포진에 있는 자신의 대사관 볼셰비키 혁명 기념일 파티에 초대되어 서로간에 싸움을 일삼자 화가 치민 라주바예프는 "남의 잔칫상을 손님이 깽판을 치는 게 어디있나? 당장 중지하지 못해?" 라고 호통을 치며 두 사람의 부관을 불러 싸움을 멈추도록 지시하였고, 부관들이 겨우 뜯어말렸으나 볼셰비키 기념 파티는 이미 파토가 난 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