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21 12:19:24

볼프강 뤼트

볼프강 뤼스에서 넘어옴
파일:Wolfgang Lüth.jpg
볼프강 뤼스(Wolfgang Lüth : 1913년 10월 15일~1945년 5월 14일)

1. 나막신을 타고 에이스가 된 함장2. 훈장 세례3. 육상 근무4. 전사

1. 나막신을 타고 에이스가 된 함장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거의 4개월이 지난 1939년 12월 30일에 IIB형 U보트 U-9의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프랑스 침공 기간 동안 그는 프랑스 해군의 잠수함 도리스와 16,669톤급 상선을 격침시키는 짭짤한 전과를 거두었다. 1940년 6월에 IID형 유보트 U-138의 함장이 된 볼프강 뤼스는 첫 번째 초계 임무에서 연합군 선박을 4척(34,644톤)을 바다 밑에 수장시키는 무공을 세웠는데, 이것은 성능이 현격히 떨어지는 연안용 잠수함으로서는 믿기 힘든 전과였다. 두 번째 항해에도 노르웨이의 대형 상선 다그룬(Dagrun)과 영국 상선 본하우어(Bonheur), 영국 유조선 브리티쉬 글로리(British Glory)를 차례차례 가라앉혔다.

이처럼 돌출된 그의 활약은 독일군 신문인 베어마흐트베리히트(Wehrmachtbericht)를 비롯된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보도되었다. 1940년 10월 21일에는 최신형 9형 유보트 U-43의 함장이 되었고, 더불어 10월 24일에는 기사철십자훈장(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을 수여받았다. U-43의 지휘권을 넘겨 받은 볼프강 뤼스 중위는 이 장거리 잠수함을 타고 5회의 출격을 나가 12척(64,852톤)을 선박을 침몰시켰다. 이처럼 연달아 무공을 세우자 뤼스 중위는 1941년 1월에는 해군 대위(Kapitänleutnant)로 승진했다.

2. 훈장 세례

1942년 5월 9일부터는 IXD/2형 유보트인 U-181의 함장을 맡게 된다. 같은 해 9월에 항구에서 1차 초계에 나간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인도양 남아프리카 공화국 앞바다에서 싸웠다. 1943년 1월에 모항인 보르도에 입항하기 전까지 무려 12척(58,381톤)의 배를 격침시켰다. 이 무공으로 말미암아 볼프강 뤼스 대위는 11월 13일에는 백엽 기사철십자훈장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1943년 3월에는 두 번째 항해를 나가 또 다시 인도양과 남반구를 누비며 싸웠는데, 이 항해는 1943년 10월까지 무려 7개월간 205일이나 걸려 잠수함으로서는 세계 최장 기록이 되었다. 이 기록은 후에 에이텔-프리드리히 켄트라트(Eitel-Friedrich Kentrat : 1906~1974) 소령이 지휘한 U-196이 225일 항해로 경신하기 전까지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 긴 항해에서 볼프강 대위와 부하들은 10척(45,331톤)의 적함을 바다 밑에 묻어버렸다. 뤼스는 또다시 항해 중인 1943년 4월 1일에 소령(Korvettenkapitän)으로 진급했다. 또 그로부터 보름 후인 4월 15일에는 백엽검 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고, 모항으로 돌아온 후인 8월 9일에는 히틀러 관저로 불려가 독일 최고의 훈장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이아몬드 백엽검 기사철십자훈장을 총통 아돌프 히틀러에게 직접 받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또한 뤼스를 보좌한 부하 중에서 2명은 기사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히틀러와 해군 총사령관 칼 되니츠는 뤼스 소령에게 기사 철십자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부하 장병을 직접 지명하라고 했던 것이다.

3. 육상 근무

그렇지만 볼프강 뤼스의 격침 행진을 여기에서 끝나야만 했다. 영웅 뤼스가 전사하는 것을 두려워 한 히틀러와 되니츠 제독은 그를 잠수함에서 내리게 하고 육상 근무 보직을 주었다. 그때까지 볼프강 뤼스는 15회 초계 임무를 나가며 바다에서 600일을 보냈으며, 그가 격침시킨 선박은 합계 253,000톤에 달한다. 이것은 2차 대전 잠수함 톱 에이스인 오토 크레치머의 뒤를 바짝 쫓아 2위에 해당하는 실로 엄청난 전공이다. 해군 장병을 통틀어 다이아몬드 백엽검 훈장을 받은 군인은 볼프강 뤼스와 U-967 함장을 지낸 알브레히트 브란디(Albrecht Brandi : 1914~1966) 중령 두 사람 뿐이었다.

1944년 1월부터 볼프강 뤼스는 점령지인 폴란드 그디니아(Gdynia : 당시 독일 명칭 고텐하펜)에서 제22잠수함대(22. Unterseebootflottille)의 사령관이라는 고위직에 취임했다. 7월부터는 독일 북부의 항구 플렌스부르크(Flensburg)에 있는 무르뮉 해군 대학 부학장 자리에 앉혀졌지만, 뤼스는 바다에 나가지 못해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8월에 해군 중령(Fregattenkapitän), 9월 1일에 해군 대령(Kapitän zur See)으로 진급한 그는 독일 해군 대학 지휘관(Kommandeur der Marinekriegsschule)이라는 상징적인 보직이 주어졌으나, 이때 나치 독일은 나날이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대령이 된 볼프강 뤼스를 칼 되니츠는 퍽이나 신뢰하고 아꼈다. 심지어 되니츠는 자신의 뒤를 이어 해군 총사령관직을 맡길 인물로 그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4. 전사

1945년 5월 14일 새벽 술을 거하게 들이켜 취한 상태로 항구를 돌아다니던 도중, 암구호를 말하지 않아 경계를 서던 19세의 초병 마티아스 고틀롭 이등병의 총에 맞아 죽었다. 2차 세계대전의 격전을 치르고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도 숙취는 이길수 없었나 보다.

다만 일각에서는 뤼트가 패전 이후 우울증으로 자살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암구호를 안 말하고 죽었다는 설도 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