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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로버트 비먼(Robert Beamon)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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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6년 8월 29일, 뉴욕 주 뉴욕시 퀸스 |
신체 | 191m, 70kg |
종목 | 육상 |
주종목 | 멀리뛰기, 세단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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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멀리뛰기 선수.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올림픽 기록으로 금메달을 딴 것으로 유명하다.2. 유년기
비먼의 유년기는 매우 불우했다. 형 앤드류는 어머니가 임신 중에 가정폭력을 당했기 때문에 뇌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친어머니는 비먼의 생후 불과 8개월만에 사망하고, 양부로부터 버려진 비먼은 외할머니의 손에 크게 된다. 비먼은 쉽게 비행청소년의 길로 빠졌고 친구 하나가 칼에 찔려 죽는 것도 직접 본 적이 있다고 한다.하지만 자메이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코치를 만난 비먼의 인생은 반전된다. 이때 처음 딴 전국대회 우승 메달은 그에게 올림픽 금메달만큼 소중한 것이라고 하는데, 본인도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음을 처음 알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대학은 노스캐롤라이나 A&T 주립대학교로 진학하였는데, 아픈 외할머니와 가까이 있고 싶기 때문이었던 게 이유이다. 외할머니의 사망 이후 비먼은 텍사스 대학교 엘패소 캠퍼스 (UTEP)로 편입했다.
3. 1968년
이 때쯤, 비먼은 세계기록에 도전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추게 되었다. 이 당시의 세계기록 변천사는 대략 다음과 같다.날짜 | 선수 | 기록 (미터) | 기록 (피트) | 기타 |
1935년 5월 25일 | 제시 오언스 | 8.13m | 26ft 8in | 25년간 유지됨 |
1960년 8월 12일 | 랄프 보스턴 | 8.21m | 26ft 11in | 최초의 8.2m대 |
1961년 5월 27일 | 랄프 보스턴 | 8.24m | 27ft 1⁄4in | 최초의 27피트대 |
1961년 7월 16일 | 랄프 보스턴 | 8.28m | 27ft 1 3/4in | |
1962년 6월 10일 | 이고르 테르-오바네샨 | 8.31m | 27ft 3in | 최초의 8.3m대 |
1963년 5월 25일 | 필 시닉 | 8.33m | 27ft 3 3/4in | [1] |
1964년 8월 15일 | 랄프 보스턴 | 8.31m | 27ft 3in | 당시에는 세계기록 타이 |
1964년 9월 12일 | 랄프 보스턴 | 8.34m | 27ft 4 1/4in | |
1965년 5월 29일 | 랄프 보스턴[2] | 8.35m | 27ft 4 1/2in | |
1967년 10월 19일 | 이고르 테르-오바네샨 | 8.35m | 27ft 4 1/2in | 세계기록 타이 |
한편, 1968년은 세계사에서 이례적일 정도로 사건 사고가 많은 해였다. 흑인이었던 비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마틴 루터 킹의 암살이었다. 그와 UTEP의 선수 몇 명은 몰몬경의 인종차별적 문구를 근거로 브리검 영 대학교와의 경기를 거부했고 이들 모두는 학교 운동부에서 쫓겨나고 장학금을 잃게 된다. 1960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배 선수이자, 이번에도 같이 미국 대표팀으로 올림픽에 나가는 랄프 보스턴이 비먼의 비공식 코치가 되어주었다.
비먼은 이 해 무적에 가까운 시즌을 보냈다. 23회 대회에 나가서 한 번을 제외하면 모두 우승했으며, 개인 기록은 세계기록에서 약간 모자란 8.33m까지 늘렸다. 세계 최고 기록인 8.39m를 뛴 적도 있었지만 뒷바람이 규정 수치를 넘어 정식 기록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3.1. 올림픽
혼란한 1968년의 시대상은 올림픽 시기에도 지속되었다. 올림픽 개막 불과 10일 전에는 틀라텔롤코 학살이 있었고, 남자 멀리뛰기 경기 불과 이틀 전에는 검은 장갑 사건이 있었다. 비먼 역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입장으로써 경기 전날 비어있는 시상대에 올라가 검은 양말을 주먹에 끼고 치켜들어보았다.비먼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 모두가 예상하는 중압감과 위의 사건들 때문에, 경기 전날 매우 긴장해 있었다. 자서전에서는 경기 전날 밤 여자친구와 관계를 했다고 고백했으며, 2007년 인터뷰에서는 경기 전날 밤 술을 몇 잔 마셨다고 말했다. 어느 쪽이든 운동선수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이다.
1968년 10월 18일 오전, 멀리뛰기 예선에서 비먼은 두 번 연속 파울을 저질러 탈락 위기에 놓인다. 하지만 1차 시기에 올림픽 기록을 세우며 바로 통과한 보스턴이 마지막 발의 위치에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조언을 했고, 세 번째 점프에서 그 말대로 한 비먼은 예선을 통과했다. [3]
같은 날 오후, 결선에서 비먼은 집중력을 되찾고 첫 번째 시기에서 상당히 좋은 점프를 뛰었다. 비먼 자신의 예상 기록은 27피트 10인치 (8.48m)였고, 옆에서 지켜본 데이비스와 보스턴은 비먼이 28피트 (8.53m) 벽을 넘어섰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올림픽 경기 당시 처음으로 멀리뛰기 기록을 자동으로 측정하기 위한 광학 장비가 도입되었는데, 비먼의 점프는 그 장비의 측정 범위를 넘어섰다. 결국 심판들이 줄자로 주의깊게 점프의 길이를 측정해야 했으며 경기는 20분 이상 지연되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기록이 미터법으로 발표되었는데, 미터법에 익숙하지 않던 비먼은 자신이 어떤 기록을 세웠는지 알지 못했다. 옆에서 보스턴이 피트 단위로 바꿔 비먼에게 알려주었다. 8.90미터 (29피트 2 1/4인치)로, 세계 기록을 55cm의 차이로 갱신하고 최초의 28피트 겸 29피트 기록을 만들어 낸 것이다.
너무나도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비먼은 온몸의 근육이 풀려 경기를 계속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의사에게 탈력발작으로 진단받았다. 충격을 받은 것은 다른 경쟁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테르-오바네샨은 비먼에 비하면 우리 나머지 모두는 어린아이와도 같다고 말했고, 데이비스는 비먼에게 당신이 경기를 파괴해 버렸다고 말했다.
4. 그 이후
비먼은 올림픽 이후 선수생활에 대한 의지를 크게 잃어버렸다. 경기에 자주 출전하지 않았으며, 1972년이 되기 전에는 확실히 은퇴했다. 비먼은 올림픽 이후 한 번도 대회에서 8.30미터가 넘는 점프를 뛰지 못했다. 비먼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UTEP로 되돌아갔고, 1972년에 아델파이 대학교에서 사회학 학위를 땄다.은퇴 이후에는 청소년 체육 활동가 및 육상 코치로 일했다.
5. 기타
- 28피트 기록이 다시 나온 것은 12년이 흐른 1980년이었고, 29피트 기록은 거기서 7년이 더 흐른 1987년에야 나왔다.
- 비먼의 기록은 1991년에 마이크 파월이 8.95m의 기록을 세우며 갱신된다. 파월의 기록은 지금도 세계 기록으로 남아 있다.
- 1968년 올림픽에서 비먼이 준 충격을 묘사하기 위해 비머네스크(Beamonesque)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사전에도 올라가 있으며, 기존 기록을 큰 차이로 경신한 선수에게 가끔 붙는 형용사이다.
- 올림픽 시즌마다 후배 선수들을 응원하는 내용의 TV 광고를 많이 찍었다.
- 1969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189번으로 15라운드에 당시 신생팀이었던 피닉스 선즈에게 지명당했지만, NBA에서 한 경기도 뛰지 않았다.
[1]
바람이 측정되지 않은 대회에서 세워진 기록이라 당시 기록으로 인정되지 않음. 2003년에 다른 기록들을 제거하지 않는 조건에서 세계 기록 명단에 들어감.
[2]
여섯 번째 세계기록으로, 남자 멀리뛰기 세계기록을 가장 많이 세웠다.
[3]
제시 오언스 역시
1936 베를린 올림픽 멀리뛰기 예선 당시 두 번 연속 파울하여 탈락 위기에 놓였다. 그 대회에서 은메달을 따게 되는 루츠 롱이 비슷한 조언을 했고, 그 말대로 따른 결과 통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