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朴元文 1865년 ~ 1909년 12월 22일 (향년 44세)대한제국 말기의 인력거꾼.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이완용을 우연히 태우게 되었으며, 같은 시각 이완용의 암살을 기도한 독립운동가 이재명에 의해 현장에서 자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2. 생애
1909년 12월 22일 박원문은 자신의 인력거에 이완용을 태웠으나 그를 기다리며 군밤 장수로 변장해있던 이재명이 나타났다. 이재명은 칼을 휘둘렀고 인력거에 타고있던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를 찔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인력거를 몰던 박원문은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괴한이 탑승객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가로막았으며, 이재명은 반사적으로 이를 방해꾼으로 인식, 가로막던 박원문을 찌르고 다시 이완용을 공격했다.부상을 당한 이완용은 대한의원[1]으로 옮겨져서 흉부외과 수술[2]을 받아 목숨을 구했지만, 이재명의 칼에 찔린 박원문은 결국 숨지고 말았다.
이재명은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경성공소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죽은 박원문에 대해서 유감이나 조의를 표명하지 않고 자신이 박원문을 죽인 것은 우연이였다는 사실만 강조하면서 "무지무능한 저 가련한 노동자를 일부러 죽이려고 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살해할 의도가 없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일본 법정은 박원문을 칼로 찔러 죽인 이재명에게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사건에 대한 상고는 기각되었는데, 재판소의 기각이유 가운데 박원문을 언급하는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시 재판소는 인력거꾼의 구난(救難) 행위를 배제하기 위하여 인력거꾼을 찌른 행위에 살인죄에 대한 미필적 고의가 성립된다고 보았다.
인력거꾼 박원문(朴元文)은 이완용의 위급을 구하기 위하여 피고의 흉악한 행동을 저지하고자 하자 피고가 그 방해를 배제하기 위해 인력거꾼을 살해한 것으로 피고에게 고의가 있는 사실이 명백하다.
3. 박원문의 죽음과 이재명의 행위에 대한 논박
역사학자인 박노자 오슬로 대학교 한국학과 교수는, 이재명에 대해 '매국을 한 적도 없고 할 수도 없었던 평민 박원문을 찔러 죽이고도 그에게 별다른 사과나 유감을 표명하지 않은 행동'을 비판했다.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박노자, 한겨레21) 그의 칼럼에 따르면, 법정에서 이재명은 박원문을 살해한 데 대해 ''무지무능한 저 가련한 노동자를 일부러 죽이려고 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박원문에 대한 살해 의도가 없었음을 강변했으며, 박노자는 이 공판 기록을 근거로 이재명이 박원문의 죽음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다만 박원문은 이완용에 대한 암살시도 중 우연히 그 자리에 있어서 이완용을 대신해 칼에 맞은 것이었는데, 이 사건과 같이 행위자가 A를 살해하려고 했으나 방법의 착오로 B를 사망케 한 경우 죄책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형법 학계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현재 대한민국 법원판례는 B의 대한 살인죄를 인정하나(법정적 부합설),학계에서는 A에 대한 살인미수와 B에 대한 과실치사의 상상적 결합을 인정해야 한다는 학설이 유력하다.(구체적 부합설) 이재명의 해당 진술은 박노자의 주장대로 뻔뻔하게 책임 회피를 하거나 반성을 하지 않는 태도라기보다는 자신이 박원문을 살해할 의도가 없었다는 점에 대하여 사실 관계에 대한 해명을 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박원문이 변을 당한 것은 가해자로서 당연히 유감을 표해야할 사안이 맞지만 살해 의도가 없었던 행각에 대해 살인 죄명으로 기소를 당한 상황에서 살인 의도를 부정한 것은 피고인의 방어권을 행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당시 재판부가 이재명에 사형을 선고한 데에는 이완용에 대한 암살 미수가 아니라 박원문에 대한 살인죄가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살인미수와 과실치사만으로는 사형을 구형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며, 가해자가 유감의 뜻을 밝히거나 반성하고 있다고 해봤자 오히려 재판부에 의해 암묵적인 살해의도 인정으로 꼬투리를 잡혔을 가능성이 있다. 변호사 안병찬과 이재명 역시 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박노자도 일제가 박원문의 죽음을 이재명의 사형 구형을 위한 도구로 악용했고 재판이 잘못되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이재명의 의거에 대한 후대의 기록에도 박원문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소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박노자가 비판하고 있는 부분 역시 이재명이 반성도 없는 나쁜 사람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와 대의를 위해서라면 소(小)의 희생은 눈감아버리는 인식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실제로 해당 칼럼에서 쓴 김립 피살 사건에 대한 서술을 보면 이런 지적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해당 칼럼에서 박노자는 윤봉길 의사에 의한 민간인 일본인들의 피해를 주장하며 이라크 민족주의자들의 반미테러 행각과 윤봉길의 의거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난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실제로 홍커우 의거 당시 민간인 사상자는 기록된 바도 없으며 증거도 없고 오히려 해당 장소가 검열이 대단히 심해 민간인들이 함부로 오지도 못할 장소였단 것을 고려하면 대단히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다. 윤봉길의 의거는 오히려 정확하게 일본군 거물들만을 노린 것이였다는 점에서 차별화되어 중국 당국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아 긍정적인 반향을 일으킨 "의거"로 평가되고 있기에 많은 공감을 얻기는 힘든 주장이다. 별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무작정 테러와 동급으로 취급한다는 점은 비판받을 만하다. 이 부분은 박노자 본인이 평소 좋아하는 박헌영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간 것 같은데 박헌영의 이후 행적을 보면(...) 박노자의 주장은 더더욱 공감받기 힘들다. 게다가 박노자는 정작 공산혁명에서의 폭력성은 긍정적으로 평가한 게 문제.
3.1. 이재명 개인의 인식문제
위에 언급된 건 어디까지나 정치적, 법적 관점에서 본 것이고, 이재명 의사 개인의 마음속에서 박원문의 죽음에 대한 반성이 진짜로 있었는지, 있다해도 그게 과연 진지한 수준의 반성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쟁점이 되는 것은 무지무능한 저 가련한 노동자라는 표현인데, 가련하다는 단어에서 동정적 시선을 갖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재명이 엘리트주의에 입각하여 교육받지 못한 노동자 계층인 박원문을 하찮은 존재로 깔아보는 시선을 보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는 이재명이 인력거꾼을 방해물A 이상으로 신경쓰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암살에 실패한 뒤 교수형을 선고받고 형이 집행되기까지 반년이 넘는 시간동안 자신이 죽인 인력거꾼에 대한 사과나 추후 유족을 찾아 보상하려는 노력 등에 대해 아무 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수감되어있는 동안에도 편지나 일기 등으로 그러한 의사를 표명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인력거꾼을 죽인 것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은 일절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독립운동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무 죄 없는 일반시민을 죽이고 이후 합당한 조치나 혹은 일말의 태도조차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은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완용을 암살해야하는 다급한 상황상 인력거꾼을 살해한 것을 어쩔 수 없는 부수적 피해로 보더라도 적어도 법리공방이 끝난 재판 이후 시점에서 인력거꾼에 대한 사죄가 있어야 옳았다. 바로 이 점에서, 윤봉길의 의거에 대한 논리의 비약이 있었지만, 박노자도 '대의를 핑계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시각에서 박원문의 죽음을 별 거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태도'는 세계사의 많은 재앙을 낳은 사고방식과 닮아있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다.
다만 이재명의 입장에서 보자면, 박원문이 무슨 동기였던 적극적으로 제지하여 이완용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데 실패하였다는 점에서 좋은 감정을 품을 리는 없을 뿐더러, 이완용과 한패 아니냐고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게다가 '대의를 위한 것이라도 무고한 희생에 대한 사죄는 해야한다'는 당대에 거의 통하지 않던 매우 현대적인 사고방식이다.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를 보호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인식이 판결문에 박혔던 게 불과 수십년 전이었음을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