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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 한문명 | 民衆黨 |
창당일 | 1990년 11월 10일 |
해산일 | 1992년 3월 24일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대방로65길 20 (여의도동, 호성빌딩)[1] |
대표 | 이우재 |
정책위원장 | 장기표 |
사무총장 | 이재오 |
당 색 |
주황색 (#FFA500)
|
정치적 스펙트럼 | 좌익 |
1992년 3월 24일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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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1990년에서 1992년까지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진보정당이다.
'전망'이라는 이름의 기관지를 발행했다.
2. 역사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독자적 민중후보 출마를 주장하였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1989년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이 결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1990년 11월 10일 창당된다. 상임 공동대표 이우재, 김낙중[2], 김상기[3]. 정책위원장 장기표, 사무총장 이재오.[4]1991년 광역의원 선거에서 강원도의원 당선자를 배출했다. 그 주인공은 정선군 제2선거구에 출마했던 성희직. 대한민국 역사상 첫 진보정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였다.
1992년 2월 7일 한국노동당[5] 창준위와 통합했다. 기사 자세한 내용은 하단 참조.
그러나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에서 눈에 띄는 후보를 내지 못하고 전국구에서도 득표율 미달로 한 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하여[6] 정당 등록이 취소되어 해체되었다.[7]
서울 은평구 을의 이재오가 17%, 구로구 을[8]의 이우재가 20%, 동작구 갑의 장기표가 20%, 부산진구의 김영수가 11%, 인천 북구을의 송경평이 14%, 구미에서 윤상규가 27%의 득표를 얻고 장승포-거제에서도 장대현이 12%의 득표를 얻는 등 의미있는 득표를 기록한 후보가 여러명 있었지만 지역적인 조직력이 원채 허약했으니 당선권에 든 후보가 1명도 없었으며 울산과 창원에 지역기반이라도 있던 민주노동당과는 다르게 지역기반이 전무했으니[9] 의석을 내기에는 언감생심인 수준이었다.
3. 강령 및 정책
민중당 당헌·당규민중당 강령·기본정책
4. 역대 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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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우재 김낙중 김상기 |
민주자유당 총재ㆍ대표 ▶
국민승리21 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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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민중당 출신 인물
- 정당 등록 취소 이후 지도부였던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는 보수로 전향하면서 1994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새누리당에는 민중당 활동을 하다가 이들을 따라 같이 넘어간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한다.[10] 민중당에서 활동했던 이들 중에 김성식, 정태근, 신지호, 김용태, 차명진, 박형준, 임해규 등이 새누리당(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냈다.[11][12]
- 장기표는 이후 기존 정당, 신당을 가리지 않고 제도권 정치 진입 그러니까 국회의원 금뱃지를 달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통합민주당, 새천년민주당은 물론 좌우중도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있는대로 긁어모아서 민주국민당, 녹색사민당, 정통민주당, 국민생각 등등 선거때마다 정당을 급조하는 행태를 보이면서 이미지가 완전히 망가졌다. 2020년 21대 총선을 앞두고는 미래통합당에 입당해서 김해에 출마했지만 역시 낙선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21대 총선에서 보수정당 후보로는 오랜만에 좋은 득표율을 보이며 나이가 허락되는 한 다음 기회를 잡을 여력은 생겼다.
- 노회찬, 주대환, 조승수 등은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13] 창당을 준비하다가 1992년 초 민중당과 합당하였다. 민중당 해산 이후 지도부가 보수로 전향하고, 대부분이 노동운동/시민운동으로 떠난 이후에도 민중당 잔류파를 결집하여 진보정당 건설에 꾸준히 매진하여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백기완 후보 선거운동본부, ' 진보정치연합', ' 건설국민승리21'을 거쳐 민주노동당 창당에 이른다.
- 놀랍게도 허경영도 민중당에 참가했었다. 민중당 소속으로 1991년 지방선거에 출마했었는데, 이때부터 자신을 한국의 페스탈로찌라 칭하는 등의 패기를 보여줬다. 당시에는 무명의 정치지망생에 불과했기에 국회의원이 아닌 시의원[14]으로 출마하였다. #
- 민중당 91년「광역의원 선거」후보 43명 #
-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꼴찌를 기록했던 박종선도 1992년 민중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었다.
- 민중당 학생위원회로 결집했던 PD(민중민주)계 학생운동 분파들은 비주사 NL 그룹와 통합하여 1993년 21세기 진보학생연합으로 발전하였다.
[1]
창당 초에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352-21 신영빌딩에 터를 잡다가 1991년 5월 1일부터 이곳으로 옮겼다.
[2]
고려대학교 전 교수
[3]
경북대학교 교수
[4]
나중에
이종걸
새천년민주당 의원에게 이 경력으로 공격당했다...가 더 세게 반격하여 사과를 받아낸 적이 있다.
#
[5]
정식명칭은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노회찬이 이끌던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 1991년 공개적인 대중정치를 표방하는 신노선을 발표하고 준비하던 진보정당. 당시
인민노련 사건으로 노회찬 등 지도부는 전부 감옥에 있었지만, 나머지 조직원들이 여타 PD계열과 손잡고 활동하다가 결국 민중당과 통합했다.
[6]
광복 이래로 국회의원 선거는 1인 1표제였고, 비례대표를 따로 뽑게 된 것은 2004년
17대 총선떼 부터였다.
[7]
2014년
헌법재판소에서 총선 득표율 미만 정당 해산에 관한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8]
당시는
구로구와
금천구가 분구되기 전이었다. 14대 총선 당시 구로구 을은 지금의 금천구에서 가산동과 독산1동을 제외한 지역이었다. 구로동, 신도림동, 가리봉동으로 구성되어 있는 현재의
구로구 을과는 전혀 다르다.
[9]
민주노동당은 그래도 PK 일부지역에서 지역기반은 가지고 있었으며 2000년 총선과 2002년 지방선거 때는 말 그대로 투표율이 저조해서 그렇지 투표율이 높았으면 더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는 레벨이었다. 어쨌거나 그래서 분당 이후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10]
공산권의 붕괴에 따라 전향한 사람이 90년대 초반 상당히 많았다.
[11]
NLPDR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약칭
전민련)과의 불화로 넘어간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전민련측에서 민중당을 무시로 일관했다고 한다. 재야와 노동, 농민, 도시빈민, 학생 등 각 분야별 운동세력의 연합체였던 전민련은 초창기에는 스펙트럼이 매우 넒었다. 이중에서 일부가 독자 정당 창당을 추친했으나, 전민련을 주도하던 범NL계는 독자정당 창당은 분열이라며 1989년 대의원대회에서 부결시켜 버렸다. 여기에 반발해서 정치참여를 주장하던 사람들은 일부는 민주당에 입당했고 일부는 민중당 창당에 참여했다. 그리고 NL계는 범민주대연합론을 주장하면서 일관되게 선거때마다 보수야당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지지를 내걸고 독자적인 진보정당파를 무시했다.
[12]
1988년
전민련이 창립할 때 대외적으로 주목받던 재야운동가 40대 4인방이 있었는데 바로
이부영,
이재오,
장기표,
김근태였다. 1989년 대의원대회에서 독자정당창당안이 부결되자,
이부영은 보수야당경유론을 내걸고
꼬마민주당에 입당했고,
이재오와
장기표는 민중세력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면서 민중당 창당을 주도했다. 반면에
김근태는 민족민주운동 전선론를 설파하면서 재야운동에 잔류했다. 하지만 김근태도 1995년 결국
김대중이 주도한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하면서 제도권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13]
약칭 한국노동당.
[14]
은평구 구의원 출마(낙선) → 서울특별시 시의원 출마(낙선)